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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김준의 섬 여행51] 인천시 옹진군 대청도
[김준의 섬 여행51] 인천시 옹진군 대청도
  • 김준
  • 승인 2014.1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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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김준

[여행스케치=옹진] 대청도의 겨울은 서풍받이로 온다. 벼랑에 걸린 보랏빛 해국이 시들고 윤슬이 별처럼 반짝일 때 서풍과 함께 온다. 깊은 바다의 홍어가 날개 짓하며 짝을 찾을 때 온다. 뱃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재촉하던 여행객도 늦가을의 정취에 취해 발걸음을 멈춘다. 전망 좋은 언덕에 올라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야단이다. 그런데 발아래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하는 진지가 아닌가. 알록달록 위장을 한 대포도 있다. 아, 저기 바다 건너가 해주 땅 장산곶이지.

세월이 빗은 걸작, 조각바위와 마당바위
광난두에서 출발해 군부대와 참호의 사이의 길을 걷다 이르는 곳이 서풍받이다. 바람막이도 없이 얼굴을 내밀고 수억 년의 세월을 견뎠다. 그곳에는 대륙에서 짠물을 머금고 온 북서풍이 만든 걸작이 있다. 조각바위다. 원나라 마지막 임금 순제가 유배와 사색을 한 곳이란다. 언덕의 높이가 100m에 달하며 햇볕에 반사되면 금빛으로 반짝인다.

서풍받이를 지나 농어 낚시가 잘 되는 마당바위에 이르면 소청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위틈에 산국이 탐스럽게 피었다. 바다 침대에 하늘 이불을 덮고 산국 베개를 베고 마당바위에 누웠다. 이런 곳을 천국이라 하는 모양이다. 파도 소리는 자장가다. 정신을 놓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가이드가 일러준 시간이 지났다. 다시 정자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도 반시간은 넘게 걸릴 터인데.

대청도에는 등산객이 많다. 이들은 선착장에서 삼각산 정상을 거쳐 광난두로 이어지는 2시간가량의 삼각산 등산과 광난두에서 서풍받이와 마당바위를 거쳐 기름항아리로 이어지는 1시간 반 정도의 트레킹을 선호한다. 아침 배를 타고 들어와 점심을 먹고 산행을 한 후 다음날 옥중동 모래사막, 농여해변과 모래울해변 등을 걸은 후 점심을 먹고 인천으로 떠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모래산이다. 별명이 '한국의 사하라 사막'이라고 한다. 파도가 가져오고 바람이 산으로 옮겨 놓았다. 자연이 아니고서는 흉내 낼 수도 없다. 옥죽동 주민은 물론이고 산 너머 선전포 주민들에게도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었지만, 대청도 최고의 명소가 되었다. 사진 / 김준

마누라 마음처럼 모래가 곱다
대청도의 제일경은 옥죽동 모래사막이다. ‘한국의 사하라’라 불릴 만큼 모래산이 웅장하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모래산은 갖가지 모양과 그림을 그려낸다. 모래가 고와 파도에 밀려 옥죽동 해안에 쌓이고, 다시 바람을 타고 산을 올라와 쌓이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주민에 따르면 이곳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들이 종종 모래산의 추억을 떠올리며 찾는다. 그들은 쌓이는 모래를 비로 쓸고, 돌아서면 다시 수북하게 쌓일 정도로 많았다고 기억한다.

가이드가 일러준 대로 양말까지 벗고 모래산을 오른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모래들. 부드럽고 고운 흙을 만지는 느낌이다. 얼마 전 중년 부부 몇 쌍이 모래산을 올랐는데, 한 사내가 모래가 마누라 마음처럼 곱다고 했다가 여행 내내 남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았다고 한다.

모래가 마을로 날라 오는 것을 막고자 해안과 모래산 사이에 띠를 두르듯 소나무를 심었다. 모래산의 면적이 줄어들자 전문가들은 소나무를 없애야 한다고 했다. 애물단지였던 모래산은 이제 대청도의 명소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할 바도 아닌데 원인을 제거하는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사막에도 식물이 산다. 뿌리를 깊이 내린 갯메꽃, 벼과의 사초가 그들이다. 그들의 강한 생명력을 보면 감동이 몰려온다. 내려와 양말을 신으려는데 놀랍게 모래가 하나도 묻지 않았다. 모래 입자가 무척 곱기 때문이다.

등산객은 선착상에서 올랐다가 서풍받이로 내려와 마당바위를 거쳐 다시 선착장으로 향한다. 사진 / 김준
소청도가 바다에 떠 있다. 산국이 손짓하지만 소청도는 끝내 외면한다. 사진 / 김준
서풍받이로 가는 길에서 바다와 바위가 서로 손을 잡고 있는 모습. 하늬바람을 일상으로 맞아야 하는지라 친구삼은 모양이다. 사진 / 김준

바다 빚은 해변들
모래사막에서 내려와 찾은 곳이 농여해변이다. 이곳부터 미아동해변까지 물이 빠지면 단단한 모래갯벌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이곳 외에 미아동해변, 지두리해변, 모래울해변 등 모래해변이 발달해 여름철 해수욕은 물론 봄과 가을에도 해변 트래킹을 위해 찾는 사람이 많다.

‘조금’이라 물이 많이 빠지지 않았지만 걷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이 많이 빠질 때는 700m의 폭으로 농여해변은 1.5km, 미아동해변은 2km가량 드러난다. 이를 주민들은 ‘풀턱’, ‘말레’라고 부른다. 운이 좋은 날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웅덩이인 ‘골새’에 갇힌 숭어 등을 잡을 수 있다. 해변의 중간쯤에 ‘고목나무바위’라 불리는 겹 주름이 세로로 난 기암괴석을 만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지층이 가로로 된 바위는 많지만 세로로 형성된 경우는 드물다.

해변은 신발을 신고 걸어도, 벗고 걸어도 좋다. 그런데 나오는 길이 철조망으로 둘러쳐 있다. 밤이 되면 바다는 철조망으로 문이 닫힌다. 어쩌면 모래는 시끄러운 인간을 만나는 것보다 갈매기나 갯메꽃과 이야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농여해변 너머 양지동으로 내려오는 고갯길에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다. 자생동백나무의 북방한계선이다. 볕이 잘 들어 겨울에도 따뜻한 곳이다. 동백나무만 아니라 처음으로 사람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대청도에서는 해변을 걸어야 한다. 물이 빠진 모래해변을 황해도 해주의 고향 소식을 가득안고 파도를 타고 내려와 자리한 곳이 미아동해변이고 농여해변이다. 사진 / 김준

홍어, 대청도에서도 잡힌다
저녁상에 올라온 음식이 홍어회와 홍어국이다. 찬바람이 불면 한두 번은 맛보는 귀한 음식이다. 내가 맛본 홍어는 흑산도산이다. 전북의 어청도나 인천의 대청도에서도 잡힌다고 들었지만 직접 확인하고 맛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옹진군의 홍어잡이는 백령도 두무진 서쪽 먼 바다에서 야간에 많이 이뤄졌다. 홍어가 많이 잡히면서 대청도와 소청도의 인구가 증가할 정도도 인근 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이 잡으면 영산포까지 팔러 다녔다. 하지만 1972년 어로저지선이 설정되면서 어업구역이 제한되었고 야간조업이 금지되면서 차츰 홍어잡이도 시들해졌다. 전국에 공식적인 홍어잡이배는 11척이다. 이 중 7척은 흑산도에 있다. 한 때 옥주동을 중심으로 선진포까지 80여 척에 달했던 대청도의 홍어배는 4척으로 줄었다. 대청도를 비롯해 서해5도에서 잡히는 홍어의 70-80%는 목포 상인에게 팔리고 있다. 대청도는 옥주포가 홍어를 잡는 마을이다.

모래울 솔숲에는 장군님도 계시고 그를 모시는 부하들도 있다. 과학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마을 축제는 미신이 되어 명맥이 위태롭다. 사진 / 김준
흑산도에서만 홍어가 잡히는 것이 아니다. 인천에서 잡히는 홍어가 더 많을 때도 있다. 홍어는 수치보다 망치가 더 맛있고, 값도 더 나간다. 사진 / 김준
해가 지면 또 해가 떠오를 것이다. 그 해는 어제 해와 다르다. 그렇게 새해를 맞는다. 새로은 꿈을 꾸며. 사진 / 김준
해가 저물면 해변은 철조망에 갇힌다. 아니 귀찮게 하던 인간들이 사라져 물새와 콩게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지 모른다. 사진 / 김준
홍어를 잡는 낚시다. 주낙이라 하며 특별히 걸낙이라고도 부른다. 미끼 없이 한 줄에 40여 개의 낚시를 매달아 홍어가 다니는 길목에 내려놓으면 홍어가 낚시에 걸린다. 사진 / 김준

사라지는 섬마을 전통축제
기독교가 강한 섬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일찍 당제나 풍어제가 사라졌다. 큰 나무, 바위, 신위 등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행위를 미신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사탄동, 고주동, 동내동 등은 마을에서는 소를 잡아 당제를 지낼 정도로 마을 의례가 성했던 곳이다. 마을만 아니라 개인별로도 배를 새로 만들면 고사를 지냈다. 사탄동에는 서낭당, 장군당, 부군당 등이 있어 3년에 한 번씩 무녀를 불러다가 소를 잡아 큰 굿을 했다. 마을에 좋지 않는 일이 생기면 만신을 불러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 마을은 지금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몇 집에서 장군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낭당은 삼각산 기슭에 있지만 장군당과 부군당은 모래울이 내려다 보이는 소나무 숲에 모셔져 있다.

문이 굳게 닫힌 장군당 안에는 유리창 너머로 장군영정, 도포, 갓, 한지가 횟대에 걸려 있다. 주민들은 장군당에 모셔진 신을 임경업 장군이라 믿고 있다. 조선시대 연평도의 안목어장에서 가시나무로 조기를 잡아 굶주린 군인들을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충민사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탄동. 마을이름이 비호감이지만 순우리말로 읽는다면 ‘모래울’이다. 느낌이 사뭇 다르다. 옥중동의 모래사막이 ‘된하늬’ 즉 북풍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면, 모래울은 서풍으로 만들어진 해변이다. 대청도는 바람이 만들고 시간에 쌓아 놓은 섬이다. 노을이 솔숲 사이로 긴 꼬리를 남기며 들어와 임장군의 영정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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