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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봄은 색으로 온다-컬러풀한 여행] 파란 달동네엔 ‘어흥’ 호랭이가 산다 부산 호랭이(안창)마을
[봄은 색으로 온다-컬러풀한 여행] 파란 달동네엔 ‘어흥’ 호랭이가 산다 부산 호랭이(안창)마을
  • 전설 기자
  • 승인 2015.03.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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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부산] 그 옛날 ‘엄광산 호랭이’가 출몰했다는 부산의 마지막 달동네를 오른다. 전쟁통에 세운 잿빛 마을에 무슨 요술을 부린 걸까. 굽잇길 따라 늘어 선 푸른 슬레이트 지붕과 물탱크의 빛깔이 선명하다. 색종이 뭉치에서 파란색지만을 골라 조각조각 오려 흩뿌린 듯 온통 파랑이다.

 

부산 동구 안창마을은 신발의 안창처럼 우묵하게 패인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는 대여섯 가구가 모여 살던 첩첩산골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이 하나 둘 판잣집을 지어 올리면서 부산 하늘아래 또 하나의 ‘깨끌막진(가파르다는 뜻의 부산 사투리)’ 마을이 형성된다. 여든을 바라보는 오자명 할머니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마을에 발을 들인 것도 그 즈음. “고향에서나 부자 노릇하제. 있는 재산 다 두고 맨손으로 넘어와가 우야겠노. 우선 살고 봐야제. 집 위에 집을 올리니 늠의 집 지붕을 우리 안방삼아 살았다꼬. 열 살이 안 됐을낀데 집 앞 질이 하도 좁아가 허구헌 날 자빠져서 코짱배기 깨먹고.” 오 할머니의 집 앞 굽잇길로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이후 꾸준히 재개발이 진행됐으나 굽이굽이 오르는 비탈 앞에 수년간 추진과 후퇴을 반복한다. 그러는 동안 안창마을은 부산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산의 마지막 오지’ 혹은 ‘최후의 달동네’로 남겨진다. 달동네는 몰라도 오지라니. 부산제일의 번화가 서면, KTX를 비롯한 철도의 시·종착지인 부산역이 10분 거리라는 것을 보면 퍽 억울한 신세다. 

호랭이마을에는 1950~60년대 지은 가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호랭이마을에는 1950~60년대 지은 가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호랭아, 헌집 줄게 새집다오

“안창마을이 아니고 ‘호랭이 마을’입니다. 2013년에 새 이름 선포식을 했죠. 이 일대가 호랭이 출몰지역이거든요. 보세요. 마을을 지나는 내천이 호계천, 이 일대 동네이름이 범일동, 범천동, 범내골. 호랭이 안 들어가는 데가 없죠. 그 중심에 호랭이 마을이 있습니다.”

무턱대고 길을 나서기 전에 마을 입구에 자리한 ‘오색빛깔 공방’에 들어선다. 양파물 천연 염색에 도전해볼 생각이었지만, 체험프로그램이 사전예약제(예약신청www.bsdonggu.go.kr)로 운영되는 것을 모르고 무작정 찾아왔으니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한다. 대신 호랭이마을 주민협의회 이찬웅 회장에게 마을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일정을 잡는다. 우선은 호랑이와 오방색을 주제로 마을 주민들이 설치에 참여한 설치 미술작품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마을을 돌아봐야겠다. 그리고 나서는 하늘과 가까운 자리에 올라 소문 자자한 호랭이 마을의 새파란 풍경을 실컷 눈에 담으리라.

시간이 남으면 마을 뒤편의 수정산 방향으로 난 ‘호랭이 어슬렁길’을 따라 산책에 나서는 것도 좋겠다. 부지런히 다리품을 판 다음에는 마을 내에 자리한 오리고기 골목에서 푸짐한 오리불고기 한상으로 하루를 마감해야지. 발걸음 가볍게 마을로 들어서는데 먼데서 지잉 지잉 지잉, 징소리가 들린다. 호기심이 동해 쫓아가니 아주머니 두 분이 막걸리, 시루떡, 사과 몇 개를 두고 작은 굿판을 벌이고 있다. 미리 끼쳐 놓은 막걸리 냄새가 달큼하다. 오늘날에는 구경하기 힘들지만, 내 어릴 적엔 경조사를 앞둔 집마다 굿을 치르곤 했다. 옛 추억 속 풍경을 부산에서 다시 볼 줄이야. 징소리를 뒤로 하고 시골집이 있던 풍경과 꼭 빼닮은 마을길을 달린다.

자연의 5가지 색으로 꾸민 오색빛깔 행복길.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자연의 5가지 색으로 꾸민 오색빛깔 행복길.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오색빛깔 속살의 파란 달동네
호랭이마을의 파란 전경을 보기 위해 굽잇길을 오르는데, 어쩐 일인지 벽화가 보이질 않는다. ‘새총 쏘는 아이’, ‘삼등신 스파이더맨’, ‘세종대왕’ 등 유명한 벽화 대신 파랑, 빨강, 노랑, 하양, 깜장색 조형물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호랑이와 더불어 마을을 꾸미는 또 하나의 주제 ‘오방색’이다. “벽화는 싹 지웠습니다. 이게 작가를 초청해 한번 벽화를 그리고 1년에 한두 번씩 보수를 하는데, 마을에서 직접 관리를 못하고 남의 손을 빌리다 보니 일회성 행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남이 그려주는 그림 말고, 가장 순수한 자연의 오방색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물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도 아니고, 5가지 색으로 마을을 꾸미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스런 마음이 앞서는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나름대로의 단정한 멋이 느껴진다.

마을에서 숲까지 단 5분. 어슬렁어슬렁 오르는 호랭이 어슬렁길.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마을에서 숲까지 단 5분. 어슬렁어슬렁 오르는 호랭이 어슬렁길.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호랭이 마을 입구에서 알록달록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호랭이 마을 입구에서 알록달록 지도를 보고 방향을 잡는다.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오방색 조형물에는 호랑이 관련 속담, 마을어르신들의 시, 마을과 그 역사를 함께한 가족사진 등이 기록돼 있어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고 들여다보게 된다. “진자리를 다져 흙으로 집 지었소 / 힘써 땀 흘린 술 한 잔 걸치고 / 턱으로 흐른 술방울이 / 호계천을 이뤘소…엄광산 호랭이 / 어느 결에 다가 앉아 / 곰방대 피워 물며 하시는 말씀 / 세월이 대수요 여기 와서 쉬다 가게 / 어차피 한세월, / 흐르는 물에 마음 씻고 가소.” 마을의 서사를 노래한 시를 읊으며 골목을 오른다. 문득 고개를 돌리는데 그새 표고가 높아졌나보다. 그토록 바라던 파란 풍경이 눈앞이다.

오색빛깔 공방에서 오색빛 체험거리에 도전해보자.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오색빛깔 공방에서 오색빛 체험거리에 도전해보자.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하늘님이 보기에 잿빛도시가 추레해 파란 색종이를 속닥속닥 오려 뿌려주었나. 그게 아님 낡은 집도 한식구라고 마을에서 단체로 새 옷이라도 지어 입혔나. 비탈위에 다닥다닥 뭉친 고만고만한 집들이 새것마냥 깨끗한 파란 지붕을 이고 있다. 그 위에는 머리방울 같은 물탱크가 하나씩. 그 파란 풍경에 눈을 떼기가 아쉬워 조심조심 뒤로 걷는다.

동의대학생들이 창시한'오리고기 골목'에서 푸짐한 한상.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동의대학생들이 창시한'오리고기 골목'에서 푸짐한 한상.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4월 사진 / 전설 기자

호랭이 어슬렁길 따라 오리사냥
호랭이 마을에서 수정산 뒤편의 산길을 따라가면 또 다른 호랑이 명소를 만날 수 있다. 오방색 리본을 따라 걷는 ‘호랭이 어슬렁 길’이다. 이름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도 30분정도가 소요되는 짧은 코스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에 나서기 좋다. 마을을 빠져나가자마 숲에 도착하는데 조금만 더 오르면 동쪽으로 부산항, 서쪽으로 낙동강과 김해평야, 남쪽으로 구봉산·엄광산·구덕산·승학산을 잇는 능선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만약 짧은 코스가 아쉽다면 호랭이 마을에서 수정산, 구덕산, 승학산에 이르는 약 13㎞ 산행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


“호랭이 잡으러 왔어. 아까 보니까 두 마리 있든데 하도 날쌔서 놓치삤네.” 우연히 마주친 이주석 씨의 농담에 웃다보니 꼬르륵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린다. 밥때 맞춰 가기 좋은 호랭이 마을의 오리고기 골목은 10여 년 전 술 찾아 안주 찾아 산 넘어 오던 동의대생들에게 막걸리를 내주던 것을 시초로 자연스럽게 조성된 먹자골목이다. 현재 30여개 오리전문점이 영업 중인데 하나같이 싸고 맛있고 푸지다. 오리는 마리당 2만원 선으로 빨갛게 양념한 오리 불고기가 가장 인기 높다. 불판에 오리를 올려 굽다가 마지막에 정구지(부추)와 팽이버섯을 한 김 익혀 겉절이에 싸 먹는다.

“서울손님 오면 자꾸 서울 와서 장사하래. 오리 값 2배로 받아서 부자 된다꼬. 근데 그기 되나. 안창(호랭이)마을은 워낙 오리장사 하는 집이 많고 오래됐으니까 좋은 오리 싸게 받아서 이만큼 받고 팔지. 여기는 학생들이 많아서 맛도 값도 바뀌면 장사 못해.” 삼거리 가든의 김순오 사장이 “부산 오면 좋은데이 마셔줘야제”하며 소주 한병을 내준다. 물릴까, 하다 안주가 아까우니 딱 한 잔만 걸치기로 한다. 볼이 부어터질 만큼 커다랗게 오리 불고기 쌈을 싸먹고 꼴골꼴, 소주를 따라 단숨에 넘긴다. “아따 맛 좋데이.” 쓸 줄도 모르는 사투리가 툭 튀어나오는 걸 보니 진정 부산에 왔구나 싶다.

TIP. 호랭이마을 산복도로 소풍
부산시 동구청의 ‘산복도로 소풍’에 참여하면 호랭이마을 천연염색체험 코스를 비롯한 문화체험과 특별한 경관, 역사 명소 등을 하나로 연결한 11개 코스에 참여해 볼 수 있다. 
천연염색 코스 범일동 7번출구~친구 <영화>촬영 육교~구 보림극장~범일시장(호천석교비터, 골목시장)~통일교전시관~호랭이마을 오색빛깔공방

INFO. 호랭이(안창)마을
주소 부산시 동구 안창로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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