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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명인별곡] 혼을 담아 국궁과 함께한 50여 년 국내 최고의 궁장, 명궁, 명무 권영학 명인
[명인별곡] 혼을 담아 국궁과 함께한 50여 년 국내 최고의 궁장, 명궁, 명무 권영학 명인
  • 박지원 기자
  • 승인 2015.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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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여행스케치=예천] 50여 년간 활과 동고동락한 권영학 명인. 세상은 그를 최고의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이라 예찬한다. 신궁의 경지를 넘어선 명궁(名弓)이자 명무(名武)라고도 찬탄한다. 나라에서 하나 내주기도 어렵다는 칭호를 세 개나 거느리고 있는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권영학 명인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를 만나고자 경북 예천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린 언론사 관계자들이 수두룩하니까. 집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려도, 늦은 밤 기습적으로 찾아가도 허탕 치기 일쑤란 소문까지 들은 터라 섭외 전부터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인터뷰를 요청했다. “명인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실 있는 기사가 나올 것 같습니다.” ‘내실’이란 단어에 마음이 동해 취재 요청을 수락했다는 권 명인 덕분에 예천으로 내달리는 발걸음이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는 것 마냥 가볍고 설렌다.

이내 마주한 권 명인은 칠순이 넘었음에도 장수의 기운이 넘친다. 범처럼 형형한 눈빛, 굳게 다문 입술, 단호한 목청, 거기에 다부진 몸까지. 섭외 당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로 짐작은 했건만 이정도일 줄이야. 과연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활 제작자는 궁장, 화살 제작자는 시장이라 부르며, 권 명인은 궁장이다)과 신궁의 경지에 오른 이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 이른바 명무?명궁의 칭호가 영락없이 어울리는 명인이다.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궁장 이전에 얻은 칭호 ‘명무·명궁’
예천은 우리나라 전통 활인 국궁(國弓)의 주산지다. 1900년대 초 왕산골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안동 권 씨 사람들이 활을 만들기 시작한 게 시초다. 예천의 활이 전국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고장에서 나고 자란 권 명인의 아버지는 활 만드는 기술의 일인자였다. 하지만 차가운 냉대와 푸대접을 받던 장인의 길을 아들까지 걷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제가 활을 만지고 있으면 호통을 치셨죠.” 꾸지람 때문에 활 만드는 기술을 익힐 수 없었던 어린 권 명인은 틈만 나면 아버지 몰래 활시위를 당겼다. 중학교 시절에는 궁도부에 들어갔다.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지도교사의 설득에 아버지는 전국대회에 나가는 아들을 위해 손수 만든 활을 내줬다. 이때부터 그는 전국대회에서 100번 이상의 입상과 48번의 우승을 거머쥐며 궁사로서 이름을 알렸다.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그는 전주대사습놀이 국궁대회에 참가해 가장 젊은 나이에 장원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국궁계에서는 ‘신궁’이 등장했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명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한궁도협회에서는 활을 가장 잘 쏘는 자에게 5단을 내주는데, 그에게는 명궁을 뜻하는 6단을 부여했다. 그도 그럴 것이 145m 떨어진 과녁의 귀를 자유자재로 맞출 수 있는 것은 명궁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겠는가. 이처럼 그는 궁장이 되기 전에 이미 국가가 공인한 명무?명궁의 자리에 올랐다.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국궁 위상 드높인 국내 최고 궁장
권 명인의 아버지는 궁사로서 이름을 드높인 아들일지라도 활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것만은 반대하고 나섰다. 강직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그는 당신의 뜻에 따르고자 총무처 국가고시 4급 시험에 합격해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활을 들고 있어야 할 손이 볼펜을 오래 쥐고 있을 수는 없었을 터. “1년 만에 공무원 생활을 내팽개치고 낙향해 몇날 며칠을 꿇어앉아 아버지께 빌었죠.” 권 명인의 이러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활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가 만든 활은 역대 대통령들도 소장하고 있을 정도의 명품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국내는 물론 해외의 박물관에도 전시된 그의 활은 변함없이 우리나라 국궁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2015년 7월 사진 / 박지원 기자

그가 만드는 활에는 동식물의 천연재료가 쓰인다. 물소뿔, 쇠심줄, 민어 부레, 대나무, 참나무, 산뽕나무가 그것인데,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소홀히 해도 제대로 된 활을 만들 수 없다. 게다가 활이 탄생하려면 1년이 걸린다. 6월부터 9월까지 재료를 준비하고,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제작을 한다. 그는 “활을 만드는 일이나 활을 쏘는 일 모두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참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일 년 열두 달이 모두 31일까지 있으면 좋겠습니다. 활을 하루라도 더 만들 수 있으니까요”라고 덧붙인다. 활을 매만지는 그는 인터뷰가 진행 중이란 사실을 잊은 듯 활에 몰입하고 만다. 이때다 싶어 셔터를 누르는데, 권 명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시신경을 자극한다. 문득 저 땀은 그냥 땀이 아니라 전통문화 보존이라는 척박한 길을 적시는 단비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INFO. 예천진호국제양궁장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5관왕, 1983년 LA 세계양궁선수권대회 5관왕,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3관왕에 빛나는 김진호 선수의 이름을 딴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방문 하루 전 예약으로 무료 양궁 체험을 해보자. 김진호 선수는 권영학 명인이 사재를 털어 창설한 예천여중?고 양궁부에서 기량을 닦아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다.
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양궁장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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