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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한국의 정원] 광한루원의 숨겨진 역사, 광한루는 한때 기상천외한 감옥이었다
[한국의 정원] 광한루원의 숨겨진 역사, 광한루는 한때 기상천외한 감옥이었다
  • 김진용 기자
  • 승인 2006.05.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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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남원 광한루 풍경. 2006년 5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남원 광한루 풍경. 2006년 5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여행스케치=남원] 광한루에 봄이 왔다. 그 역사와 아름다움이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한국의 4대 누각’이라고 불릴 정도다. 서려 있는 뒷이야기도 그만큼 많다.

한줄기 은하수가 난간 밖으로 스쳐가니
맑은 물빛과 하늘 그림자 허공을 뚫고 가네
깊은 밤에 들려오는 방망이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고
이것은 아마도 월중(月中)에서 약을 찧는 소리인가

조선 성리학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광한루원 예찬시이다. 광한루원의 누각 광한루에는 이 외에도 송강 정철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의 시문 편액이 무려 200여수나 걸려 있었다. ‘누구누구 왔다간다’ 는 식의 낙서 글귀부터, 광한루의 풍류와 역사의 시름까지. 당시 광활한 남원 평지에 녹음이 우거졌고 남원을 가르는 요천이 훤히 바라다 보였다니, 그럴 법도 하다.

이 누각을 일본인들이 감옥으로 사용했다. 1910년부터 무려 18년 동안 조선인을 억누르던 재판소와 감옥으로 사용한 것이다. 참 용하다. 이런 누각을 두고 어떻게 재판소와 감옥 견적을 냈을까. 알고 보니 누각 마루는 재판소로, 마루 아래는 감옥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단 누각 규모가 크니 마루에서 재판을 벌였고, 마루가 높은 데다 그 아래는 기둥으로 칸까지 지워져 있으니 철창만 붙이면 여러 칸의 감방으로 딱이었단다. 누각 아래를 감옥으로 사용한 인류사가 또 있나 찾아볼 일이다.

둘레의 사각형 기둥은 땅을, 안쪽의 둥근 기둥은 하늘을 상징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 세계관을 담았음이 분명한 곳, 그곳에 못질 자국이 선명하다. 이 기상천외한 양식을 동원하면서까지 왜 하필 남원 광한루였을까?

우선 민족문화를 짓밟으려는 일제의 시도였을 것이다. 광한루는 600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중수되고 복원되며 ‘한국 4대 누각’ 가운데 하나라는 아름다움과 애환을 지켜온 곳이니 말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남원의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한루원 내에서 제기차기, 투호, 널뛰기, 그네타기 같은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따. 2006년 5월. 사진 / 김진용 기자
광한루원 내에서 제기차기, 투호, 널뛰기, 그네타기 같은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따. 2006년 5월. 사진 / 김진용 기자

남원은 섬진강 상류인 요천을 중심으로 비옥한 들판이 백리에 걸쳐 펼쳐져 산물이 풍부하고 인물이 많았던 곳이다. 수상교통이 발달해 일제 강점기까지 소금배와 고깃배가 올라올 정도로 호남에서 가장 풍요로운 고을 가운데 하나였다.

남원이 동편제의 고향으로 수많은 명창을 배출하고, <흥부전>과 <변강쇠 타령>, <만복사저포기>, 그리고 최명희 선생의 <혼볼>의 고향으로 자리매김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얻지 못해 패한 일본으로서는 호남의 입구이자 호남 문화의 상징인 남원에 재판소와 감옥을 짓고 싶지 않았을까.

200여 수가 붙었다는 광한루의 시문 편액은 재판소가 옮겨간 뒤에 보니 83수만 남았다고 한다. 글씨 액자까지 뜯어간 게다. 광한루에 내걸린 그 시문이 제대로 전했다면 600년 세월 동안 변해간 한 곳의 경치를 읊은 재미있는 문학시집이 되지 않았을까.

광한루원의 자취를 더듬다 보면 동학농민운동과도 만난다. 동학군 접주 김개남 장군을 비롯한 농민들의 못다 이룬 꿈이 자라난 곳이기도 하다. 김개남이 호남좌도 동학군을 거느리고 남원을 거점으로 군비를 키울 당시, 지휘소인 대도소 역할을 한 곳이 광한루원 주변이다.

1894년 광한루를 떠난 김개남의 주력 부대는 전주를 거쳐 북진하다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오르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싸움과도 마주친다.

임진왜란 패전 뒤 호남 진출을 노리며 몰려온 왜적 5만6,800여 명에 맞서 조선 병사와 주민, 그리고 명나라 구원병 5천여 명이 남원성을 지키고자 결전을 벌였다. 결국 남원성은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초토화됐고, 잿더미로 변한 광한루가 당시 전투의 처절함을 대변했다.

전통 혼례 복장을 대여해 사진을 찍으려는 여행객도 자주 눈에 띈다. 2006년 5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전통 혼례 복장을 대여해 사진을 찍으려는 여행객도 자주 눈에 띈다. 2006년 5월. 사진 / 김진용 기자

“어, 그년 요망한 년이로고. 너 같은 창기배(기녀)에게 수절이 무엇이며, 정절이 무엇이냐?” 변학도 호통에, “사또님 대부인 수절이나 소녀 춘향 수절이나 수절은 일반인데, 수절에도 상하 있소?” 춘향이 받아친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봉건사회의 신분제약에 대한 근본 문제제기로 승화시킨 고전 <춘향전>의 무대로 광한루원이 선택됐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광한루원 오작교에는 지금도 산수유와 백일홍 구경에 나선 연인들의 속삭임과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600여년 동안 호남 선비들과 민초들의 휴식처였고, 지금도 청춘남녀 만남의 장소와 남원 문화의 상징으로 남은 광한루에 지금 봄이 왔다.

Tip. <광한루원>(廣寒樓苑)
광한루원의 주요 건물은 물론 광한루(보물 제281호)이다.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 태종에게 미움을 산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내려와 지은 누각 광통루가 시초이다. 1444년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달나라에 있다는 광한청허부(전설 속의 月宮)가 이곳이 아니더냐”고 한 데서 광한루 명칭이 나왔다.

1582년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개축하면서 오작교를 축조했고, 송강 정철이 호수를 조성하고, 신선세계를 상징하는 영주, 봉래, 방장의 삼신산을 지어 전통 정원의 모습을 갖췄다. 정유재란 때 불탔다가 30년도 안 돼 남원부사 신감에 의해 복구되었다.

이후 최근까지 수많은 관리와 지역 유지의 보살핌이 있었다. 광한루라는 이름에서 천상의 월궁을 지상에 구현하려는 뜻을 엿볼 수 있다. 연못가의 자라 조각과, 토끼를 등에 업은 자라 장식 조각은 용궁세계를 향한 염원이다. 삼신산을 비롯한 여러 상징물은 신선세계를 구현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오작교가 놓인 연못은 견우직녀 전설 속의 은하수를 뜻하기도 한다.  

Info 주변정보
● 광한루원 주변 식사 _ <청학동> 호남 지역에선 누구나 상다리 부러지는 한정식을 꿈꾼다. 광한루원 후문에 고급 한정식집이 모여 있다. 광한루원 옆으로 지리산 미꾸라지 추어탕 거리가 있는데, 40년간 추어탕 한 가지만을 끓여온 <새집>이 있다.

가벼운 식사로는 광한루원 대주차장에 <춘향골 찐빵>이 있다. 

● 숙박 _ 요천이라는 하천을 건너면 춘향테마파크 주변에 <한국콘도> 같은 콘도와 모텔이 모여있다. <쌍둥이 파크>는 주말에 한 가족이 묵을 수 있는 괜찮은 큰 방이 3만원 정도다. 창으로 요천의 푸른 물빛이 환희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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