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군위] 지금 한밤마을에는 늦은 봄, 미처 지지 못한 배꽃과 복사꽃이 돌담 따라 빛바랜 꽃술을 달고 있고 그 곁으로 박태기꽃이 무르익고 있다. 돌담 안을 들여다보면 다들 고만고만한 뜰에 꽃나무와 과실나무 몇 그루씩은 반드시 키우고 있어, 먼 길을 달려와 적막하도록 조용한 마을을 홀로 걷는 나그네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준다. 자세히 보면 돌담 틈새마다 담쟁이덩굴, 으름나무, 다래나무가 뿌리내려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어 어쩌면 돌담이 살아있는 생명체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돌담과 거기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식물과 돌담에 의지한 사람이나 모두 한 식구인 운명공동체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감상일까?
군위군 부계면 한밤 마을(대율리)의 돌담은 가공하지 않는 막돌을 어른 가슴 높이 정도 쌓아서 권위적이지 않다. 담의 기능이 외부 침입을 막고 여기서부터는 나의 땅이라는 경계를 짓는 것이라면, 한밤 마을의 돌담은 애당초 그런 기능을 생각하지 않고 쌓은 듯하다.
나지막한 돌담 너머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굳이 대문을 열고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집집 사정을 다 알 수 있을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곡선과 곡선으로 이어져 끝을 보여주지 않는 예스러운 돌담 골목길을 걷고 있노라면 시간을 훌쩍 건너 조선시대 어느 날로 되돌아 온 듯하다.
한밤 마을은 전통마을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마을 중의 하나이다. 팔공산 북쪽의 완만하게 흐르는 경사면 위쪽에는 마을 사랑방 역할을 했을 ‘대청’과 종가가 있고 그 아래로 여러 집이 돌담과 돌담끼리 어깨동무해 올망졸망 모여 있다.
마을 입구 역할을 했을 가장 아래쪽에는 풍수사상에 기초하여 마을의 지기(地氣)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래전에 조성한 솔숲이 계곡을 가로질러 있다.
동구(洞口) 숲에는 동제를 지냈음직한 당산목과 솟대가 있는데, 나무장대로 만든 일반 솟대와 달리 돌로 만든 솟대가 있어 눈길과 발길을 잡는다. 돌장대 끝에 앉아있는 오리가 아무래도 어색해 보여 새로이 다듬어야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든다.
마을 안에는 대율사라는 작은 절이, 역시나 돌담에 싸여있는데 절 마당에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미륵불이 무슨 장군처럼 떡 버티고 서서 마을의 긴 역사를 말없이 들려주는 듯하다. 절이나 집이나 그리고 마을의 숲이나 한밤마을에서는 모두 돌담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쳐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대를 이어가며 쌓았음직한 돌담이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 돌담에서 돌담으로 이어지는 마을 골목길을 걸어가면 마치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각각의 돌담 중에는 정교하게 쌓은 것이 있는가하면, 내가 쌓아도 저 정도는 되겠다 싶은 대충 대충 쌓은 것도 있어 나름대로 평가하며 점수를 줘보지만 결국 이 무렵에 피는 들꽃처럼 모두 다 아름답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한밤마을의 돌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돌은 작은 돌을 품고 있고 작은 돌은 큰 돌에 의지하며, 둥근 돌은 모난 돌을 감싸고 모난 돌은 둥근 돌의 틈새를 메워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개울이나 밭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막돌로 쌓은 돌담이 꼭 살아있는 인격체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서로 돕고 의지하며 오랜 세월을 지탱해온 돌담이 아옹다옹 사는 우리네 사람들에게 오히려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한밤마을은 한두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공간 안에, 대를 이어 쌓아온 돌담과 오래된 절집 그리고 마을의 중심이 된 ‘대청’과 종가, 공동체를 유지해 온 동구 숲의 솟대 등이 어우러져 있어 근래에 찾아보기 힘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최근 문화재청이 한밤 마을의 돌담을 문화재로 등록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을 돌담이 무슨 문화재가 될까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더러 시멘트를 사용하거나 흙을 섞어 원형이 변형된 돌담과 아예 돌담을 허물어 버리고 세운 시멘트 블럭 담을 보고 나니, 막상 떠날 때에는 조금 더 일찍 문화재 등록을 추진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게 아쉬워 마을을 다시 둘러보니 골목마다 집집마다 산수유나무가 마을을 가리도록 자라고 있어, 산수유 꽃 피는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 산수유 꽃 피는 내년 봄에 다시 찾아오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