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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전설따라 삼천리]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의 시계가 다시 돌 때 강화 교동도
[전설따라 삼천리]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의 시계가 다시 돌 때 강화 교동도
  • 전설 기자
  • 승인 2015.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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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여행스케치=강화] 찾아오는 이 마다 시간이 멈춘 섬이라하지만, 시계가 고장 난 이유를 따로 묻지는 않더라. 눈앞에 고향을 두고 60여 년 세월을 기다린 이에게는 ‘그 날’ 이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아주는 이 없더라. 가슴에 맺힌 말 켜켜이 이 섬, 교동도에 묻고 가노라.

교동도에 도착하기 직전, 버스가 교동대교 검문소 앞에 멈춘다. 승객들은 주섬주섬 신분증을 꺼내고 검문병은 얼굴과 신분증을 겹쳐보며 신원을 확인한다. 죄 지은 사람처럼 눈치만 힐끗힐끗. “교동도는 3km 거리에 북한 황해도 연백군을 마주 보는 민통선북방지역입니다. 물이 빠질 땐 헤엄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죠. 작년에도 북한 주민 2명이 귀순하려고 바다를 건너왔다니까요. 두어 달 전까지는 외지인은 6시 전에 섬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 일출·일몰 전후로는 통금시간도 있었죠.” 교동면사무소 전필제 씨의 설명에 깜짝, 검문병의 싸늘한 표정에 철렁.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 오늘 섬에서 자고 가도 되죠?” 묻는다. 앳된 검문병이 씨익 웃으며 답하기를, “됩니다.” 왠지 긴장이 풀려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그 사이 버스는 바다를 건너 교동도에 입도한다.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다을새길 초입은 슬레이트 지붕이 맞닿은 한적한 시골길이다.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다을새길 따라 북녘을 바라보면

“가만 있어봐. 여기 어디 도장이 있을 텐데…” 섬과 뭍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던 월선포 선착장에는 더 이상 배가 들지 않는다. 1년 전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할 일을 잃은 것이다. 대신 강화 나들길 9코스 ‘다을새길’의 출발지이자 여행자를 위한 휴게소라는 새 임무를 맡았다. 교동도의 옛 지명 ‘달을신’의 소리음을 딴 다을새길은 월산포 선착장에서 상용리~교동향교~화개산~대룡리~동진포를 거쳐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기는 걷기 길이다. 총연장 16km 중 반절이라도 걷는 게 목표라는 양선화 씨 일행이 비치된 다을새길 도장을 ‘도보여권’에 찍는다. 그 모습이 좋아 보여 수첩에 도장을 따라 찍고 일행의 뒤를 쫄래쫄래 따른다.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다을새길 도장. ‘나들길 도보여권’이 없어 수첩에 꽝.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가뭇가뭇하게 익은 곰딸기 툭툭 따먹으며 정상을 향해 전진.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늦여름의 시골길은 말 그대로 총천연색. 스치기만 해도 초록물이 들 것 같은 논이 푸르게 일렁이고 길가에는 새빨간 곰딸기가 조랑조랑 익는다. 그물망에는 노란 매미 허물이 붙어 있고 능소화나무 아래에는 누렁이가 배를 까고 낮잠을 잔다. 소박한 시골 풍취에 취해 얼마간 걸었을까. 매끈한 포장도로가 흙길로 바뀐다. 이대로 고요한 숲길 산책을 이어가볼까 했더니 웬걸. 천둥 같은 매미 울음소리에 혼이 달아난다. 폭포 밑에 귀를 바싹 갖다 댄 것처럼 멍멍하다. 소음에 쫓겨 교동향교와 화개사를 지난다.

화개사 넘어 부터는 본격적인 산행이다. 에구머니나. 비탈이 생각보다 가파르다. 짧은 너덜길과 급경사 로프구간을 엉금엉금 통과해 둥당거리는 가슴을 안고 화개산 정상에 선다. 한동안 흐린 얼굴만 보여주던 하늘이 말갛다. 시푸른 바닷물에 바락바락 빨아 널어놓은 듯 깨끗한 파랑색이다. 굽어보면 방울땀 쏟으며 걸어온 다을새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시선을 멀리 던지면 얕은 물길 건너편에 너른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저 앞이 북한이에요. 쌀 맛 좋기로 유명한 연백평야. 교동도가 실향민 집성촌인 건 알죠? 실향민 1세대 중 절반은 저기서 건너온 분들이죠.” 저절로 눈이 번쩍 뜨인다. “거기 누구 없어요?” 고함을 치면 “여기 누구 있소” 대답이 돌아올 것 같은 거리에 북녘 땅을 바라보다 문득 혼잣말이 터진다. ‘격강천리’라더니, 그 말이 참이었구나.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주인 없는 매미 허물. 머리 위로 맴맴맴 울음소리 우렁차다.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화개산 줄 무덤에 묻힌 사연
“곧바로 바라보이는 연안 북산. 소풍 나가면 철없이 뛰어 놀던 그곳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오빠도 어머니도 물 건너 바로 아른 거리는데, 나는 그래서 이곳 교동을 평생 떠나지 못했다. 그곳이 보일 때 나는 통곡한다. 온천지가 뒤집히도록 목청껏 울었다. 엄마! 엄마!” 
- 교동도 실향민 증언록 <격강천리라더니> 故 고순애 증언 中에서

실향민의 핏물이 책장마다 고여 있는 증언록을 더는 읽지 못하고 덮는다. 나고 자란 고향이 같아서 인지, 실향민 50인의 증언 첫머리는 대개 비슷하게 시작한다. 태어난 곳은 황해도 연백군 머구리, 부토리, 봉남리…. 농사짓기 좋은 평야라 종일 달음질치기 좋았던 옥요한 유년의 뜰. 어느 날 비상종 소리에 놀라고 따콩따콩 총소리에 쫓겨 놋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고 피난길에 올랐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집 잃고 가족 잃고 교동도에 남았더라. 

“교동도와 황해도 연백군은 하나의 마을이나 다름없었어요. 배를 타고 연안장, 연백장으로 장을 보러 다녔죠. 광복 이후에도 38선 이남에 들어 왕래가 자유로웠어요. 그러다 한국전쟁 때 곡창지대였던 연백평야에 폭격이 시작되면서 연백군 주민 대다수가 교동으로 피난을 왔고 정전협정 이후 연백군이 북한지역으로 편입되면서 영영 돌아가지 못할 고향이 됐죠.”
주최단체인 사단법인 <새 우리누리 평화운동>의 김영애 대표는 말끝에 “실향민 1세대 어르신들은 대부분 고향땅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망향단이며 화개산이며 북녘이 보이는 자리마다 줄무덤이 빼곡하게 생긴 이유다”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눈앞에 고향을 두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겠지, 믿고 기다린 60여년.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어 갯벌을 개척해 조각 논을 짓고, ‘하꼬방’을 열어 생필품을 사고팔았다. 하지만 조각 논이 쌓이고 싸여 교동도의 4/3이 광활한 농경지가 될 동안, 하꼬방이 모여 연안장, 연백장 대신할 대룡시장으로 커질 동안에도 고향으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눈앞에 두고도 밟지 못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부치지 못한 부모님 전상서가 몇 통인가.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쥐잡기, 문맹 퇴치 운동 등 그 시절 포스터 보는 재미가 쏠쏠.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시간이 멈추고 소원이 고인 대룡시장

“고향집에 갈 수 없으니 고향이름 따 장사를 한 거죠. 연안정육점, 해성식당, 연백식당….”

그때 그 시절 간판이 걸려 있는 대룡시장은 1960~70년 대 풍경을 만나는 일명 ‘시간이 멈춘 시장’으로 불린다. 400m 남짓한 가로 골목과 세로 골목이 십(十)자 형태로 교차하는데, 그 풍경이 할아버지 사진첩에서나 보았던 흑백풍경에 예스러우면서도 새로 물감을 입힌 듯 생생하다. 손으로 눌러 쓴 입간판, 유리창의 벗겨진 ‘선팅 글씨’, 맞닿을 듯 가까운 처마와 처마, 집집마다 달려 있는 제비집.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해무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연백평야. 참, 가깝다.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5년째 대룡시장을 지킨 ‘동산약방’의 나의환 할아버지.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눈 잡아 둘 만한 구석은 없지만, 거니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뭉근한 기운이 스민다. 걸리는 것이 있다면 문을 연 집보다 닫은 집이 더 많다는 것. “애들은 다 나가고 늙은이들 남았으니 시장이 죽지 않고 배겨.” 운이 좋아 대룡시장의 터줏대감 지광석 할아버지를 뵌다. 마침 오랜 벗이자 아우인 문경헌 씨가 이발을 하러 들른 날. 세월이 켜켜이 앉은 이발소 안, 가위질 소리에 맞춰 두 어르신의 추억담이 이어진다.

“철책을 놓은 지가 십 수 년 안됐어. 그 전에는 바닷가 나가서 낚시도 하고 그랬지. 한참 입질 올 즈음 이면 군인이 막 쫓아내. 그럼 북한에서 방송을 한다고. 야 니네는 인민 낚시도 못하게 하냐. 그래서 살겠냐. 이리 넘어와라. 하는 소리가 하늬바람타고 다 들렸다고.”

수십 년 전 추억담이 오늘 일 같이 느껴지듯, 영영 멈춰 있을 것만 같던 섬의 시계는 대룡시장 풍경이 몇 번인가 방송을 타면서, 1년 전 다리가 놓이면서부터 기이한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55년 째 한 자리에서 약방을 지키는 남의환 할아버지의 시름이 는 것도 그 즈음.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마늘을 손질 중인 중년의 부부.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조용한 대룡시장 안쪽.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오는 손님이 안 반가울 리 있나. 상주인구 없어서 죽어가던 시장이 사람 드니 새로 변해. 근데 사람이 몰리니까 그 많던  제비가 안 들어. 집집마다 날아다니던 것들이 사방팔방 후래시 터트리고 하니까 다 가버렸어. 제비 앉던 자리에 쓰레기하고 늙은이만 남지.”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지붕 아래 하나씩은 달려 있는 제비집. 새끼 제비가 밥달라고 짹짹짹. 2015년 9월 사진 / 전설 기자

문 연 집보다 문 닫은 집이 많은 시장, 든 제비집 보다 빈 제비집이 많은 동네에는 60여년 세월을 가슴에 묻은 증인이 남아 있다. 찾아오는 이 많아도 묻는 이 없어 가슴에 맺힌 이야기 끅끅 삼키고 골목을 쓸고 닦으며 또 60여년 세월 중 또 하루가 덧없이 간다.

Tip. 교동도 여행
외지인의 경우 자정부터 새벽 4시를 제외하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강화터미널에서 출발(5:50, 7:25, 9:30, 12:20, 13:40, 15:00, 16:20, 18:00, 19:30, 20:30)해 교동도까지 운행하는 군내버스 18번을 타면 약 1시간 소요. 주말마다 대룡시장 내에 자리 잡은 ‘대와 민속공방(032-933-8538)’에서 오후 1~5시에 스토리텔링 해설 및 체험 학습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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