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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이달의 섬] 청산도 상서리 마을 돌담길 돌담길 한 굽이마다 청산도 아낙 눈물 한자락
[이달의 섬] 청산도 상서리 마을 돌담길 돌담길 한 굽이마다 청산도 아낙 눈물 한자락
  • 박지영 기자
  • 승인 2006.07.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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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완도읍에서 약 19.2km 떨어진 청산도.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여행스케치=청산도] 지난 봄에 전화 한통을 받았다. “봄의 왈츠에 나오는 배경이 어디니? 너무 가보고 싶다.” 유채꽃과 돌담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며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곳은 갓 시집온 새색시가 파란 바다색에 놀라 옷고름을 풀어 적셔봤다던 청산도. 하지만, 청산도의 진정한 속내는 돌담길을 걸어야 알 수가 있다는데…. 

쨍한 하늘빛에 마음까지 동화되던 날, 완도항에서 출발한 배는 45분 만에 청산도에 정박했다. 청산도의 하늘과 바다와 산 사이에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존재하지 않을까? 서로의 마음을 파랗게 물들이며 넘나드는 세 친구를 보고 있자니 청산(靑山)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것은 아닌 것 같다.   

논밭둑과 마을로 눈만 돌려도 한가득 들어오는 것이 청산도 돌담이지만, 유독 허물어진 데 없이 보존이 잘 된 곳이 상서리 마을의 돌담길이다. 조용할 줄 알았던 섬마을이 마늘 수확으로 분주한 가운데, 마늘을 가득 실은 경운기가 길을 꽉 메우고 있다. 돌담에 딱 붙어 길을 비켜주고서야 담쟁이 옷을 입은 돌담길을 홀로 차지했다.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상서리 마을은 돌담길 사이로 30여 가구가 터를 잡고 살고 있다.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서편제의 판소리 장면을 담아낸 담리마을 돌담길.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이집 저집을 구경하며 돌담길을 느릿느릿 걷고 있자니,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청산도의 두 가지 속어가 생각난다. “청산도가서 글 자랑 하지 마라!”, “속을 모르면 청산도에 시집가지 마라!” 시집도 가면 안 되고 글 자랑도 해서는 안 되는 곳, 청산도와 돌담길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귤은 김유(橘隱 金劉)선생을 빼놓고는 청산도의 글공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선생과 관련된 추측성 이야기들이 무성하다. ‘거문도가 고향인 귤은 선생이 뗏목을 타다가 풍랑을 만나 여서도로 밀려 왔다가 청산도까지 오게 되었다’, ‘귀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여서도에 정착한 선생을 청산도 청계리 지씨가 “글 좀 가르쳐 주오!”하여 모시고 왔다’ 등으로 크게 나뉜다. 

청산면의 부락 대표들이 섬에 남은 자료를 토대로 발간한 <청산면 향토 사료지>에 따르면 선생은 조선 후기에 거문도에서 태어났으며, 노사집을 펴낸 학자 기정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고 시문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은 과거(科擧)에 미련을 두지 않고 향리에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거문도와 가까운 청산도까지 그 명성이 자자해지자, 청산도의 지승문씨가 직접 귤은 선생을 청산도로 모셔 와서 서당을 열고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길 청했다.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요즘에는 마늘농사, 전복양식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청산도 아낙.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산지를 개간해 만든 구들장 논이 평화롭다.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고조부가 귤은 선생의 제자였다는 청산도 주민 김형석(74)씨는 “돈이 없는 사람들도 쌀이나 조를 주고 글을 배웠응께 청산도에는 양반들이 판을 쳤제잉, 글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청산도에서 ‘척’ 좀 하려다 망신만 당했으니깐” 하며 자랑한다. 귤은 선생에게 배운 오십 여명의 제자들도 근처의 노화도와 소안도, 신지도와 해남까지 가서 또 다른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당시는 조혼이 빈번했던 조선시대 후기. 10대의 어린 나이에 결혼한 청산도의 남자들이 이처럼 글공부에 심취하게 되자,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시부모만 모시고 사는 며느리는 그나마 다행 중에 속했다. 어린 며느리가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삼촌, 고모, 시아재 등 온 가족의 빨래와 식사 준비에다 아침 일찍 밭에 나가 농삿일까지 도맡아서 해야 했다. ‘시’자가 들어가서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신세대 며느리들이 들으면 경악할 일이다. 

아낙들이 논밭을 일구며 나온 돌로 마을 어르신들이 돌담을 쌓았다. 크고 평평한 돌로 기본 골격을 쌓고 사이사이에 자갈과 황토를 넣어 허물어지지 않도록 보수를 했다.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청산도는 살림 밑천으로 소를 많이 기른다.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귤은 선생의 후학들이 그의 학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숭모사. 2006년 7월. 사진 / 박지영 기자

글공부만 하던 철없는 남편들은 장성해서 대부분 외지로 떠났다.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위해 육지로 가기도 하고, 학문에 더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도 갔다. 남편이 떠난 뒤 청산도의 부인들은 홀로 남아 ‘징글징글한’ 고생을 말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껏 청산도에는 ‘속을 모르면 시집을 가지 말고, 글자랑을 말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글을 알면 ‘놈’에서 ‘방귀 꽤나 뀌는 사람’으로 대접을 해주던 세상이었으니, 청산도남자들이 글을 배우려 했던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카맣게 타버린 청산도 아낙의 속은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야무지게 잘 쌓여진 돌담길을 걷고 있자니 돌 하나하나에 아낙의 시름이 묻어나는 것 같다. 왠지 마음이 짠하다. 

돌담길만을 찾아 청산도에 왔다면 당황하기 쉽다. 허물어질까봐 중간 중간 시멘트를 발라 손을 본 흔적도 있지만, 상가를 제외한 청산도 천지가 돌담이다. 돌담 사이로 음머~하고 우는 소가 있고, 낯선 객이 반가워 선한 웃음을 짓는 주민이 들어오라며 손짓을 한다. 
청산도 어디를 가건 돌담길을 지나게 된다. 청산도의 속내를 알려거든 차분히 돌담길을 걸어보라. 낮은 담 너머 보이는 청산도 아낙과 선비가 혹 또 다른 속내를 들려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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