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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기찬 마을 여행] 시인 조지훈의 고향 경북 영양 주실마을
[기찬 마을 여행] 시인 조지훈의 고향 경북 영양 주실마을
  • 박효진 기자
  • 승인 2015.04.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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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여행스케치=영양] 경북 영양의 주실마을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문필봉과 연적봉이 마을 앞에 있어 인재가 끊이지 않는 마을로 유명하다. 주실마을에서 시인 조지훈을 비롯한 많은 문재(文才)가 배출되는 것이 다 이런 풍수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 것일까. 주실마을을 찾아 직접 확인해보자.   

경북 영양의 주실마을을 찾아 가는 길은 참 멀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라도에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이 있다면, 경상도에는 ‘B?Y?C(봉화, 영양, 청송)’가 있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할 때마다 그냥 웃음으로 넘겼었는데, 실제로 길을 떠나보니 멀기도 하거니와 외지기도 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때 묻지 않은 산하가 반가워 즐거운 마음으로 운전하다보니 어느새 일월산 자락에 자리 잡은 주실마을에 도착한다.  


주실마을은 평화로운 풍경을 가진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다른 마을과 차이가 있다면 마을에 전통 가옥이 많다는 것. 주실마을이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역사는 문정공 정암 조광조 선생의 기묘사화(1519년)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정암 선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자 한양 조씨 일문은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영남지방에 자리 잡은 한양 조씨의 후손 중 호은 조전 선생이 1629년 이 마을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400년 동안 주실마을은 자의든 타의든 항상 주변의 이목을 끄는 마을이었다. 

먼저 주변의 시선을 끈 것은 마을이 빼어난 명당에 자리한 것이다. 풍수학자들에 의하면 이 마을의 입향조(入鄕祖)인 조전 선생이 지은 호은종택이 문필봉(文筆峰)과 연적봉(硯滴峰)의 기운을 제대로 받는 자리에 기막히게 앉아 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문재(文才)가 많이 배출된 동네치고 주변에 문필봉이 없는 마을이 없지만, 호은종택은 대문 밖에 바로 문필봉과 연적봉이 있어 인재가 끊이지 않고 배출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조 때 동부승지를 지냈던 옥천 조덕린 선생을 비롯해 시인 조지훈 등의 많은 인물이 주실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 크지도 않은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에 문집을 남긴 학자만 63명이라니 정말 문필봉의 영향이 있는 것일까 싶다. 

마을의 이런 풍수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주실마을은 문필봉과 연적봉이 가까이 있어 문재가 끊이지 않고 배출되는 명당이지만, 마을의 형세가 마치 배가 운항하는 모습의 행주형(行舟形) 터라서 우물을 파면 배가 침몰해 인재가 끊어진다고 봤다. 그래서 예로부터 마을 안에 우물이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옥천종택에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호은종택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이 우물에서 물을 긷거나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서 물을 길러서 썼다고 한다. 

두 번째로 이 마을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투철한 개화의식이다. 주실마을은 개화기에 영남 지방 양반동네 중에서 가장 먼저 단발령을 받아들인 마을이다. 몸의 터럭 하나라도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며 끔찍이 아꼈던 조선 말기에, 그것도 양반들의 본향이라는 영남 북부 지방에서 이 마을 출신의 조병희를 주축으로 한 혈기왕성한 20대가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나타났으니, 당시 이 지방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오죽했으면 안동 지역의 유림에서 주실마을 사람은 안동 땅으로 들이지 말라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을까 싶다. 
주실마을의 개화의식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조지훈 시인의 조부인 조인석은 종손이라는 신분임에도 1910년에 종부와 일문의 과부들에게 개가(改嫁)를 허용했으며, 1928년에는 아예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신문명과 신학문을 장려하여 이 시기에 도쿄, 베이징, 서울 등으로 마을 청년을 유학 보내 선진문물을 익히게 하니 이후 마을에는 박사와 대학 교수가 가득했단다. 여기서 더 주목받는 점은 이러한 마을의 변화를 이끌어낸 힘은 개인의 힘이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와 문중 공동체가 유교적 전통에 바탕을 둔 문명개화에 합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시인 조지훈의 대표 시 '승무'를 형상화한 시비.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시인 조지훈의 대표 시 '승무'를 형상화한 시비.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주실마을의 전경. 마을 안에 고택이 많다.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주실마을의 전경. 마을 안에 고택이 많다.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세 번째로 세인의 이목을 끈 것은 주실마을이 민족적 기개와 지조를 갖춘 마을이라는 것이다. 실학자들과 일찍 교류한 덕분에 개화사상에 먼저 눈을 뜨고, 일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유학을 보냈으면서도 무조건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주실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엄격히 지키는 ‘삼불차(三不借)’라는 유훈이 있다. 마을의 입향조인 호은 조전 선생이 남긴 것으로서, ‘재물, 사람,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삼불차다. 호은 선생은 삼불차를 통해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기 위해 양자를 들이지 않으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권장했다. 

지훈시공원의 안내석.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지훈시공원의 안내석.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개화기 주실마을 청년들의 교육터전이었던 월록서당.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개화기 주실마을 청년들의 교육터전이었던 월록서당. 2015년 5월 사진 / 박효진 기자

이러한 선조의 유훈은 마을의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이후 주실마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토대가 됐다. 그래서 마을 사람 중에는 게으른 사람이 없고, 마을 안에는 유독 서당과 정자 등 학문과 관련된 시설이 많다. 주실마을에서 유독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도 입향조의 이런 유훈과 학문을 우선시하던 마을의 기풍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또한 마을 대대로 전해진 이러한 긍지와 기개가 있었기에 일제강점기 서슬 푸른 압력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마을 전체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유일한 마을로 주실마을이 남아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주실마을에는 호은종택, 옥천종택, 월록서당, 창주정사 등의 고가(古家) 외에도 시인 조지훈과 관련된 조지훈문학관, 지훈시공원, 방우산장 등의 볼거리와 산림청이 선정한 아름다운 숲인 ‘주실쑤(시인의 숲)’라 불리는 마을의 방풍림이 있어 볼거리, 즐길 거리가 넘친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 영양의 주실마을을 찾아 마을의 매력에 듬뿍 빠져보자.

INFO. 호은종택
주소: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

조지훈문학관
주소: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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