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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아름다운 어촌] 복사꽃 피는 영덕 강구항과 대게 맨살의 바다가 깨우는 포구의 새벽
[아름다운 어촌] 복사꽃 피는 영덕 강구항과 대게 맨살의 바다가 깨우는 포구의 새벽
  • 김상미 객원기자
  • 승인 2006.05.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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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강구항의 새벽 바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영덕] 집중력이 강한 강구항의 새벽바다를 보려고 해안선으로 접어들었을 때 지난밤 바다와 육지가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무의 바다에는 파도소리만 뛰어다닐 뿐 조용하고 깊은 세상이었다.

바닷가마을 해안선은 육지와 바다가 서로 마음을 주고받느라 드나듦이 심하다. 가끔 해안선에 서면 시간의 세계 속에서 내가 만들어 가야 할 삶이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빠져들게 된다. 완성도 높고 빛나는 인생이라는 작품을 탈고하기 위해서 때로는 빈 배가 되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느 곳으로든 데려다 주는 바람의 길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해안선을 즐겨 찾는 걸까. 내가 해안선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서해바다에는 낙조가 드리워질 때 누드모델처럼 옷을 벗는 갯벌이 있기 때문이고, 동해바다는 언제나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복사꽃, 오얏꽃은 말이 없어도 그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고 했던가. 꽃물을 담아가려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메고 줄지어 영덕 복사꽃 밭을 오르고 있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흙바람 속에서도 계절은 피어난다. 비소식이 있었지만 빨강 파랑 우산을 펼쳐든 것 같은 바닷가마을과 붉고 하얗게 꽃 물든 들판이 그리워 떠나야 될 것만 같았다. 간간이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지나갔다. 밤새도록 달려 새벽에 도착한 영덕 해상공원에는 바람이 잠들지 못하고 술렁거렸다. 새벽 바다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안도로로 나갔다. 우는 바람소리에 대답하는 파도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영덕 강구면 강구마을에서 축산마을을 잇는 918번 지방도로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이 도로는 마을 앞 자를 따서 ‘강축도로’ 라 부르기도 한다.

강축도로에서 연인을 위해 흘러간 팝송을 준비해 두는 것은 에티켓이다.

시종 푸르게 출렁이는 동해바다와 해안선의 아름다운 동행. 바다를 옆에 두고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서 달리는 길. 큰 파도가 삼켜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도 매력이다. 가끔 바다와 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속삭일 때 인간관계도 눈높이를 맞춰야 할 때가 있음을 깨달아 본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광고료도 없이 대게 홍보에 나선 영덕 대교.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흙모자를 눌러쓴 강구항의 아침은 사색에 잠겨있는 듯하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햇살을 등에 업고 먼 바다로 나간 배들이 돌아오는 항구를 떠올리며 강구항으로 흘러가 보았다. 오십천을 사이에 두고 온 들판이 분홍 물감과 하얀 물감을 뿌려놓은 듯하다.

강구대교에 올라앉은 대게가 눈을 부릅뜨고 강구항 쪽으로 안내를 한다. 말로만 듣던 대게마을에 들어서며 어떤 시인의 겨울의 단상을 떠올려 본다.

상한 발목에 고통이 비듬처럼 쌓인다 키토산으로 저무는 십이월 강구항을 까부수며 너를 불러 한잔하고 싶었다 대가지처럼 치렁한 열 개의 발가락 모조리 잘라 놓고 딱, 딱, 집집마다 망치 속에 떠오른 불빛 게장국에 코를 박으면 강구항에 눈이 설친다 게발을 때릴수록 밤은 깊고 막소금 같은 눈발이 포장마차의 국솥에서도 간을 친다.                    

- 송수권, ‘겨울 강구항’

강구항의 추억은 뭐니뭐니해도 대게다. 바로 내가 찾는 바다의 카프카다. 포구에 도착하자 대게 찜 솥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냄새에 시장기가 돈다. 이방인임을 금방 알아차린 게집 주인이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갈매기 몇 마리가 내 어깨를 스치더니 이내 하늘로 긴 포물선을 긋는다.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는 걸까. 어촌에는 맞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런 낭만이 있어서 깃들고 싶은 곳인지도 모른다.

“한잔하고 싶다” 는 시인의 말처럼 강구항에서는 삶의 긴장을 풀어놓아도 될 듯한 분위기다. 산자락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처마가 낮은 지붕들, 방파제가 파도를 타이른 탓인지 항구는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좌판 위에 올려놓은 대게를 팔기보다 내 안에 있는 상처를 먼저 사줄 것 같은 사람들. 겉으론 바닷바람처럼 억세게 사는 모습이지만 속은 대게의 속살처럼 부드럽다. 후딱, 빨리, 잽싸게 라는 도시 단어들에 치어 사랑할 시간이 너무 적은 탓인지 한마디 툭 던지는 간간한 말에도 내 마음속에 간이 배이는 것 같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포구를 지키는 사람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깊은 주름살 속에서는 숨겨둔 애잔한 삶이 묻어나는데 밝은 표정 속에서는 슬픔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불후의 명작을 남겨야 되는 사람처럼 사진을 찍어대는 내게 막소주와 도다리회를 권한다. 도다리, 가자미, 우럭회가 좋은곳이다.

항구 주변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개 영덕대게를 잡아 생계를 잇는다. 대게 중에서도 바다 밑바닥에 개흙이 없고 깨끗한 모래로만 이루어진 영덕 해안에서 잡힌 것이 타 지역산보다 맛이 좋다. 단맛과 쫄깃한 속살로 꽉 차 있어 아무리 까탈스런 입 속에서도 환영을 받는다. 암컷보다는 수컷이 크고 맛이 있다. 11월에서 다음해 5월까지 게 껍질이 가장 부드럽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살아 꿈틀대는 항구가 된다.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복사꽃 물드는 계절. 2006년 5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눈 내리는 겨울해변을 웅크리고 걷는 이방인 가슴을 펴게 하는 것은 강구항 게발 때리는 소리이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대장간에서 나는 소리가 둔탁하다면 강구항의 게발 치는 소리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찍는 소리라고 할까.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한여름 밤 이불깃을 세우느라 두들기던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 같기도 하다. 산다는 것은 두들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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