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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향기 흐르는 여행 입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 정원' 아버지의 사랑이 만든 에덴동산 같은 풍경
[향기 흐르는 여행 입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 정원' 아버지의 사랑이 만든 에덴동산 같은 풍경
  • 이수인 기자
  • 승인 2006.07.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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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그림이 있는 정원 전경.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여행스케치=홍성]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 거친 야산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꿔 아들에게 선물했다. 전신마비인 아들은 붓을 입에 물고 그 정원을 화폭에 담아 아버지에게 답례했다. 이제 부자가 만든 정원에는 사람들이 찾아와 쉬고 간다. 

한적한 시골 도로를 먼지 폴폴 날리며 찾아간 충남 홍성의 <그림이 있는 정원>. 우리나라 전통 수목인 소나무와 향나무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잘 가꿔놓은 사립 수목원으로 지난해 문을 열었다. 약 3만평의 땅에 1,50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지만 수목원이라기보다 어느 부잣집의 잘 꾸며 놓은 정원같다. 

분재에서 막 튀어 나온 듯한 멋스러운 전통 소나무는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질 듯 구부러진 것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 위로 쭉쭉 뻗을 줄 밖에 모르는 소나무만 보다가 이렇게 운치있는 우리 나무를 보자 마음이 정겹다. 

수목원의 대표인 아버지 임진호씨는 젊은 시절 나무를 좋아해 이곳 홍성 매현리에 땅을 사들이고 취미삼아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세 자녀 중 한 명에게 조경사업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런 아버지의 뜻을 받든 이가 맏아들 형재씨였다.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레스토랑 <Mei>의 테라스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는 여유를.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형재씨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The Gallery>.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하지만 관상원예학과 재학 중이던 지난 87년, 멀쩡한 두발로 집을 나선 아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후로 꼬박 7년을 아들은 누워만 지냈다.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20대의 젊은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묵묵히 다시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자동차 매연을 맡으며 휠체어를 타는데 애비로서 가슴이 무너집디다. 그래서 그저 잔디밭에서나마 편히 휠체어를 탈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규모가 커져 버렸네요.”

취미삼아 시작한 일이라지만 전나무와 소나무도 구분할 줄 모르는 조경 ‘왕초보’가 돌을 파내고, 나무를 심기란 쉽지 않았다. 심었다 옮기고 세웠다 뜯는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했다. 아들 형재씨가 볼 수 있는 정원이라곤 통 유리창으로 내다보는 정도가 고작이지만 정원 내 작은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정원 곳곳에 놓인 나무 벤치와 평상은 전통칠기공예 장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아버지가 손수 만들었다. 

가족들의 생활관 옆 언덕길을 돌아가자 내부가 훤히 보이는 방안 침대에 기대어 한 남자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뭘 그리나 싶어 힐끗 쳐다보며 지나치려는데 화가의 붓이 손이 아닌 입에 물려 있다. 순간 아~ 하고 터져 나오는 탄성. 그가 바로 척수장애인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린다는 임진호씨의 아들 형재씨였다.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휠체어를 탄 형재씨가 본인의 작품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칠기공예장인이었던 아버지가 만든 나무 평상과 벤치에 앉아 사람들이 쉬고간다.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는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정말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신기하게 북어 한 마리를 그리더라고요.” 

아들이 처음으로 그림 그리던 날을 떠올리는 아버지의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조경을 전공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형재씨는 붓을 물기 시작한지 2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연이어 두 차례나 입상하면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다. 
 
수목원 안의 갤러리는 아들 형재씨의 구필화를 볼 수 있는 전시장이다. 미술관 안에 걸려있는 대부분의 그림들은 나무, 흙, 숲을 소재로 생명의 근원인 물의 다양한 흐름을 그렸다. 흙으로 흘러든 물이 흙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흙은 그 힘으로 또 다른 자연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아들을 위해 만든 아버지의 정원이 아들에게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고, 그 정원을 화폭에 담으면서 아들은 새로운 희망을 꿈꾸게 되었으니 형재씨의 그림에는 부자간의 사랑과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셈이다.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이야 어디든 못갈 곳이 없지만 장애인들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전쟁이지요. 최근 아름아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우리 애 같은 장애인들이 찾아와 쉬어가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버지 임진호씨의 소박한 바람이다.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수목원내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묻어있다.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구필화가로 활동 중인 아들 형재씨. 2006년 7월. 사진 / 이수인 기자

어느 나뭇가지에서 들려오는 것일까?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두 다리를 쉬는데 지저귀는 새소리가 청명하다. 공주에서 소풍 왔다는 한 가족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다. 까르르 웃으면서 정자 주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여름날의 녹음이 뿜어내는 진한 풀냄새, 나무냄새와 함께 <그림이 있는 정원>에는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 난다. 행복만이 가득한 정원의 진한 향기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배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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