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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강마을 여행기] 유순한 서강이 감싸 안은 영월 선암마을
[강마을 여행기] 유순한 서강이 감싸 안은 영월 선암마을
  • 김은주 객원기자
  • 승인 2005.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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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이른 아침의 서강. 고요하고 적막하게, 그렇지만 쓸쓸하지는 않게.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이른 아침의 서강. 고요하고 적막하게, 그렇지만 쓸쓸하지는 않게.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영월] 물살이 빠르고 거칠다는 동강을 ‘수캉’이라 부르고 그에 비해 유순한 서강은 ‘암캉’이라 한다. 둥굴게 이어진 단애를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서강. 한반도와 같은 모습이라 해서 이름난 선암마을은 여전히 순박한 산골 인심을 지니고 있다.

선암마을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청량리역에서 제천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기차역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영월 서면 종점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서면에 내려 다시 택시를 타야 했다.

무조건 고기를 구워 먹어야 한다고 외치던 지은이는 집 냉장고를 통째로 떨어 왔는지 혼자서는 들기도 힘든 아이스박스를 이고 지고 끙끙대면서 왔다. “돌아가기 전까지 무조건 다 먹어야 해!” 지은이는 종주먹을 흔들며 숫제 협박을 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굉장한 오지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피난살이 가듯 죄다 싸들고 올 것까진 없다고 그렇게 말렸건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긴, 그런 지은이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선암 마을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간다. 기차 여행이 자동차 여행보다 즐거운 점 중의 하나, 바로 짐수레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를 불러 세워 이것저것 마구 군것질을 해댈 수 있다는 점이다.

기차를 타기만 하면 무조건 삶은 달걀을 먹어야 한다고 우기던 추억 속의 그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생각난다는 것만 빼면 유쾌하기 짝이 없는 여행이다.

영월의 10경 중 하나인 한반도 지형.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영월의 10경 중 하나인 한반도 지형.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때로는 맥주와 육포를, 때로는 커피 한 잔을, 기분 내킬 때면 식당 칸까지 굳이 가서 창가에 앉아 시끌벅적 만찬을 즐길 수도 있다. 여행에 목마르기도 했지만, 그 목마름보다 잠이 더 고팠던 우리들은 떠들 만큼 떠들다가 하나씩 곯아떨어졌다.

제천역에 내린 것은 한낮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날씨는 무지하게 좋았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쨍하다. 어서어서 서강에 도착해서 물에 온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서면행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1시간 넘게 달렸다.

평일 한낮의 작은 마을은 말할 수 없이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서울, 경기 번호판을 단 차들이 가끔씩 지나갈 뿐 차도 거의 다니질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나온 동네 꼬맹이나, 이웃 동네 총각들이 피난민 같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간다.

순식간에 구경거리가 된 우리들, 서둘러 떠나려고 해도 좀체 택시가 오질 않는다. 택시라고는 그 마을에 딱 한 대밖에 없다는데, 그 택시는 지금 제천에 볼일 보러 나가 있고, 콜택시를 부를 수도 없단다. 별 수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이런 것도 재미라면 재미 아니겠는가. 낯선 동네에 와서 능소화가 멋들어지게 담장을 휘감은 집을 구경한다거나,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돌덩어리들을 가게 외벽에 듬성듬성 대충 붙여 놓은 ‘돌다방’의 문이 언제쯤 열리나 쏘아 본다거나 하는 재미 말이다.

“영심이네 집으로 가 주세요.” 과연 통할 것인지, 궁금했던 대목이다. 영월 작은 마을의 택시 아저씨에게 무슨 읍, 무슨 리가 아니라 ‘영심이네 집’이라고 말해도 우리를 목적지에 잘 데려다 주실 것인지. “선암 마을에 가시는 모양이지요?” 이런, 진짜 통한다.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는 선암마을의 송림숲 풍경.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는 선암마을의 송림숲 풍경.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택시를 타고 30분쯤을 달려야 하는 집인데도 그냥 누구네 집, 이라고만 해도 알아듣는다는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괜히 신이 났다. 별것도 아닌 일에 기분이 좋아져 버린 나, 선암 마을까지 가는 동안 내내 붕붕 떠다녔다.

우리가 묵기로 한 영심이네 집 마당에는 놀러온 사람들의 차가 빼곡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놀랐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몇 번이나 이 곳을 다시 찾는 사람들이라서 초행인 사람들은 별로 없다고 했다.

우리가 짐을 푼 저녁에도, “나흘 동안 잘 쉬다 갑니다. 더 있으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안 되겠네요.” 하고 인사를 하고 떠나는 단골손님이 있었다. 온 가족이 인사를 하고 떠나는데, 민박집 부부는 또 방학 때 꼬맹이들 데리고 다니러 온 친척을 배웅하듯이 살뜰하게 보내 주신다.

물론, 우리를 맞아 주실 때도 한없이 따뜻했다. 오자마자 우리에게 갓 삶은 옥수수부터 덥썩 내미셨던 분들이다. 올해 6학년인 영심이 아버지 서현석 씨는 선암 마을에서 나고 자란 분이다.

벌써 4대째 이 선암 마을에 살고 있다는 영심이네 아버지는 이 마을 이장님이기도 한데, 농사도 짓고 민박도 치고, 강가에서 고기도 낚으면서 사신다. 말할 수 없이 얼굴에 평화가 넘치시는 분이다.

사는 동안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사셨을 것만 같은 얼굴. 영심이 어머니 얼굴도 그랬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그런 아낙처럼 유순하고 부드러우셔서, 도무지 장사하는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았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물놀이 하러 갈 차비를 했다. 민박집에서도 서강이 씩씩하게 흘러가는 소리가 다 들려서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구명조끼를 챙겨 입고 가라고 하시기에, “에이, 깊이 들어갈 것도 아닌데요, 뭐” 했으나 강물의 속도나 세기는 과연, 장난이 아니었다.

구명조끼를 꼭꼭 여미고 들어갔는데도 몸이 저절로 두둥실 물결 따라 자꾸만 흘러가려는 통에 맥주병 신세인 나로서는 물놀이를 맘 편하게 즐길 형편이 못 되었다. 내가 겁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서두. 부드럽고 유순한 강이라는 서강이 이러니 동강은 어떠하겠는가.

강가에 내다놓은 빨래판. 빨래하면서 두런두런 세상 이야기 나누던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했듯이,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빨래를 한다.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강가에 내다놓은 빨래판. 빨래하면서 두런두런 세상 이야기 나누던 우리 어머니들이 그러했듯이,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빨래를 한다.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수영도 못 하는 나는 몇 번 허우적거리다가 물에 젖은 몸을 강변에 누인 채 뒤집었다 엎었다 하면서 쨍한 햇살에 뽀송뽀송 온몸을 말렸다. 젖은 옷이 마르는 동안 적당히 따뜻한 햇볕에 의지해 자는 잠깐의 낮잠,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최상의 휴식이었다.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에 귀를 적시고, 오랜 세월 그 강물에 의지해 둥글게 제 몸을 깎아 온 돌멩이에게 진정한 부드러움을 배우면서. 영월 동쪽을 흘러가는 동강은 래프팅이다 뭐다 해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영월 서쪽을 돌아 흐르는 서강은 동강에 비해 사람도 적고 조용한 곳이다.

물살도 세고 여기저기 휘어진 굽이가 많은 동강을 수캉이라 하고, 유장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서강을 암캉이라고들 하는데 가족들과 함께 조용히 머물다 가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곳을 없을 듯하다. 선암마을엔 숙소가 넉넉지 않다는 것이 흠이면 흠이랄까.

아, 또 하나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어서 먹을 것을 준비해 가지 않으면 기아에 허덕이게 된다는 것을 꼭꼭 명심해야 하는 곳이다. 물놀이는 잠깐이었는데도 꽤 피곤했던 모양인지 그 밤엔 달고 깊은 잠을 꿈도 없이 잘도 잤다.

서강의 뼝대. 강가의 기암절벽이나 벼랑을 뼝대라 부른다.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서강의 뼝대. 강가의 기암절벽이나 벼랑을 뼝대라 부른다. 2005년 10월. 사진 / 김은주 객원기자

비 내린 다음 날 아침, 서강을 걷는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발이 아침까지 그치지 않고 조금씩 날리고는 있지만, 우산을 뒤집어쓰기보다는 가녀린 안개비에 옴팡 젖어 버리고 싶은 아침이다. 저만치 뼝대 아래 원앙 한 쌍이 혼자 걷는 나를 놀리듯 저희들끼리 어여쁘게 정겹다.

한 마리가 물을 차고 오르면 덩달아 다른 한 마리도 수면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이 아침의 고요를 깨는 녀석들의 연애짓이 참으로 미쁘다. 아직 세상이 깨어나지 않은 시각, 나 홀로 푸른 서강을 만나는 일은 마음이 간질간질한 즐거움을 안겨 준다.

올초에 새로 만들어 띄웠다는 줄배가 여름 장마에 떠내려가지 않고 강물에 흔들리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풍경이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는 알았다. 저 강물은 영원히 흐르고 흐를 것이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거기에 있어 늘 똑같은 물이지만, 동시에 늘 새로운 물이라는 것을.”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내 눈 앞의 강물은 어제처럼 똑같이 흘러가고 있지만, 그 빛깔도 내음도 어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도라지꽃 찍는 거래요?” 민박집 돌아가는 길섶에 도라지꽃 무더기가 곱길래 열심히 셔터를 눌러 댔더니 영심이 아버지가 신기한 듯 바라보시더니, “꽃이 참 이쁘지요?” 이렇게 한 마디 건네고는 강으로 나가신다.

아무렇지 않은 그 꽃을 이쁘게 보실 줄 아는 눈이야말로 정말 이쁘지요, 하는 말을 맘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아침을 먹고 고개 너머 밭에 가신다는 영심이 아버지 트럭을 얻어 타고 전망대까지 갔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푸른 강물, 초록의 육지섬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한없이 선하게 생긴 영심이네 식구들이 그 마을에서 상처받지 않고 오래도록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Info 가는 길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월 가는 버스를 타고 움직이거나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에서 내려 서면까지 다시 버스를 갈아타는 방법이 있다.

자동차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신림 나들목에서 88번 지방도를 타고 영월 방면으로 가다가 주천 방향으로 접어든 뒤 서면으로 가면 된다.

장릉 앞에 있는 ‘장릉 보리밥집’에서 반드시 보리밥을 먹어 보실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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