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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남산 탑곡마애조상군과 서출지, 바위 기슭에 숨은 신라 보물
남산 탑곡마애조상군과 서출지, 바위 기슭에 숨은 신라 보물
  • 노서영 기자
  • 승인 2006.03.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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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탑곡마애조상군 뒤쪽에 해당하는 남면. 부처의 의상에 붉은 빛이 감돈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탑곡마애조상군 뒤쪽에 해당하는 남면. 부처의 의상에 붉은 빛이 감돈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여행스케치=경주] 경주를 여행할 땐 불교국가를 염원하던 신라인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남산을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 동서로는 4km, 남북으로 8km가 되는 남산은 120여 구의 불상과 96기나 되는 석탑, 146곳의 절터가 남아 있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경주. 경주를 떠올리면 항상 꼬리표처럼 붙는 말이다.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신라 왕조의 수도였던 경주는 세계 10대 문화유적지의 하나로 지정된 역사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유적지인 경주에서도 남산은 불교의 성지이며, 백성들의 신앙지로, 나라를 지키는 산성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성산이다. 해발 468m의 금오산과 해발 494m의 고위산으로 이루어진 남산은 신라시대 서민들의 불교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극락세계의 다른 표현인 '안양'의 이름을 따온 안양교를 건너면 옥룡암이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극락세계의 다른 표현인 '안양'의 이름을 따온 안양교를 건너면 옥룡암이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집채만한 바위 한 덩이=사찰’(?)
부처 바위라고도 불리는 탑곡마애조상군을 찾으려면 부처골 입구에서 남천을 거슬러 300m 가량 올라야 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숲속 길을 걷다보면 ‘극락’의 다른 표현인 ‘안양(安養)’이란 이름을 지닌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옥룡암, 그 왼편 위로 탑곡마애조상군이 나온다.

탑곡마애조상군(塔谷磨崖彫像群)이란, 높이 약 10m, 너비 30m 가량 되는 암벽과 주변의 바위면에 여러 불상을 새겨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풀 사이로 볼록 솟은 이 바위를 찬찬히 훑어보면, 세월의 흔적 속에 많이 지워지긴 했지만, 탑을 비롯하여 비천상, 나한상, 보살상 등 다양한 암각화를 볼 수 있다.

탑곡마애조상군 북면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9층 목탑이 새겨 있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탑곡마애조상군 북면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9층 목탑이 새겨 있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탑곡마애조상군 정면에 새겨진 9층탑과 7층탑, 그 사이로 부처님과 머리 위의 천개(天蓋), 또한 비천(飛天)까지. 바위의 단면에 사찰 하나를 모두 그린 것으로 보아 과연 불교국가 신라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탑곡마애조상군 정면의 9층탑 암각화와 관련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의미있는 추측이 이뤄지고 있다. 즉, 소실되고 없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을 그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신라 변방의 9개 국가를 견제하려는 호국의 목적으로 세워진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율사의 권유로 건축되었다가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버렸다.

높이 80여m 되는 이 목탑을 지하 없이 지상에서 쌓아올린 선조의 기술은 현재의 건축기술로도 어렵다고 할 정도로 훌륭했다고 평가된다.

서출지 야경. 연꽃에 둘러쌓인 '산과 물을 즐긴다'는 의미의 이요당이 신비로워 보인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서출지 야경. 연꽃에 둘러쌓인 '산과 물을 즐긴다'는 의미의 이요당이 신비로워 보인다.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거문고 갑에서 흘러나온 적혈의 사연
조선시대 현종 5년(1664년)에 지은 산과 물의 즐거움을 함께 즐긴다는 의미의 이요당(二樂堂) 정자가 있는 서출지는 남산 철와골에 있는 연못을 말한다.

늦은 봄이나 여름이 되면 연꽃이 연못 가득 만발한다. 연못가로 수령이 지긋한 나무와 사이사이에 설치된 조명이 조화를 이루어 밤이 되면 딴 세계에 온 듯한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신라 21대 소지왕(488년)이 재위하던 시절, 신하들과 함께 남산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井)에 왔더니 까마귀와 쥐가 울부짖으며 말을 했다. 괴이하게 여겨 신하가 까마귀를 쫓아 갔더니 이 못에 다다랐다.

왼쪽 손은 배를 잡고 있는 듯 하여 안산불이라 불린다. 탑곡마애조상군 남면의 향마촉지인을 한 입불.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왼쪽 손은 배를 잡고 있는 듯 하여 안산불이라 불린다. 탑곡마애조상군 남면의 향마촉지인을 한 입불.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신하에게 봉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겉봉투에는 ‘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열면 2명이 죽고, 열지 않으면 1명이 죽는다)’ 라 적혀 있고 안에는 ‘射琴匣(사금갑)’이라 적혀 있었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왕비의 침실에 있던 거문고갑(琴匣)을 쐈더니(射), 그 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왕실에서 분향하는 중과 왕비가 왕을 죽일 흉계를 꾸미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못에서 글(書)이 나와(出) 궁 안의 간계를 막았다는 의미로 연못의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지었고, 왕을 살린 까마귀를 기리고자 정월 보름날 찰밥을 지어 담에 얹는 풍속이 생겼다. 이를 오기일(烏忌日)이라 한다.

사랑채와 별당 복원 작업 중인 최씨고택.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사랑채와 별당 복원 작업 중인 최씨고택.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Info 경주 시내 둘러보기
● 교동 최씨고택
1700년대 최씨 종가로 건립된 이 가옥은 본래 99칸이었다. ‘ㅁ’자 모양의 안채, ‘ㅡ’자 모양의 대문채와 문간채, 사당, 고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70년에 사랑채와 별당이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최근 경주시가 사랑채와 별당 복원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2007년까지 조성할 계획인 ‘교촌한옥마을’ 공사의 일부이다.  

● 경주특산품 ‘빵’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듬뿍 넣어 만든 쫀득하고 달콤한 빵. 경주 특산품으로 지정된 빵의 원조는 황남빵이다. 3대째 전수되어 온 60년 전통의 황남빵은 말랑말랑하면서 느끼하지 않아 외국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경주 고속터미널에서 좌측으로 직진하면 빵거리가 나온다.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밥상을 받아볼 수 있는 도솔마을 풍경.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밥상을 받아볼 수 있는 도솔마을 풍경. 2006년 3월. 사진 / 노서영 기자

● <맛집> 도솔마을
메주가 덜 풀린 걸쭉한 된장과 배추, 시원한 묵냉채와 동치미. 푹 익은 김치와 막 무친 듯한 나물, 넙적 썬 무를 넣고 끓인 생선조림과 돌김. 도자기 그릇에 담은 푸짐한 음식이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전통 기와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단체 손님은 넓은 사랑방, 수가 적으면 갓방에 상을 차려 낸다. 식당이란 느낌보다 시골 할머니 댁에 온 기분이다.

가는길 _ 경주 내남사거리에서 내남 방향으로 직진하다 왕릉숯불집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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