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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따라 삼천리] 두 얼굴의 우리 동네 치열한 낮 해방촌 & 찬란한 밤 경리단길
[전설따라 삼천리] 두 얼굴의 우리 동네 치열한 낮 해방촌 & 찬란한 밤 경리단길
  • 전설 기자
  • 승인 2015.0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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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사진 / 전설 기자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서울] 해방촌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형성된 마을이다. 광복 이후 월남한 사람들이 남산 밑 언덕에 터를 잡고,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 들어 ‘남산 아래 첫동네’를 일구었다. 공치사하는 이 찾기 힘들지만 사실 해방촌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맨손의 역군들이 살던 동네다.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돌을 나르고, 어머니는 판자촌에서 미싱을 돌려 지금의 서울을 키워낸 곳, 바로 아랫동네에 미군기지 있어 검은 피부의 혹은 파란눈의 외국인이 동네 구멍가게를 들락거리던 이상한 동네.

해방촌의 골목골목에는 60~70년대 치열한 삶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그 땅이 기억을 읽기 위해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108개의 ‘하늘계단’을 오른다. 침이 꼴까닥 넘어가는 비탈을 오르니 곧 해방촌 오거리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사방을 둘러봐도 서울의 옛 얼굴이라고 부를만한 낡고 쇠잔한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주택가 한복판에서 길을 잃는다.

신흥시장 입구. 'ㅎ'이 빠진 낡은 간판에서 세월의 깊이를 짐작하다. 사진 / 전설 기자
신흥시장 입구. 'ㅎ'이 빠진 낡은 간판에서 세월의 깊이를 짐작하다. 사진 / 전설 기자
신흥시장에서 열리는 바자회, 음악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다닥다닥. 사진 / 전설 기자
신흥시장에서 열리는 바자회, 음악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다닥다닥. 사진 / 전설 기자
겉에서 보면 평번한 주택가. 그 속살은 '이상한 나라'의 옛 얼굴.
겉에서 보면 평번한 주택가. 그 속살은 '이상한 나라'의 옛 얼굴.
한낮에도 캄캄한 시장 내부. 사진 / 전설 기자
한낮에도 캄캄한 시장 내부. 사진 / 전설 기자

치열했던 서울의 낮, 해방촌

“여 동네서 제일 오래된 게 우리 부부요. 한 50년 살았나. 그때만 해도 이 근방이 다 하코방이었어. 한사람 걷기도 힘든 골목이었던 게 세상 살기 좋아지면서 동네가 변하고 사람들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우리만 남았어. 우리가 해방촌의 마지막 주민이라오.”

운이 좋았다.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김귀남 할아버지와 그 손을 맞잡은 김연자 할머니가 길잡이를 자청한다. “이름만 남았지 이미 없는 해방촌을 보고 싶거든 상가 사이에 난 계단을 따라 가시게.” 비밀 지령 같은 말씀을 따라 화장품 가게와 간판도 없는 전방 사이로 향한다. 시멘트 계단 몇 개를 내려왔을 뿐인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다. 벽면에 그려진 기이한 벽화 너머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길이 나 있다. 주홍빛 가로등 아래 영양탕, 정육점, 수선집의 간판이 희미하게 빛난다. 해방촌 탐방의 출발지 신흥시장이다. 

“신흥시장은 몇 해 전만 해도 사람도 많고 활기가 넘치는 해방촌의 대표 상권이었어요. 근데 재개발이다 뭐다 하면서 땅값이 치솟아 본래 장사하던 상인들이 높은 월세를 감당치 못해 떠났고, 그나마도 재개발이 기약 없이 미뤄지면서 텅 빈 유령도시처럼 돼 버렸죠.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주민들이 시장 안쪽에 문화공간 ‘해방촌 4평학교’를 자체적으로 운영하면서 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어요. 추운데 안쪽에서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어째 불 켜진 간판보다 불 꺼진 간판이 더 많다고 했더니 사정이 있었구나. 시장 곳곳에 그려진 벽화, 색색의 조형물과 전단지 등등 죽은 시장에 숨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를 눈으로 확인한다. 씁쓸한 마음 금할 길 없어 돌아서는데 지붕과 지붕 사이로 햇볕 한줌이 쏟아진다. 불 꺼진 시장을 밝히는 미약하지만 눈부신 빛이다.

낮과 밤을 잇는 두 얼굴
지하 깊숙한 땅굴 같은 신흥시장을 돌아보고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 다행히 시장 주변에는 다리쉼을 하기 좋은 이국적인 카페와 음식점이 여럿 모여 있다. 그 옛날 복덕방에서나 보았던 나무 문패가 정감어린 카페 ‘콩밭 커피로스터’ 국내의 각종 독립 출판물이나 희귀 음반을 한데 모아 놓은 서점 겸 문화공간 ‘스토리지 북앤필름’ 등 걸음을 늦추고 보면 시간 잡아먹기 좋은 새 명소가 바로 동네의 낡은 간판과 어울려 흥미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문방구와 구멍가게가 전부였던 해방촌이 새로운 문화명소로 급부상하면서 생긴 변화다.

“저희도 원래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가게를 시작했는데, 막판에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해방촌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해방촌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또 임대료가 오를까 걱정이에요. 누구는 땅 값 오르면 좋은 거 아니냐고 묻기도 하는데, 저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허탈하죠. 아무것도 없던 땅 고르고 열심히 일궈놓으면 뺏기고 쫓기고 하는 게….”

몇 해 전 해방촌으로 자리를 옮긴 ‘해방촌 카페 ㅇㅎㅎ’의 윤영찬 씨에게서 해방촌 상인들의 걱정을 전해 듣는다. 젊은 예술가와 상인들이 만든 개성 있는 거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거듭나고, 이 과정에서 임대료가 올라가 본래의 ‘박힌 돌’이 우르르 쫓겨난다. 신흥시장이 앓았던 땅의 열병이 해방촌 전역으로 번지고 있음이다.

서울의 마천루를 마주 본 아주 오래된 동네. 해방촌의 전경. 사진 / 전설 기자
서울의 마천루를 마주 본 아주 오래된 동네. 해방촌의 전경. 사진 / 전설 기자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오면 10분 거리의 경리단길에 닿는다. 사진 / 전설 기자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오면 10분 거리의 경리단길에 닿는다. 사진 / 전설 기자

 

아직은 평화로워 보이는 거리를 가로 지른다. 구경에 정신 팔려 걷다보니 어느새 길의 끄트머리. 해방촌천주교회와 군인아파트 사이로 난 샛길로 빠진다. 널찍한 포장도로가 갑자기 반으로 줄더니 또 다시 그 반절로 확 쪼그라든다. 옛 해방촌의 얼굴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신흥로 25가~29가길 구간이다. 바스러질 듯 낡은 기와지붕과 슬레이트 지붕이 닿을 듯 말 듯 한 골목을 지나니 골목 너머 빽빽한 서울의 마천루가 펼쳐진다. 서울 하늘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전깃줄에 꽁꽁 묶여 있다. 매일 보고 지나치던 남산타워 아래 익숙한 용산구 풍경이건만 밖에서 보는 풍경과 안에서 풍경이 이다지도 다를 줄이야. 골목 한가운데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 시간이 정지 된 듯 보이던 해방촌에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사진 / 전설 기자
사진 / 전설 기자
녹사평역에서 경리단길 가는 길에 위치한 '외국 헌책방' 포린북스토어. 사진 / 전설 기자
녹사평역에서 경리단길 가는 길에 위치한 '외국 헌책방' 포린북스토어. 사진 / 전설 기자
독특한 인테리어 용품. 푸억의 소품으로 가득한 미술용품. 사진 / 전설 기자
독특한 인테리어 용품. 푸억의 소품으로 가득한 미술용품. 사진 / 전설 기자

서울의 화려한 밤, 경리단길
해질녘 해방촌을 벗어나 밤의 경리단길로 향한다. 경리단길은 옛 육군중앙경리단(현 국군재정관리단)에서 남산하얏트 호텔을 잇는 약 1km 오르막길을 부르는 말이다. 최초에는 미군, 각국의 대사관 직원, 원어민 영어선생이 모여 살던 외국인 집단 거주지에 낯선 외국의 먹거리와 맥주를 취급하는 가게가 하나 둘 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부터는 힙스터의 성지, 수제 맥주의 거리, 노홍철의 거리로 지금의 인기에 누리게 됐다. 경리단길 초입에 있는 ‘녹사라운지’의 바텐더 냅은 경리단길에 불기 시작하던 무렵을 기억한다.

100여 종류에 달하는 수입 맥주를 맛볼 수 있는 경리단길의 명물 '우리슈퍼'. 사진 / 전설 기자
100여 종류에 달하는 수입 맥주를 맛볼 수 있는 경리단길의 명물 '우리슈퍼'. 사진 / 전설 기자
경리단길 초입에 자리한 '녹사라운지'의 매력적인 바텐더 넵.
경리단길 초입에 자리한 '녹사라운지'의 매력적인 바텐더 넵.

 

“한국에 온 것은 15년 전이고, 경리단길에서 2008년 무렵 가게를 열었습니다. 거의 7년 정도가 됐군요. 처음 문을 열 때만 해도 경리단길은 무척 조용한 곳이었어요. 그런데 지난해부터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인기 있는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한국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찾는 것을 무척 즐기는 것 같아요.”

경리단길을 활보하면서 깨친 것 하나는 새 문화라고 해도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네슈퍼나 길가에서 병맥주를 마시다가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 “헬로우!” 인사하는 정도의 자유. 그러다 통성명을 하고 가볍게 대화를 나눈 정도의 여유. 그런데 그 소소한 재미에 왜 이다지도 마음이 들뜨는 것인지. 한마디 인사말에 가슴께가 이상하리만큼 간지럽다.

일명 '장진우 거리'로 불리는 회나무길의 이색 명소들. 사진 / 전설 기자
일명 '장진우 거리'로 불리는 회나무길의 이색 명소들. 사진 / 전설 기자
LP판으로 음악을 들으며 가볍게 한잔할 수 있는 '엘피펍' 록시. 사진 / 전설 기자
LP판으로 음악을 들으며 가볍게 한잔할 수 있는 '엘피펍' 록시. 사진 / 전설 기자

 

중앙경리단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뒷길을 오른다. 소위 ‘장진우 골목’이라고 불리는  ‘회나무로 13가길’이다. 거리 곳곳을 수놓는 조명만 없었어도 한적한 주택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리에 각양각색의 펍, 특이한 소품가게, 크고 작은 레스토랑이 줄을 지어있다. 걸음을 늦춰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길의 끝에서 까파른 계단을 오른다. 경리단길 중턱에 서니 이 길 위의 최대 장점이 보인다. 어느 방향에서도 서울을 밝히는 빛의 기둥, N서울타워가 보인다는 것. 눈부신 타워와, 주택가의 작고 또렷한 빛, 수많은 가게의 조명이 한데 어우러진다. 치열했던 한낮을 보낸 대가로 얻은 경리단길의 밤이, 서울의 오늘이 눈부시다.

INFO
카페 ‘ㅇㅎㅎ’
주소 서울시 용산구 용산2가동 1-524 1층 

녹사라운지
주소 서울시 용산구 녹사평대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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