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내 고장 명물] 부산 명물 영도다리 70년 애환, 부산 사람 고향은 '다리 밑'?
[내 고장 명물] 부산 명물 영도다리 70년 애환, 부산 사람 고향은 '다리 밑'?
  • 김진용 기자
  • 승인 2005.08.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부산 영도다리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부산 영도다리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여행스케치=부산]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라.”, “영도다리 밑에 가서 물어봐라.” 이 부산 속어에 담긴 사연의 농도와 무게가 제1항구도시의 현대사 전부라 한다면 과할라나?

영도다리, 없앨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5년 넘게 부산시가 시끌벅적했다. 지난 2000년 영도다리 철거 주장이 제기됐다. 영도다리가 지역 경제를 되살리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였다.

영도다리 바로 옆에 건설될 107층 규모의 부산 제2롯데월드와 자갈치 시장, 용두산 공원, 국제시장을 잇는 관광 벨트를 위해서는 낡고 좁은 영도다리를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 여론에 부딪혀 그 이듬해 이 다리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지난해 다시 철거로 선회했다가 올해 초 결국 보수·복원 입장으로 돌아섰다.

70년이 넘는 세월, 하고 많은 차량을 떠받치느라 다 낡아버린 다리 하나에 대체 무슨 일이? 부산항과 영도 섬을 잇는 이 다리는 시작부터 요란했다.

1934년 영도다리 개통식에 무려 6만의 인파가 운집한 것이다. 214m의 거대한 다리가 바다를 건넌다니, 당시로서는 가당찮은 일. 그도 모자라 큰 배가 지나기 위해 다리의 일부가 하늘로 치솟는다니, 두루마기 걸친 할아버지, 치마저고리 입은 할머니 기절초풍할 밖에.

하루에 7번 들리던 다리는 차량 통행이 늘면서 6번으로, 2번으로, 그러다 66년 이후부터는 아예 고정돼 버렸다. 그 66년까지 무수한 선박과 부산 갈매기 사이로 치솟는 영도다리는 부산을 대표하는 명물이 었다. 단순히 신기해서가 아니었다.

옛날 영도다리 모습.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옛날 영도다리 모습.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
“남한으로 갈라문 맨 끝탱이에 부산이란 데가 있다더라만, 살라문 거기로 가야 한다는 기야. 기라구, 거기에 가문 말야, 무신 다리가 있는데, 기린데, 그 다리가 하루에 두 번씩 벌커덕, 든다는 기야.”

북한 출신 피난민 부부가 6·25 전쟁 통에 피난길에 나섰다 영영 못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윤진상의 단편 ‘영도다리’의 일부분이다.

살기 위해선 부산항으로 와야 했다. 가장 남쪽인데다 식량과 의복 등 전시물자가 풍부했다. 미군부대와 구호단체가 모여들었고, 끼리끼리 살아야 고향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큰 상권이 형성됐고 엄청난 부두 하역 노동이 필요했기에, 전쟁 중에도 일자리를 구할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전쟁 직전 부산 전체 인구는 약 20만. 하지만 51년 3월에는 부산항 주변 중구 지역만도 무려 5백 81만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부산항을 중심으로 지금의 중구 용두산 공원 자락과 영도 봉래산 자락으로 모여들었다.

영도 봉래산 자락과 영도다리. 저 주택 전부가 판자촌이었다. 중구의 중앙동, 동광동, 영주동, 남포동, 광복동, 글고 영도의 대평동, 남항동, 신선동, 청학동 부근이 모두 그랬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도 봉래산 자락과 영도다리. 저 주택 전부가 판자촌이었다. 중구의 중앙동, 동광동, 영주동, 남포동, 광복동, 글고 영도의 대평동, 남항동, 신선동, 청학동 부근이 모두 그랬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그 중구와 영도를 영도다리가 잇고 있었다. 서울의 1개 구(區)도 안 되는 곳에서 ‘6백만명’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산비탈과 골목은 천막집과 움막집, 그리고 판잣집 숲이었다. 미군 부대의 배급 분유와 강냉이를 줄지어 타먹는 날은 봉잡은 날이었다.

밤에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외국인은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판자촌 불빛을 거대한 빌딩 불빛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함경도에서 피난온 남편을 따라 50년대 영도에 살았던 황차선(69) 할머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영도다리 건너가몬 바로 자갈치 시장 아이가. 자갈치에서 지푸라기 주서갖고 돌담 밑에서 불 때고, 감자 껍질 모아서 거기 붙어있는 감자 발라내서 반찬하고, 고구마 줄거지 주워 국 끓여 묵었다 아이가.”

그런 사정으로 영도다리 주변에는 버려진 아이가 부지기수였다. 지금도 속썩이는 아이에게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한다.

자갈치 시장은 이 부두에서 자라났다. 영도다리가 생기기 전 영도와 자갈치 부두를 잇던 갯배가 지금도 다니고 있다. 속초 아바이 마을의 갯배가 떠오른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자갈치 시장은 이 부두에서 자라났다. 영도다리가 생기기 전 영도와 자갈치 부두를 잇던 갯배가 지금도 다니고 있다. 속초 아바이 마을의 갯배가 떠오른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라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란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턱을 덜덜 떨며 마이크를 잡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부산의 가수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2절이다. 자갈치 시장은 애초 광복 후 외국 동포가 귀환하고 전쟁 물자를 내리는 작은 부두였다. 이북 피난민이 모여들면서 시장으로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입 상가로 명물이 된 근처 국제 시장도 원래 외국 물자와 달러가 음으로 양으로 거래되던 장터였다. 피난민이 모여들면서 ‘돗대기 시장’이라고 불리다 국제시장으로 자랐다. 이 시장 주변의 좌판일과 지겟꾼일, 깡통물건 장사와 밀수, 부두 막노동이 거지 신세나 다름없는 피난민의 밥벌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달밤에 터벅터벅 영도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그 다리를 차마 다 건너지 못했다. 난간을 움켜쥐고 피눈물을 삼키다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가혹한 수탈에 못 이겨 투신한 사람이 많았고, 그런 연유로 한때 ‘잠깐만’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기도 했다. 지금도 속터지는 일이 있을 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라’ 한다.

영화 '친구'의 첫 장면 촬영지. 준석, 동수, 상택, 준호가 영도다리를 걸어온다. "테레비녹음기? 그기 뭐꼬?" "녹음기처럼 테레비를 녹음할 수 있는 거." "꽁까지 마라! 임마, 세상에 그런 기 어딨노?"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화 '친구'의 첫 장면 촬영지. 준석, 동수, 상택, 준호가 영도다리를 걸어온다. "테레비녹음기? 그기 뭐꼬?" "녹음기처럼 테레비를 녹음할 수 있는 거." "꽁까지 마라! 임마, 세상에 그런 기 어딨노?"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난간에 아직 과거와 현재를 잇는 낙서가 씌어지고 있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난간에 아직 과거와 현재를 잇는 낙서가 씌어지고 있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도다리 아래 가서 물어봐라
“누굴 찾아 헤매이나 어디로 가야 하나/영도다리 난간 잡고 나는 울었네” 가수 윤일로의 <추억의 영도다리> 일부다. 천리 초행 피난길의 가장 안전하고 쉬운 약속이 부산에 오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영도다리’였다.

헤어진 이와의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떠나려야 떠날 수가 없었다. 피난민은 다리 난간에 낙서를 새기며 그 끈을 이어갔고 대답없는 내일을 끄적여 나갔다. 그런 낙서의 역할을 떠맡은 곳이 영도다리 밑 ‘점바치 골목’이었다.

판자집으로 된 1평 반 남짓한 점치는 집 40여개가 빽빽이 들어선 것이다. 진주집, 대구집, 서울집, 함흥집 …. 60년대 이후 대부분 헐렸지만 지금도 3~4채가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산에선 아직도 속절없는 질문을 받으면 ‘영도다리 밑에서 물어봐라’ 한다.

용두산 공원으로 오르는 산자락.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용두산 공원으로 오르는 산자락.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도다리 아래 '점바치 골목'으로 내려가는 길.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영도다리 아래 '점바치 골목'으로 내려가는 길.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굳세어라 영도다리야!
최해군 부산 시사(市史)편찬위원은 영도가 일본인 거주지와 군사시설확장지로 개발되면서 영도다리가 가설됐다고 말한다. 조선 말기까지 부산의 중심은 북쪽에 떨어진 동래부였다. 오늘날 용두산 공원 근처인 부산항 주변은 부산진이라는 이름의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부산항이 대대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면서부터다. 초량 왜관 같은 일본인 거주지역과 해운업체가 일대를 메우고 대륙 침략용 군수물자도 들어오면서 부산항 근처가 점점 협소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영도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토착 서민의 애환이 깃든 영도다리 부근은 6·25 전쟁까지 거치며 일약 부산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떠날 곳이 없었던 피난민 상당수가 그대로 눌러 살게 됐다.

1950년대 당시 부산 피난촌의 움막집. 영도 끝자락 태종대에 가본 사람은 영도 바다의 칼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안다. 이 움막집으로 바람과 추위를 버텼을 것이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1950년대 당시 부산 피난촌의 움막집. 영도 끝자락 태종대에 가본 사람은 영도 바다의 칼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안다. 이 움막집으로 바람과 추위를 버텼을 것이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이들 피난민과 토착민이 90년대 초반까지 부산의 중심 상권이었던 중구 광복동, 남포동, 중앙동 상권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북쪽의 동래 지역까지 합쳐지면서 제1항구도시 부산의 모습이 갖춰진다.

올해 초 오랜 갈등 끝에 부산시와 롯데월드, 그리고 부산 시민은 영도다리의 역사를 보존하는 데 합의했다.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다리가 들리는 기능도 복원하기로 했다. 2008년 뜻대로 영도다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다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지 않을까.

끄덕끄덕 치솟는 다리 앞에 다시금 터지는 환호성은,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를 이어주는 환호성이 되지 않을까. “아부지, 영도다리 보러 가입시더~.”

50년 넘게 '소문난 점집'을 운영하는 김용진 옹.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50년 넘게 '소문난 점집'을 운영하는 김용진 옹. 영도다리의 역사와 세월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Interview 점바치 골목의 터줏대감 김용진 옹
50년 넘게 영도다리 아래에서 ‘소문난 점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김용진(81)옹. 영도다리 아래로 흘러든 수많은 사연의 속내를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는 할아버지다. 하지만 그는 막상 영도다리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4살 때 이후로 앞을 못 보기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니까 사람들이 막 몰려 들대. 자기는 원래 대학교수인데 여기서 부두 짐꾼 노릇한다는 둥 하며 울고불고 했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느냐, 어디가면 일자리가 많으냐 하는 것도 물었다니까. 하루에 100명도 넘게 찾아왔지.”

부산의 근현대사를 볼 수 있는 사진과 생활용품들을 볼 수 있는 40계단의 모습.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부산의 근현대사 속  수많은 판자촌 주민들의 삶의 길목이었던 40계단의 모습.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주변 여행지
40계단과 40계단 문화관

40계단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극중 킬러로 분한 안성기가 살인 사건을 일으킨 배경 장소로 유명하다. 이곳 역시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영도다리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40계단은 부산항이 있는 중앙동에서 동광동의 판자촌 언덕길로 이어지는 삶의 길목이었다.

바로 옆 동광동 사무소에는 ‘40계단 문화관’이 마련돼 있는데 꼭 찾아볼 만하다. 40계단 주변의 고달픈 피난살이 사진과 생활용품은 물론, 부산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용두산 공원의 부산 타워.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용두산 공원의 부산 타워.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용두산 공원
1954년 용두산 자락 피난민촌에 큰 불이 나면서 판자촌을 홀라당 태워버렸다. 그 탓에 지금의 용두산 공원이 꾸며질 수 있었다. 조선 말기에는 초량 왜관의 중심지였다. 용두산 공원의 부산 타워에 올라가면 웅장한 부산 시내가 끝없이 펼쳐진다. 특히 대한민국 제1항구 부산항 전경과 영도다리, 영도섬을 굽어 볼 수 있다.

'돗대기 시장'의 어원이 된 국제 시장 풍경.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돗대기 시장'의 어원이 된 국제 시장 풍경.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국제 시장
국제시장은 한때 부산 상권의 상징이었다. ‘돗대기 시장’의 어원이 된 곳.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용물자와 함께 온갖 상품이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되었는데,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되곤 했다. 근처 깡통시장에서는 내다 버린 미제 빈 깡통을 모아 반반하게 편 일명 ‘깡깡이’가 많이 팔렸다. 판잣집 지붕을 잇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맛 집
남포동과 국제시장 주변은 항도 부산에서 맛볼 수 있는 별의별 음식이 다 있다. 돼지국밥과 회국수는 특이하면서도 부산 사람에게는 대중적인 음식이다. 냉채 족발을 맛볼 수 있는 남포동 족발 골목은 서울의 장충동만큼이나 북적거린다.

할매집 내부 모습. 40년 전통 비빔회국수를 맛볼 수 있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할매집 내부 모습. 40년 전통 비빔회국수를 맛볼 수 있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할매집 회국수
40년 전통. 비빔국수에 가오리회를 얹어 양푼에 담았다. 비벼서 먹으면 은근히 오래가는 매운 맛이 좋다. 가오리회의 신선하고 오도독거리는 맛이 조화를 이룬다. 마지막엔 뜨거운 육수로 매운 맛을 달랜다.

부산의 돼지 국밥을 맛볼 수 있는 골목집.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부산의 돼지 국밥을 맛볼 수 있는 골목집.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골목집
부산 사람들은 소고기 국밥보단 돼지 국밥을 먹는다. 설렁탕 먹듯이 자주 먹는다. 돼지고기로 국밥을 한다니 좀 이상하다 할 지 모르겠지만 느끼하지 않고 맛있다.

남포동 먹자골목에 늘어선 음식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남포동 먹자골목에 늘어선 음식들. 2005년 8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남포동 먹자골목
지금은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명성은 남았다. 고추장으로 볶은 덕에 잡채에 비해 더 담백한 비빔당면과 데친 오징어, 순대, 오뎅, 부추전, 파전, 냉면 등 없는 게 없다. 경상도에선 순대를 막장에 찍어 먹는다.

Tip.
영도다리에서 남해고속국도 쪽으로 빠져나오려면, 구덕 터널을 지나게 된다. 터널 요금소를 지나며 소쿠리 같은 곳으로 미리 준비한 동전을 던져 넣으면 통과할 수 있다. 재밌다.

Info 가는 길
부산역에서 남포동 방향 시내버스를 타거나(10분 소요), 부산 지하철 남포동 역에서 하차.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