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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사람이 살고 있는 민속촌, 고성 왕곡마을
사람이 살고 있는 민속촌, 고성 왕곡마을
  • 이수인 기자
  • 승인 2006.04.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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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봉우리와 호수가 지켜낸 마을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고성 왕곡마을 전경.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오음산을 문필봉 삼아 전통가옥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두 차례의 산불로 벌겋게 타버린 산야가 쓸쓸함을 자아낸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여행스케치=고성] 덜커덩 덜커덩 소달구지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지나갈 것 같은 황토길로 택배차 한대가 달려간다. 도시 사는 어느 집 아들·딸내미가 시골 사는 부모님께 선물을 보내나 보다.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덥히는 전통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마을의 시간은 어디쯤에서 멈춰선 것일까?

고려 말 예부상서와 홍문관 박사를 지낸 함부열(咸賻說)은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공양왕이 유배되자 간성으로 들어와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그 후손들이 조선 건국 뒤 숨어든 곳이 오봉리의 왕곡마을이다.

2000년 4월 강원도 고성 지역에 또다시 거대한 산불이 발생하였다. 96년 4월의 산불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6년 만에 또다시 융단폭격을 맞은 셈이니 고성군 죽왕면 일대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상처를 간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두 차례의 화마로 주변 야산이 온통 숯덩이가 되었어도, 정말 신기하게도 어느 집 한 채 상한 데 없이 멀쩡한 마을이 있다. 백두대간 지맥의 다섯 봉우리를 병풍 삼고 송지호를 방패삼아 씨족 공동체를 5백 년간 이어온 오봉리 왕곡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마을 어귀엔 십여 그루의 잘 생긴 노송들이 서있다.

마을 어귀에 서있는 소나무. 향긋한 솔향이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마을 어귀에 서있는 소나무. 향긋한 솔향이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수령이 150년 이상 되었다지만 한국전쟁 당시 큰 나무들은 다 베어 버렸고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것들이 어른 팔로 넘치게 안길만큼 자랐다. 마을에 들어서면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전통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회마을이나 낙안읍성처럼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번듯한 외관을 갖춘 집들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설수록 시간이 멈춰선 듯 아늑한 고향마을의 정겨운 모습이 펼쳐진다. 전통 기와집 마당에 서있는 감나무며 대추나무가 봄 채비를 하려는지 가지마다 촉촉이 물이 올랐다.

쑥이며 냉이가 새치름히 고개를 내민 토담 옆으로 새참을 이고 가는 아낙네를 동네 개 한마리가 따라간다. 마을의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서 잠시 주변으로 눈길을 돌리면 두 차례나 들이닥친 대형 산불로 깊은 시름을 하고 있는 검붉은 산들이 보인다.

고려 말 예부상서와 홍문관 박사를 지낸 함부열(咸賻說)은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공양왕이 유배되자 간성으로 들어와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그 후손들이 조선 건국 뒤 숨어든 곳이 오봉리의 왕곡마을이다. 2006년 4월. 사진제공 / 고성군청
고려 말 예부상서와 홍문관 박사를 지낸 함부열(咸賻說)은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공양왕이 유배되자 간성으로 들어와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그 후손들이 조선 건국 뒤 숨어든 곳이 오봉리의 왕곡마을이다. 2006년 4월. 사진제공 / 고성군청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고성은 북한으로, 남고성은 남한으로 나뉜 고성땅은 어느 산이나 바닷가를 가보아도 쉽사리 군부대를 보게 된다. 그래서 고성산불이 났던 당시 전통가옥을 지키기 위해 근방의 군병력이 총동원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형국이라서 그 무서웠던 산불도 피해갔다는 얘기는 그저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마을 한가운데 서서 검게 불타버린 산봉우리 아래에 생채기 하나 없이 얌전히 자리 잡은 마을을 바라보자니 당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썼는지 짐작이 간다.

왕곡마을은 지난 88년 전통가옥 보존마을 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전통가옥들을 오롯이 보존할 수 있었던 건 마을 앞에 펼쳐진 석호 송지호와 마을을 둘러싼 다섯 개의 큰 봉우리가 외부로부터 마을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기 때문.

특히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덕에 한국 전쟁 때에도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현재 51가구 119명의 주민 중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이라니 나이든 어른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은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강릉 함씨, 아래쪽에는 강릉 최씨가 집단으로 모여 사는데 함씨가 최씨보다 좀더 많다. 기와집에 사는 함씨와는 달리 주로 초가집에 살았던 최씨의 집들은 새마을운동이 휩쓸고 가면서 슬레이트와 시멘트집으로 바뀌었다.

군청에서 매입한 빈집들이 전통가옥으로 새단장 되고 있었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군청에서 매입한 빈집들이 전통가옥으로 새단장 되고 있었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하지만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다시 전통가옥으로 개조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빈집들도 고성군청이 매입하여 초가지붕을 올리고 있다. 마른 담쟁이 넝쿨을 덕지덕지 두른 돌담을 따라가자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서 작은 몸을 옹그린 채 그을린 냄비를 닦아내고 있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이곳 산골마을로 시집와 7남매를 낳았다는 한경자 할머니(87). 전쟁 중 치안대에서 일했던 남편이 반동분자로 몰리면서 3년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금은 둘째 아들이 데려다준 강아지 한 마리와 옥신각신(?) 하면서 살고 계신다.

3년 전부터 왕곡마을에서도 민속체험행사가 열리고 있다. 작년엔 할머니 집에서도 두부 만들기 체험을 했단다. 하지만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이후 호젓하게 살아온 터라,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벅적거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왕곡마을의 집들은 부엌과 외양간이 붙어있는 'ㄱ자형' 북방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왕곡마을의 집들은 부엌과 외양간이 붙어있는 'ㄱ자형' 북방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마루에 구들에 사람이 버글버글 했어. 빌려달라고 하도 사정을 해서 집을 내주긴 했지만 사람한테 물렸어. 다시는 안 해. 금덩거리를 갖다 줘도 싫어.”

혈압 때문에 가끔씩 보건소에 들르는 것 말고는 바깥출입도 안한다는 할머니로서는 며칠동안 뒷골이 당길 만도 했겠다 싶다. 마을 측에선 수익사업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향수에 혹은 경험 삼아 하는 이벤트라지만 정작 홀로 사는 시골 노인들에게는 그마저도 번잡스러운 일인가 보다.

세제가 다 떨어져 샴푸로 냄비를 닦고 있는 한경자 할머니.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세제가 다 떨어져 샴푸로 냄비를 닦고 있는 한경자 할머니.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한참 담소를 나누는데 돌연 할머니가 세제가 아닌 샴푸로 냄비를 닦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아해 왜 샴푸로 냄비를 닦느냐고 물었다. “다 떨어졌어. 자식들 올 때 사오라 해야지.”

왕곡마을에는 그 흔한 구멍가게도 하나 없다. 그래서 비누 한 장 사려 해도 읍내까지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한다니 그야말로 ‘깡촌’이 따로 없다. 한낮에는 봄기운이 완연해도 어스름이 내려오자 제법 날이 차다.

마을 안에 민박시설이 없다는 것을 알고 온 터라 인근 해수욕장 주변에서 하루 묵을 요량이었지만 이런 오래된 마을에서의 하룻밤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길에서 만난 동네 아줌마를 붙잡고 하루 묵을 만한 집이 없겠냐고 물었다.

간판도 없는 집을 아름아름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민박을 치는 김씨 아줌마.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간판도 없는 집을 아름아름 찾아오는 여행객들에게 민박을 치는 김씨 아줌마.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뜻밖에도 선뜻 “나 자는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자도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한다. 아줌마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자 이불을 깔아놓은 아랫목을 내주신다. 그러고는 연고도 없이 불쑥 찾아든 객이 배고프겠다며 저녁 찬을 준비하러 나가신다.

방안에 앉아 혼자 있기 머쓱해 아줌마를 따라 나갔다. 아궁이에다 마른 솔잎에 불을 지피시더니 가까이 와 불을 쪼이라며 자리를 내주신다.

어린 시절 방학이면 외가에 놀러가곤 했다. 아침저녁으로 소여물 쑤던 커다란 가마솥 앞에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는 아궁이 안의 사위어 가는 불씨 속에서 밤이며 고구마를 꺼내 주시곤 했다.

손바닥을 이리저리 옮겨 가며 호호 불어 먹던 그 뜨겁고 달콤한 맛이 떠올라 속도 없이 “고구마를 구워먹으면 맛나겠다!” 했더니 “에구구…. 어쩌나 얼어 썩은 감자 몇 알 뿐인데” 하며 미안해 하셨다.

굴뚝에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특별한 이유는 없단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굴뚝에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특별한 이유는 없단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아들 삼형제만 두었다는 김애자(66)씨 집에는 아름아름 찾아오는 여행객이 종종 있다고. 가끔씩 찾아와 며칠씩 묵고 가던 삼형제의 대학시절 친구들이 ‘어머니가 해준 밥이 먹고 싶어 왔다’ 면서 이젠 어린 자식들의 손을 이끌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땐 몰랐는데 데모하고 잡힐까봐 우리집에 숨어있던 거였데. 여기가 산골오지잖아.” 다음날. 대문이 따로 없어 마당인지 길인지 분명치 않은 어느 초가집 앞에선 널어놓은 늙은 호박이 아침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양지바른 마당 한구석에서는 오리와 거위가 나란히 앉아 졸고 있었다. 그 광경이 하도 재밌어 가까이 다가서자 낯선 이의 기척을 제일 먼저 알아챈 거위가 꽥꽥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하도 커 옆에서 졸던 오리들이 다 깨어 일어나고, 안방 문이 열리면서 할아버지 한 분이 밖을 내다보신다.

홀로 사는 함성균 할아버지. 아무렇게나 찾아온 무례(?)한 방문객에게 줄 게 없다면서 미안해했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홀로 사는 함성균 할아버지. 아무렇게나 찾아온 무례(?)한 방문객에게 줄 게 없다면서 미안해했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함성균 할아버지의 새로운 가족. 최근에 암캐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함성균 할아버지의 새로운 가족. 최근에 암캐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2006년 4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자신보다 더 나이든 초가집에서 홀로 지내시는 함성균 할아버지(76)의 동무는 마당을 분주히 오가는 가축들이다. 오리, 거위뿐 아니라 칠면조, 닭 그리고 개까지. 얼마 전 암캐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으면서 식구가 더 늘었단다.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가을에 오면 먹을 게 많은데 지금은 줄 게 없다며 매운 담배만 뻐끔거리신다.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 씀씀이가 부담스러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개집 옆에 빈 술병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장성한 자식들을 모두 대처로 보내고 가축들과 동무하며 외롭게 노년을 보내시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워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전통마을보존회 회장인 함익영(67)씨는 도시로 나간 가족들이 한 번씩 찾아와도 좁고 불편한 전통가옥이 싫다면서 근처 해수욕장 주변의 콘도에서 자고 가는 것이 현실이라며, 노인들만이 지키고 있는 이 마을에 20년 후엔 누가 살고 있겠냐며 씁쓸해 했다.

Info 가는 길
자가운전 _ 속초 → 간성읍 방면 약 20분 운행 후 좌측 ‘왕곡전통마을’ 표시판에서 좌회전. 마을 입구까지 진입 가능.
대중교통(시내버스) _ 속초터미널에서 10분 간격으로 1번 버스가 있다. 오봉리 버스정류장 하차. 마을입구까지 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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