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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해돋이 여행②] 향적봉 운해 일출
[해돋이 여행②] 향적봉 운해 일출
  • 전설 기자
  • 승인 2014.12.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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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꼭대기서 천지개벽의 장관을 담다
사진 / 향적봉, 장하숙
사진 / 향적봉, 장하숙

[여행스케치=서울] “비나이다. 비나이다. 덕유산 신령님께 비나이다. 모쪼록 두터운 안개 헤치고 솟아나는 붉은 해 한줌만 보여주시옵소서. 어마어마한 일출 사진 한 장 남겨 가면 더 바랄 나위 없고요.” 설천봉으로 가는 곤돌라에 오르기 전, 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막걸리 한 사발 엎질러 고수레도 잘 하였다. 그 정성 갸륵해서라도 햇님이 ‘째앵 쨍’ 말간 얼굴 보여줄 것 같았다.

 “오늘의 날씨는 흐림입니다. 현재 충청 이남 지방 곳곳에 비가 내리고 있고, 특히 전남에는 시간당 20mm 안팎의 강한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비의 양은 남부로 내려갈수록 많겠습니다.” 화사한 미소로 비보를 전하는 기상 캐스터가 야속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이런 낭패가. 경부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마자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전북 무주에 가까워질수록 굵어지고 있다. 상고대가 피기를 고대하며 출장을 미룬 것이 화근이었다.

 눈꽃 피자마자 겨울비가 내릴 줄이야. 덕유산 무주리조트에서 해발 1522m 설천봉까지 단번에 올라가는 관광곤돌라가 있으니 빗속에 산 탈 걱정은 없지마는, 날씨가 이래서야 아침 해맞이를 할 수나 있을지. 짐꾼으로 부리기 위해 온갖 사탕발림으로 꾀어낸 10년 지기는 벌써부터 내가 속았구나, 하는 얼굴을 한다. 따가운 눈총 피해 수첩만 만지작만지작. 2015년 신년특집, 해맞이 여행, 곤돌라 타고 가뿐하게 오르는 덕유산, 향적봉 운해 일출. 휘갈겨 쓴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다 수첩을 덮는다. 에라 모르겠다. 오는 비 그치게 할 재주는 없으니 모든 것은 하늘에 뜻에 맡기는 수밖에. 진인사하면 대천명하리니.

순백의 안개 정원을 거닐다
덕유산 신령님께 막걸리 한 사발을 올리고 곤돌라탑승장으로 향한다. 날씨가 궂어 운행을 안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설천봉으로 이어진 하늘길은 무사하단다. 순번을 기다렸다가 아담하고 동글동글한 곤돌라에 폴짝 올라탄다. 편안히 앉아 해발 1522m의 설천봉으로 향하는 동안, 창문에 허옇게 낀 서릿발을 닦는다. 창문 밖 고도가 생각보다 낮다. 비행기처럼 높이 떠가는 것인 줄 알았더니, 숲 바로 위를 스치듯 느리게 움직인다. 창문 아래 코를 대고 바라보고 있자면 나무 꼭대기를 사뿐사뿐 밟아 정상에 오르는 기분. 10여분 정도 운무 낀 산자락을 날았을까. 곤돌라가 점점 고도를 높이더니 순식간에 설천봉에 다다른다.

관광곤돌라의 종점 설천봉에서 0.6km의 잘 닦인 등산로를 따라가면 덕유산 최고봉 항적봉에 도착한다. 소요시간은 30분 정도. 
사진 / 향적봉, 장하숙
땅 밑 곤돌라승강장까지 내려온 짙은 안개. 덕유산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켰다. 사진 / 향적봉, 장하숙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가는 0.6km 등산로는 본래 눈꽃터널로 유명한 구간이다. 겨울이 되면 눈이 오지 않아도 사스래나무, 시닥나무, 신갈나무, 고로쇠나무의 무수한 잔가지에 빈 곳 없을 만큼 촘촘하게 눈꽃이 피는데 이 무수한 눈꽃이 눈부신 순백의 정원을 이룬다고.

향적봉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새하얗게 만개한 눈꽃과 운해에 뒤덮여 더욱 아득한 능선의 어울림이 조화롭다. 사진 / 향적봉, 장하숙

“겨울이면 차가운 북서풍이 서편에서 불어 와 덕유산 주능선에 걸친 구름을 나무에 응결시켜 서리를 만들지요. 그것이 상고대라고 하는 나무서리꽃입니다. 눈이 오지 않아도 온 산을 하얗게 만드는 신비한 현상이 운해와 하늘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만드는 겁니다.”

수년간 향적봉의 겨울 풍경을 촬영해온 장하숙 씨-활동명도 ‘향적봉’-의 설명이다. 기대했던 눈꽃은 빗물이 헹궈간 뒤지만, 빗속에 오르는 등산로 역시 다른 의미의 순백이다. 뿌연 안개가 발밑까지 가라앉아 사방이 다 허옇다. 손을 휘저으면 손바닥에 흰 보푸라기가 잔뜩 잡힐 것만큼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같은 풍경 속에 등산로 양 옆에 선 나무의 윤각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신기한 것은 이토록 보이는 것이 없는데도 자꾸 걸음을 멈추고 희뿌연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는 것. 정상에 서면 좀 다르겠지, 뭔가 더 보이겠지. 막연한 기대는 향적봉에 도착함과 동시에 고이 접는다. 맑은 날에는 중봉 능선까지 조망된다는 덕유산 최고봉도 우천시에는 ‘휴업’이다. 다만 안개 너머 장대한 중봉 능선이 아삼아삼 겹쳐 거대한 묵화 한 폭을 펼쳐 놓는다. 

“이 빗속을 걸어 왔어요? 옷이 다 젖었네. 1층이 제일 따뜻하니까 몸 좀 녹여요. 이불 가져다줄게요. 오늘은 두 분 밖에 없으니 잠자리는 편할 대로 고르시면 돼요. 취사실은 바로 옆이고 화장실은 뒤쪽에 있어요. 소등 시간이 9시 반이니까 그 전에 잘 준비 하셔야 해요.”

산길을 오른지 30분 만에 비에 젖은 생쥐꼴로 향적봉대피소에 도착한다. 젖은 옷부터 갈아입고 준비해간 주전부리꺼리로 간단히 허기를 달랜다. 컵라면 국물까지 곁들여가며 속을 뜨끈하게 데우고 잠자리로 돌아와 보송보송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몸이 녹는 사이 창문 넘어 흰 안개에 검은 밤이 스며든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대피소 벽면에 투숙객의 정숙을 바라는 당부글을 되뇌면서도 좀처럼 수다를 멈출 수 없는 산중 밤. 나직한 목소리로 한참을 소곤거리다 내일은 부디 말간 해를 볼 수 있길 기도하며 까무룩 잠이 든다.
 

새 해야 해야 어서 나오너라

겨울이 100일이라면 그중 30일만 볼 수 있다는 향적봉 일출. "해야, 해야, 반갑다!" 사진 / 향적봉, 장하숙
설천봉의 상제루싐터 바로 아래에는 식사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설천봉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사진 / 향적봉, 장하숙

그칠 기미 보이지 않던 가랑비가 자정이 되자마자 뚝 그쳤다. 비록 지난밤 내내 눈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버렸다는, 말도 안 되는 악몽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쳤지만 창문 밖으로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큰 위안을 얻는다. 드디어 새벽 6시. 동트기까지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칼바람에 쓸려가지 않으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하고 대피소를 나선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일까. 문을 열자마자 어제보다 한층 더 짙어진 안개가 사방에서 덮쳐온다. 세 걸음 만 떨어져도 앞 서 걷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 가까이 있는 나무의 음영정도는 구분되던 전날에 비해 훨씬 지독한 안개다. 거기에 어둠과 칼바람까지 더해져 눈앞에 있는 향적봉에 오르는 것도 쉽지가 않다. 더듬어 넘어 온 길을 다시 더듬어 겨우 겨우 정상에 선다. 아침 해는 중봉 능선 방향에서 뜬다는데 앞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어영부영 하는 사이 차츰 사위가 밝는다. 일출시간이 머지않았다.

“향적봉 일출을 담기 위해 일기예보도 챙겨 보고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해서 간다고 해도, 산 전체가 구름에 덮여 해를 볼 수 없는 날도 있습니다. 무주리조트 홈페이지에서 실시간으로 향적봉 날씨 상황을 중계하는 웹캠을 확인해보세요. 무엇보다 한 달에 스무다섯날을 산에서 지내는 향적봉 대피소의 박봉진 대장님께 조언을 구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장 씨의 말처럼 향적봉의 운해 일출은 무작정 산에 오른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덕유산 신령님이 해맞이를 허락하는 날은 겨울을 100일이라고 계산할 때 단 30일 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올라도 허탕 치는 날이 허다하지만, 고생 끝에 마주한 덕유산의 일출은 말 그대로 천지개벽, 그 자체다. 어둠과 운해에 묶여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처럼 보이던 하늘과 땅 사이에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빛이 들기 시작한다. 가장 높은 산마루가 붉게 물들면 곧이어 작은 빛줄기가 마치 달리기 경주를 하듯 주변의 산등성이에 내리쬔다. 산천이 그을음처럼 묻어 있던 간밤의 어둠을 털어내고 제 색을 찾아 가는 광경은 흑과 백 밖에 없는 수묵화에 수채화 물감을 여러 번 덧입히는 것과 같다. 그렇게 먼 곳에서 시작된 세상이 어느덧 머리맡의 어둠을 거두어간다. 말갛게 씻은 얼굴로 새 해가 밝는다.

info 향적봉대피소
주소 전북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덕유산무주리조트 관광곤돌라
요금 어른 1만3000원, 어린이 9000원
 

TIP 백련사~무주구천동 33경 트래킹
관광곤돌라를 타고 향적봉에 올랐다면 내려오는 길에는 덕유산 중심부에 자리 잡은 백련사까지 눈꽃 트래킹을 즐겨보자. 백련사에서 향적봉까지는 약 2.5km정도로 초반의 경사구간을 제외하면 느긋하게 눈꽃감상을 할 수 있는 평지 코스다. 아이젠 필수. 백련사에서 구천동탐방지원센터까지 역시 5.5km 평지로 가는 길 내내 ‘무주구천동 33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 밖의 산(山)에서 맞는 해맞이 명소

1 태백 태백산 천제단

태백 태백단 천체단 사진 / 향적봉, 장하숙

태고 때부터 제사를 지내던 ‘민족의 영산에서 새해를 맞이해볼까. 태백산은 삼척시 소망의 탑에 이어 강원도 동해권에서 두 번째로 빨리 해가 뜨는 해맞이 명소다. 태백산도립공원 유일사, 백단사, 당골광장 등산로 매표소에서 최소 4시 전 등산을 시작하면 해가 뜨기 전후로 첩첩산중에 운해가 피어오르는 장관과 산맥 위로 떠오르는 신비로운 일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맞이를 위한 산행으로는 등산로가 비교적 넓은 유일사 코스를 추천한다.
주소     강원도 태백시 혈동 260-17    (유일사 매표소)

2 광주 무등산 서석대

광주 무등산 서석대 사진 / 향적봉, 장하숙

광주 무등산의 해맞이 명소로 유명한 서석대 일대는 기온이 아주 낮은 새벽이면 수증기가 주상절리대에 얼어붙어 나뭇가지와 주상절리의 상고대가 함께 목격된다. 일출사진과 독특한 눈꽃사진을 함께 남길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원효사에서 서석대까지 이어지는 ‘무등산 옛길 2구간’을 따라가면 약 2시간 30분 산행을 거쳐 오를 수 있으며 가는 길 동안은 무등산 사계 중 으뜸으로 치는 설경을 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주소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209(원효사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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