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의성] 경북 의성의 사촌마을은 전형적인 반촌(班村)마을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마을의 유명세를 더 빛나게 하는 게 있으니 바로 이 마을에서 3명의 정승이 배출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마을에서 현재까지 배출된 정승은 2명. 그렇다면 과연 나머지 한 명은 누가될까. 따스한 봄볕이 나들이를 자극하는 이때, 사촌마을을 찾아 정승 기운을 받아보는 여행은 어떨까.

경북 의성의 사촌마을을 찾은 날, 반갑지 않은 봄 손님인 황사로 하늘이 뿌옇다. 멋진 광경을 두고도 근사한 사진을 못 담을까 조바심이 나는데 사촌마을로 차를 몰아갈수록 어째 이상하다. 주변이 온통 사과밭이다. 과장 좀 보태면 차를 몰고 사과밭 한가운데로 가는 모양새다. 마을의 겉모습도 평범한 농촌마을의 모습이다. 보통 유서 깊은 전통마을이라고 하면 멀리서부터 확연히 그 모습이 다르지 않던가. 혹시 내가 잘못 찾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차는 마을 안으로 들어섰고 내 의구심은 거기서 끝났다. 사촌마을 안쪽 세인의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곳에서 골목을 가득채운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내 의심을 단박에 거둬줬기 때문이다. 

사촌마을은 예로부터 영남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양반마을이었다. 양반들이 얼마나 많이 살았던지 조선시대에는 사촌마을을 일러 기와지붕이 바다를 이룬다고 해서 ‘와해(瓦海)'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러나 현재 사촌마을의 기와집은 채 100년이 안된 역사만을 간직하고 있다. 수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마을에 오래된 고가(古家)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리 짧은 연륜을 가진 집만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 연유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사촌마을을 정통으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 스러져가던 1896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거사를 일으킬 때 이 마을 출신 의병장 김상종 선생도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일본군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선생의 고향인 이곳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벌이고 만다. 이 사건으로 당시 수백 채에 달하던 사촌마을의 기와집과 유서 깊은 건물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단다. 그러나 시련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 시기에는 연합군과 공산군의 전투가 이 마을 일대에서 벌어져 일본군의 참화에서 비켜서있던 몇몇 소수의 건물들까지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두 번의 엄청난 참화를 겪으면서도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였던 김사원 선생이 세운 만취당(晩翠堂, 보물 1825호)만은 용케 살아남은 것이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큰 난리 속에서 사촌마을 사람들이 합심해 만취당을 지켜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덕분에 후세인들에게 옛 사촌마을의 모습을 전하는 기념비적인 건물로 만취당이 우리 앞에 남아있는 것이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사촌마을을 처음 대면한 느낌은 한마디로 단아하고 우아하다는 것이다. 마을 골목길을 따라 우리 전통의 부드러운 처마 곡선과 고풍스런 기와를 인 흙담장이 조화를 이루고, 예로부터 출세보다는 학문을 권장했던 마을의 기풍에 따라 영달에 초월했던 선비의 꼿꼿한 기상도 함께 흐르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풍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마을 주민들은 1392년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안동김씨 김자첨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김자첨은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사촌(沙村)이라 이름 짓고, 출세를 마다한 채 학문과 수양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입향조(入鄕祖)의 유훈이 전해져 조선시대까지 이 마을 출신의 선비들은 출세보다는 학문과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단다. 

그러나 선조의 이러한 유훈도 하늘의 섭리는 못 거슬리는 법. 사촌마을이 자리 잡은 터는 풍수학적으로 3명의 정승을 배출할 명당터라고 한다. 마을 뒷산인 자하산이 문필봉의 형상으로 마을을 받쳐주고, 왼편으로는 좌산이 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마을 오른편에 조성한 가로숲(천연기념물 405호)이 우백호를 맡고 있어 귀한 인재가 나올 명당터라는 것이다.

사촌마을 출신의 첫 번째 정승은 고운 최치원의 장인이자, 신라의 총리 벼슬격인 각간(角干)을 지낸 나천업 공이다. 이 마을에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나천업의 고총(古?)은 사촌마을 뒷산인 자하산에 있다. 사촌마을 출신의 두 번째 정승은 조선시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선생이다. 흔히들 서애 선생하면 안동 하회마을을 떠올리지만 서애 선생이 태어난 곳은 사촌마을이다. 

이와 관련해 마을에 전해지는 서애 선생의 출생 이야기가 재미있다. 풍산 류씨 가문과 혼인을 한 서애 선생의 모친이 출산을 위해 친정에 들르자, 3정승의 전설을 알고 있던 안동 김씨 문중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단다. 재상의 기운이 외손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집으로 돌려보내야한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서애 선생의 모친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마을을 미처 빠져나가기도 전에 이 마을의 가로숲에서 서애 선생을 낳고 말았단다. 그러자 가로숲에 있던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내리고,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두 번째 정승의 출생을 알고 탄식에 빠졌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 관심사는 세 번째 재상이 언제쯤 나타나 마을의 전설이 완성될까하는 점이다. 마을 주민이자 초해고택의 주인인 류근하 할아버지에 따르면, 사촌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 출신의 세 번째 정승으로 예견했던 이는 김영삼 정권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냈던 류종하 전 장관이었단다. 하지만 류장관의 관운이 거기까지였는지, 총리직에는 오르지 못하자 마을 주민들의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이 마을을 거치는 3번째 정승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일본군의 방화와 6?25전쟁의 여파로 셀 수 없이 많은 사촌마을의 문화재가 불탔지만, 마을 주변에는 아직도 볼거리가 넘치고 넘친다. 문화재로는 앞서 소개한 만취당부터 서애 선생의 외조부인 송은 김광수 선생이 학문수양을 목적으로 세운 영귀정(詠歸亭, 경북문화재 234호), 안동김씨 도평의공파 종택 외에도 후산정사, 후송제, 양진당, 유자정 등의 재건 문화재가 있고, 자연물로는 수백 년 수령의 숲이 웅장한 풍치를 자랑하는 가로숲과 송은 선생이 심은 500년 수령의 향나무인 만년송(萬年松) 등이 마을 내에 있다. 게다가 마을 곳곳에는 옛 풍경을 담은 벽화와 시조가 그려져 있어 사촌마을은 전통마을의 옛 정취를 찾고자 하는 여행지로 제격인 곳이다. 봄볕이 따스한 이 봄, 의성 사촌마을을 찾아 아직 빠지지 않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정승 기운을 찾아보는 여행은 어떨까.

INFO. 
의성 만취당
주소: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7

영귀정
주소: 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