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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독일의 숨은 명소, 뮌헨에서 만난 한국인의 묘
독일의 숨은 명소, 뮌헨에서 만난 한국인의 묘
  • 이분란 객원기자
  • 승인 2006.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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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이미륵 박사의 묘는 오른쪽 큰나무 방향이다. 2006년 4월. 이분란 객원기자
이미륵 박사의 묘는 오른쪽 큰나무 방향이다. 2006년 4월. 이분란 객원기자

[여행스케치=독일] 뮌헨 중앙역 플랫폼에 내리자마자 여기저기 널브러진 맥주병이 뮌헨의 일상을 말해 준다. 밤새 달려온 여정에 몸은 피곤해도 맥주의 본고장 뮌헨에 도착한 기분은 한없이 상쾌하다.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여며야할 만큼 체감온도는 쌀쌀하다. 어수선한 뮌헨역을 나서면서도 왠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은 이곳이 다름 아닌 뮌헨이기 때문이다.

“뮌헨에는 며칠이나 머무르세요?” 뮌헨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어느 남학생이 얼떨결에 부탁한 봉투 하나를 주인한테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다. 부탁받은 봉투를 두고 나가려는 순간 아저씨가 한마디 던진다.

피곤한 몸뚱이를 세워놓고 오래 얘기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간만에 듣는 한국말에 반가움이 앞선다. “여행하면서 한국 생각 안 나세요? 여기 한국 커피나 한잔하고 가세요.”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한국의 아름다운 ‘정’ 이나 인심을 잃게 마련인데 주인 아저씨는 먼저 말을 건네며 객에게 친절을 베푼다.

묘지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 깨끗하게 단장된 묘지는 찾는 이들을 더 경건하게 만든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묘지로 들어가는 작은 다리. 깨끗하게 단장된 묘지는 찾는 이들을 더 경건하게 만든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커피를 즐기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건너온 인스턴트 커피를 무시할 만큼 커피를 싫어하지도 않는다. “혹시 뮌헨에 한국인 묘가 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으세요?”, “아뇨. 누구 묜데요?”, “이미륵 박사라고 아시는지?”

그래도 여행 좀 다닌 사람 축에 속하는데 적어도 유럽은 매년 두세 번씩 오는 곳인데, 이럴 수가! 피곤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호기심이 머리에서부터 삐쳐 올라온다. 지하 주차장으로 잠깐 들어간 아저씨는 창고를 뒤적이는가 싶더니. 이내 먼지 묻은 자료 한 묶음을 내 놓는다.

‘<압록강은 흐른다 (외)> - 이 미륵 -’ 제법 두께가 되는 책은 비록 낯선 제목이지만 독일에서 만난 한국어 책이라는 사실에 놀랍기만 하다. 아저씨는 무슨 연유로 이런 자료들을 고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일까?

묘지로 들어가는 입구. 묘지와 도로가 바로 연결되어 있다. 그만큼 생활과 가깝다는 뜻이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묘지로 들어가는 입구. 묘지와 도로가 바로 연결되어 있다. 그만큼 생활과 가깝다는 뜻이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1899년 황해도 해주 출생. 본명 이 의경. 아명 미륵. 별명은 정쇠이다. 잘 생긴 대한민국 남자의 흑백 사진 한 장과 함께 짧은 이력이 첫 페이지에 적혀 있다. 뮌헨에서의 일정이 갑작스럽게 공동묘지로 향하게 됐다.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손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아저씨 또한 보통 정성이 아니다.

1920년에 독일에 와서 뷔르츠부르크 및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1928년 뮌헨 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미륵 박사. 1946년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독일어로 발표해 전후 독일 문단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미륵 박사 묘의 비석. 앞면은 독일어, 뒷면은 한글로 적혀 있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이미륵 박사 묘의 비석. 앞면은 독일어, 뒷면은 한글로 적혀 있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한때는 독일의 최우수 독문 소설로 선정되어 인기를 독점할 정도로 왕성한 작가 생활을 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50년 뮌헨 교외 그래펠핑에서 타계했다. 독일 작품을 통해 한국 및 동양 사상 그리고 우리의 정신 문화를 서구의 기계주의 문명에 투입시켜 온 그에 대한 방송가의 취재가 한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따가운 햇살에 눈이 부시어도 묘지로 달려가는 긴장된 마음에 잠시의 피곤을 잊고 드라이브에 취해 있었다. 뮌헨을 완전히 빠져나와 시골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작은 마을이다. 노오란 해바라기가 함빡 웃음을 띤 꽃다발로 큼직하게 골랐다. 노란색이 주는 미학에 정신을 잃고 코에 향기를 묻히며 꽃가게를 나선다.

마을에 유일하게 한 집 있는 꽃가게.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마을에 유일하게 한 집 있는 꽃가게.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관리 받지도 관리 받을 수도 없었던 한국인 무덤은 남의 묘 옆에 끼어 잡초 넝쿨 아래 오랜 세월 숨어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한국인 문화대사 이미륵 박사에 대한 독일 교민의 노력으로 1995년에서야 비로소 현재의 자리로 이장이 마무리 되었단다.

눈에 익은 화강암 비석만 봐도 주인의 국적을 알겠다. 또렷하게 한국어까지 적혀 있으니 누가 봐도 대한의 무덤이다. 지붕을 올린 비석을 중심으로 주변은 꽤 정리가 잘 되어 있다. 그동안 다녀간 높으신 분들이 심어놓은 크고 작은 기념수로 묘지는 더욱 예쁘게 단장되어 있다.

잘생긴 박사의 미소 띤 얼굴을 보니 당시 독일 유학 시절 얼마나 많은 여인들의 인기를 받았을까 짐작해 본다. 비록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 묻히고 말았지만 그를 존경하는 많은 독일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단다.

이 박사 옆에 묻어 달라고 한 여인의 묘 너머로 이미륵 박사의 묘가 있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이 박사 옆에 묻어 달라고 한 여인의 묘 너머로 이미륵 박사의 묘가 있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내 죽으면 꼭 닥터 리 옆에 묻어다오.’ 박사 무덤 오른쪽 뒤편에는 어느 여인의 무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자리를 잡고 있다. 죽어서라도 박사와 함께 하겠다는 그녀의 유언대로 비록 나란히는 아니지만 박사 무덤 가까이 묻어주었단다.

살아생전 박사에 대한 덕망과 존경을 죽어서도 함께 하겠다는 그녀의 유언 앞에 가족들도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시골 공동묘지라지만 이곳은 독일 사람이라도 쉽게 묻힐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데…. 그런 곳에 묻힌 이미륵 박사의 생애가 독일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주었는지 객도 상상만 할 뿐이다.

그동안 다녀간 많은 이들이 남긴 방명록에 기자도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해 본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그동안 다녀간 많은 이들이 남긴 방명록에 기자도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해 본다. 2006년 4월. 사진 / 이분란 객원기자

한적한 시골 그래펠핑 묘지는 한 남자의 고독한 유학 생활과 아름다운 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묻고 있지만 햇살 눈부신 오후에 묘지로 향한 발걸음은 행복하기만 하다. 솔솔한 바람에 이마에 송근 땀방울을 식히며 차디찬 비석을 만져본다. 아마도 이 특별한 촉감은 오래도록 객의 마음에 촉촉이 스며들 것 같다. 앞으로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에 들러 가기를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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