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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백두대간 종주기⑮] 설악과 마주한 점봉산, 혼자 걷는 깊은 숲길에서 마주한 사랑 노래
[백두대간 종주기⑮] 설악과 마주한 점봉산, 혼자 걷는 깊은 숲길에서 마주한 사랑 노래
  • 박상대 기자
  • 승인 2005.08.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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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곰배령 남쪽 가칠봉 가는 길. 야생화와 산나물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곰배령 남쪽 가칠봉 가는 길. 야생화와 산나물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인제] 백두대간 점봉산 구간. 단목령부터 한계령까지를 말하지요. 지난 가을에 한계령 쪽에서 오르다가 정상에 다 이르지 못하고 원점회귀했던 아쉬운 기억이 있는 산을 다시 다녀왔습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에 걸쳐 있는 산. 해발 1,424m.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과 마주보고 있는 산. 설악산국립공원 중 남설악의 중심이 되고, 북동쪽에는 대청봉(1,708m)이 있고, 북서쪽에 가리봉, 남서쪽에 가칠봉 등이 솟아 있지요.

산의 동쪽 비탈면을 흘러내린 물은 주전골을 지나 양양의 남대천으로 흐르고, 남서쪽 산비탈을 흘러내린 계곡물은 진동계곡을 지나 내린천으로 흐른답니다. 산을 오를 때마다 그 산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도 또 웅대한 모습을 하고 서 있는 산, 수천 수만 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견디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산을 겨우 수십 년 걷다 마는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점봉산을 오르기 전에 점봉산에 대해 자료를 뒤적거렸지만 역시나 짧은 몇 줄 글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산을 오를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지 모르겠습니다.

곰배령에 피어 있는 붓꽃.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곰배령에 피어 있는 붓꽃.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자동차가 강원도 홍천을 거쳐 기린면 진동계곡으로 들어서자 가슴이 쿵쾅거리네요. 간밤에 비가 내린 탓인지 계곡물이 시원스레 흘러내리더군요. 한동안 가뭄이라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고 계곡에서 래프팅을 할 수 없다고 하더니만 제법 물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점봉산 들머리 기린면 진동리.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5백 평 남짓 될 듯한 밭에 하얀꽃이 만발했거든요. 멀리서 보면 꼭 메밀꽃을 닮았지요. 이효석이 살아서 이런 광경을 보았다면 메밀밭이 아닌 개망초 꽃밭에서 사랑을 나누게 하지 않을까….

개망초 꽃밭에 달빛이 흐르면 이곳 역시 하얀 소금을 뿌려 놓은 것같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혼자 웃습니다. 개망초들을 뒤로 하고 산을 오릅니다. 길섶에 빨간 산딸기가 포동포동 살찐 얼굴을 살그머니 내밀고 있네요.

인적이 드문 산길에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곱기도 해라! 숫처녀같은 산딸기를 카메라에 담고, 한 알을 따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달콤새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침을 흘리게 합니다. 산길을 오릅니다.  

점봉산과 곰배령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산중화원을 이룬다. 사진은 능선에 가득 피어있는 범꼬리풀.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점봉산과 곰배령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산중화원을 이룬다. 사진은 능선에 가득 피어있는 범꼬리풀.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산길을 오르는데 전나무가 울창하고, 뻣뻣한 산나물이 꽃을 피우고 있네요. 참나물, 곰취, 곤드레, 단풍취 등등. 봄볕이 들 때 산객들의 손을 피해 살아남은 나물들이지요. 이제 줄기가 굵고 이파리가 거칠어졌네요.

소나무는 진초록 새순과 빨간 송화 봉우리가 예쁘게 솟아오르고, 함박꽃이 산골 새댁 얼굴을 하고 방긋 웃고 있습니다. 30여분 오르자 단목령이 나오네요. 단목령을 넘어가면 오색약수 있는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조침령, 왼쪽으로 오르면 점봉산이지요.

단목령에 서 있는 백두대간 장승. 박달나무가 많이 있다는 고개.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단목령에 서 있는 백두대간 장승. 박달나무가 많이 있다는 고개.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단목령(檀木嶺). 박달나무가 많은 고개라는 뜻이지요. 사방을 휘둘러보았는데 박달나무는 얼른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괜히 붙여진 이름이 아닐 겁니다. 백두대장군과 백두여장군 장승을 바라보며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산을 계속 오릅니다.

산이 깊고 숲이 짙어서 참 포근합니다. 포만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다만 바람이 없다는 게 아쉽네요. 키가 작은 산죽들이 밭을 이루고, 신갈나무류의 참나무들과 박달나무, 단풍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싸리나무들이 분홍색 꽃을 피우고 있네요.

숲길을 걸을 때마다 숲이 이루고 있는 질서를 보며 감탄합니다. 숲 전문가 우종영 선생의 말대로, 숲은 크고 작은 나무들, 서로 다른 종의 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이웃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적당한 간격’은 ‘그리움의 간격’인데 너무 붙어 있으면 양분 섭취와 햇볕을 많이 받기 위해 싸우게 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관계도 아니어서 서로 의지할 것도 없고 비바람도 홀로 겪으며 외롭게 살아야 한답니다.  

강선리 계곡 외딴집 옆마당에 있는 벌통.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강선리 계곡 외딴집 옆마당에 있는 벌통.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앗! 숲길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걷는데 제 주변에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깊은 산 속에 혼자! 산행을 시작할 때는 몇몇 사람이 함께 했는데 산길을 걷다보니 저도 모르게 외톨이가 된 겁니다. 사진을 촬영하고, 나무들과 꽃들을 구경하고, 더러는 말도 붙여보고, 그러다 보면 종종 혼자일 때가 있답니다.

숲은 참 조용합니다. 적막감이 들지요. 혼자 걸을 때면 더 조용하여 고요한 숲길이라 해야 할겁니다. 조용한 숲길은 더 덥습니다. 이마와 등에서는 땀이 흘러내리지요. 피곤함과 두려움이 뇌세포를 자극한 탓이겠지요.

숲길에는 멧돼지들이 파티를 벌이다 사라진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띕니다. 멧돼지는 무리지어 다니고, 적을 만나면 목숨을 걸고 어미부터 정면 승부를 건다잖아요. 저는 멧돼지의 적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갑니다.

금방 어디서 멧돼지 무리들이 쿨쿨쿨 씩씩대며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바람이 쏴아 불고, 나뭇가지가 꺾여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배낭 옆구리에 차고 있던 깔판이 툭 떨어져서 등골을 오싹하게 합니다.

점봉산 주전골의 가을 풍경. 점봉산의 한계령 쪽은 기암절벽이 아름답다.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점봉산 주전골의 가을 풍경. 점봉산의 한계령 쪽은 기암절벽이 아름답다.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푸다닥…. 멧돼지였을까요? 환청일까요? 꼬리도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동물의 소리. 멧돼지는 6백m 전방에서 사람을 피해 도망친다는데, 어느 게으른 녀석이 뒤늦게, 아니면 저를 우습게 알고 먹이를 먹다가 뒤늦게 도망을 친 걸까요?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멧돼지가 헤집어놓은 흔적들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혼자 걷는 산길에서 으스스한 장면만 마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산새들의 노랫소리에 가슴이 통통거리기도 하지요. 꾀꼬리와 비둘기, 박새, 소쩍새, 꿩, 산새…. 새들은 제 몸을 감추고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 맞히기가 어렵습니다.

새들은 제 짝을 찾아 고운 노래를 부른답니다. 일종의 프러포즈. 서로 더 고운 목소리로 이성을 유혹하는 것이랍니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지친 산객의 다리에 힘이 솟게 합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여유를 부리게 하지요.

들판에 피어난 개망초.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들판에 피어난 개망초.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뿐만 아니라 숲길에선 아름다운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도 들립니다. 여럿이 몰려 갈 때는 잘 듣지 못한 풀벌레 소리를 혼자 걸을 때는 또렷이 들을 수 있답니다. 여치, 풀무치, 쓰르레기…. 그들을 카메라에 담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지요. 그러나 그들의 노랫소리는 참으로 정겹고, 외로운 산객에게 더없이 훌륭한 길동무가 되지요.

백두대간은 점봉산 정상에서 한계령으로 하산해야 하는데 곰배령 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출입금지구역이거든요. 야생화와 산나물이 많다는 능선. 시계가 아주 넓습니다. 정상에 있을 때는 안개와 흐린 날씨 때문에 조망이 엉망이었는데.

곰배령으로 향하는 숲길에서 만난 자작나무.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곰배령으로 향하는 숲길에서 만난 자작나무.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곰배령! 키 큰 나무가 없고 야생화가 수천 평의 밭을 이루고 있는 고갯마루. 보라색 붓꽃과 참나물 꽃, 범의 꼬리와 노루오줌풀 등등 여름꽃들이 고갯마루를 뒤덮고 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이 핀다는 산상화원.

‘출입금지’ 울타리를 쳐놓았는데 살그머니 들어가 풀밭에 앉아 봅니다. 후텁지근한 온기가 온몸을 휘감습니다. 문득, 맑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라! 점봉산 정상에선 볼 수 없었던 파란 하늘. 그리고 함께 오지 못한 그리운 얼굴들이 눈앞에 스쳐갑니다.

강선리 계곡은 시원하고 맑은 물이 흐른다. 물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걷는 재미가 있다.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강선리 계곡은 시원하고 맑은 물이 흐른다. 물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걷는 재미가 있다. 2005년 8월. 사진 / 박상대 기자

곰배령에서 강선리 계곡으로 하산하는데 계곡이 이어집니다. 백두대간 산행길에서 좀처럼 만나지 못했던 아름다운 계곡입니다. 졸졸졸 흐르던 실개천이 촐촐촐 큰소리를 내다가 우르릉 콸콸콸 소리를 내는 큰 계곡으로 이어집니다.

혼자 걷는 하산 길에서 계곡에 흘러내리는 물소리의 아름다움에 다시 취합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콧노래가 절로 납니다. 여럿이 재잘거리며 걸을 때 듣지 못했던 아름다운 물소리.

실로 천의 소리가 둔감한 귀청을 파고듭니다. 혼자 걷는 산행에서 참 자유와 자연의 소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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