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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 따라 삼천리] 달구벌과 대구 사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전설 따라 삼천리] 달구벌과 대구 사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전설 기자
  • 승인 2014.12.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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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전설 기자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대구] 서울에서 KTK에 올라탄 지 2시간 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시계를 보니 동이 트려면 아직은 이른 새벽. 대구 한복판에 떨어졌지만 다시 8개 정거장이나 떨어진 대구역으로 향하는 까닭은, 이 땅의 옛 얼굴을 들여다보기에 그보다 좋은 들머리가 없기 때문이다. 발 빠른 KTX가 손님을 모조리 가로채면서 기차역으로서의 의미는 잃어버렸지만, 대구역은 그 자체로도 완벽한 원도심 여행지다.

역전 서쪽으로는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꽃시장이 서고, 역 앞에는 새벽에만 도깨비처럼 열린다는 일명 ‘번개시장’이 열린다. 그뿐이랴. 중앙로 큰길을 따라 난 진골목, 약전골목, 미싱골목, 헌책방골목…. 서울 도심에서는 이미 오래전 사라진 풍경이 대구역을 중심으로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옛 골목에 걸려 있다. 자 그럼 꽃구경이 좋을까, 장보기가 나을까. 망설이는 동안 볼거리 많아 바쁜 대구의 아침이 밝는다.

대구 종로2가 2층에서 진골목 안쪽1층으로 이사한 미도다방. 사진 / 전설 기자
호두, 잣, 대추를 듬뿍 넣은 쌍화차에 달걀노른자 띄워 호로록. 사진 / 전설 기자
다방의 오후 풍경. 최세웅, 한인구, 이기달 할아버지가 '꽃시절 나비'이야기에 한참이다. 사진 / 전설 기자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한약 달이는 냄새 진하게 감돌았다는 약전골목을 지나, 한때 50개가 넘는 자개공예사와 가구점이 있었다는 종로거리에 접어든다. 팔 것이 발품밖에 없어 기를 쓰고 걷는 동안, 걷는길은 어느새 동신선교사주택과 화교협회를 잇는 대구 근대골목투어 2코스와 맞물린다.

“여가 한 40년 전만해도 우로 알로 온통 가구점이었지예. 그때 혼수로 들인 우리집 자개농이 벌써 골동품이 돼 붓으니까요. 여 앞이 진골목인데요. 예전에는 골목이 질어가 진골목이라 켔는데 이젠 반도 안 남아가 질고 뭐고 할 것 없이 짧아예. 한 100m도 안될낀데요.”

김원영 씨의 조언을 곱씹으며 더 이상 질지 않은 골목을 거닌다. 천천히 걸어도 머잖아 그 끝이 보이는 몽땅한 길이는 아쉽지만, 진골목의 명물이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는다. “여 사진 찍으러 서울서 왔나? 참 좋은 다방이라꼬 소문나게 잘 찍어라.” 할아버지 두분의 분부 받잡아 1923년 문을 연 진골목의 응접실, 미도다방으로 들어선다. 한약의 쓴맛과 커피의 단맛이 한데 뭉친 공기가 훈훈하다.

푹신한 소파마다 색동방석이 깔려 있고 테이블에는 센베이과자와 식지 않은 약차며 커피가 놓여 있다. 색도 크기도 저마다 다른 잡동사니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해묵은 안방 느낌. 지난해 본래 있던 자리에서 스무걸음 정도 떨어진 골목 안쪽으로 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의 분위기가 깨지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였다. 옛 모습과 다른 점을 찾자면 더 넓고 환해졌다는 것과 다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어항을 왼쪽으로 옮겼다는 것 정도. 

“여가 내 국민핵교 동기들인데 얼굴 한번씩 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갈 데도 없고 갈라케도 다 돈이제. 인생에 낙이라고는 한달에 두어번 이렇게 만나서 차 한 잔 두고 앉아서 얘기하는 게 다인기라. 늙은이들 한티는 이 자리가 귀한기라꼬.” 자리를 잡고 찬찬히 둘러보니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미도다방의 안주인 정인숙 여사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앉은 사이에 핀 그 꽃, 참으로 곱다.

사진을 몇 장 찍어도 될까 허락을 구하니 최세웅 할아버지가 “사진 찍으믄 내년에 책에 나온다꼬? 내 그때까지 살아있긋나!” 버럭 하신다. 최 할아버지와 미도다방의 모든 단골손님이 그렇듯 살아생전 다방에서의 시간을 귀이 여겼던 전상열 시인은 타계 직전 한편의 시를 내놓았다. ‘종로2가 미도다방에 가면 /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앉아 /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 꽃시절 나비 이야기도 하고 / 장마철에 꺾인 상처 이야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이야기도 하고…’

사진 / 전설 기자
바싹 구운 도루묵에 '왕대포' 한 사발. 먹어본 사람만 아는 그 맛. 사진 / 전설 기자 
레코드사 세트장에서는 '지휘 게임'에 도전하거나 그때 그 시절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사진 / 전설 기자
향촌문화관 지하 1층에 이전한 대한민국 치초의 고전음악 감상실 '녹향'. 사진 / 전설 기자

대폿집 막걸리 한잔에다
계란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 한잔을 마시고 다방을 나설 적에, 정인숙 여사는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먼 길 조심히가요. 가다 추우면 다시 들어와요.” 한마디 인사말에 담긴 온기는 대구근대역사관, 경상감영공원을 거칠 때까지 식지 않는다. 대구 도심 속 숨은 달구벌 풍경 찾기에 재미를 붙일 때 즈음, 최근 개관한 대구의 새 명소 향촌문화관에 도착한다. 

“내가 42년생이그든. 한 열 몇 살 됐었나. 코 찔찔거리면서 방천시장에 신문이며 깡통 팔러 돌아다녔지. 그땐 그카안하면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어. 한 이때쯤이려나.” 염상희 할아버지가 향촌동의 흥망성쇠를 담은 연표에서 1960년대 언저리를 짚는다. 그리곤 그 시절의 빵집, 여관, 다방, 금은방, 양복점을 재현한 향촌동 거리를 말없이 바라본다. 청년의 눈에는 고전영화의 세트장처럼 보이는 이 거리가, 노신사에게는 엊그제 지나온 ‘유년의 뜰’이리라.

관람동선을 따라 1층을 훑어보고 2층으로 걸음을 옮기면 다방, 극장, 레코드사 세트장마다 살뜰하게 마련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화가 이중섭처럼 ‘은지화’도 그려보고 극장에서 영화 <태양의 거리>도 관람하다가 대폿집 안으로 들어선다. 따로국밥에 찌짐(부침개)까지 푸짐하게 차려놓은 술상에 주인이 없다. 모형 술잔으로 시늉을 내다보니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난다. 다행인 것은 혼자 취하기 좋은 대폿집이 지척이라는 것. 향촌문화관을 등지고 지하철 중앙로역, 반월당역을 지난다. 남문시장가는 길을 따라 대구 대폿집의 산역사라는 ‘도로메기집’을 찾아가는데 길끝에 ‘남산동 도루묵’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긴가민가해서 들여다보니 술상에 홀로 앉은 주객들이 놋사발을 들고 있다.

“혼자예요? 가끔 서울서 혼자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 편한 자리에 앉아요. 잔술이죠?”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대폿집을 이어받은 정희숙 씨가 커다란 놋사발에 불로막걸리를 가득 담아준다. 번철에 돼지기름을 발라 자글자글 익힌 새끼조기와 콩나물 무침도 안주로 내어주니 천 원짜리 술상이 참 푸지기도 하다. 오래 앉았다갈 심산으로 도루묵 한 접시를 주문하는데, 20년 단골 김우현 씨가 아는 체를 한다. “지금은 공짜 안주로 새끼 조구를 주는데 예전에는 도루묵을 줬거든. 그땐 고기가 쌌으니까. 처음에는 간판도 없이 그냥 간유리에 ‘도로메기집’이라고 쓴 게 다였어.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에서 술 마시는 사람은 죄다 이리로 모여들었다고.” 달지 않고 묵직한 불로막걸리 한 모금을 마시고 알이 꽉 찬 도루묵을 꼬리 째 맛소금에 찍어 덥석 깨문다. 짭짤하게 간이 밴 도루묵 알이 오독오독하다 못해 아드득아드득 씹힌다. 식감이 재미있다고 소감 좀 전하려는데 김 씨는 또 다른 술벗과 옛 도로메기집 이야기에 빠져 있다. 그날 대폿집에서는 따로 술상을 차린 중년의 손님들이 옛 이야기 안주삼아 막걸리 한말을 비웠다. 도루묵 알맛 보느라 정신 팔린 객을 따돌리고서 말이다.

사진 / 전설 기자
오래전 우리 곁을 떠난 '청년' 김광석, 그를 방천시장 엎 담벼락에서 다시 만나다. 사진 / 전설 기자

짙은 밤 노랫소리를 들어보렴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켜고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올라 대폿집을 나선다. 대구 향교 방면으로 나와서 내리 걸으면 봉산가구골목, 거기서 신천둔치 방향으로 1km를 더 걸으면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다. 오전 11시시부터 오후 8시까지 방천시장 옆 신천둔치 담벼락 350m 거리 곳곳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김광석의 노래를 틀어주는데 다행히 마감시간 십여분 남기고 입구에 도착한다. 땅거미진지 오래건만 길 위에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다. 두 손을 맞잡고 걷는 나어린 연인과 회식 중간에 들린 듯한 50대 넥타이부대 사이에 끼어 밤길을 걷는다.

1996년 1월의 어느 날 세상을 떠난 김광석. 머리맡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생전의 그를 만난 듯 생생하기도 하고,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듯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싸한 겨울바람 쐬며 걷는데도 울컥 울컥 취기가 오르는 것을 보니 술이 과했나 보다. 방천시장에 유명한 ‘방천찌짐집’에서 2차를 즐길까 하다가, 더 먹었다가는 몹쓸 주정이 도질 것 같아 돌아선다. 골목에서 멀어지는 동안 마지막 노랫소리 멀어진다.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info

미도다방
주소 대구시 중구 진골목길 16

향촌문화관
관람시간 09:00 ~ 18:00 
주소 대구시 중구 중앙대로 449 

남산동 도루묵(도로메기집)
주소 대구시 중구 중앙대로62길 31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주소 대구시 중구 달구벌대로450길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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