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진주] 이광석 시인이 “막차를 놓치고 싶다”고 노래한 진주에 갔다. 붐비지 않는 풍경이 참 예뻤고 길을 물어보면 “데려다줄 테니 따라오라”고 말해준 사람들은 참 고마웠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양말 한 짝 그곳에 두고 온 사람처럼 진주를 생각한다.
마침내 진주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 짐을 풀자마자 마음이 가볍다. 그도 그럴 것이 진주는 웬만한 여행지가 다 모여 있고 대중교통망도 제법 오밀조밀한 도시. 하늘 맑은 날엔 발품 팔아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기 제격이다. 그런데 이때, 마치 약 올리듯 머리 위로 따라붙는 비구름. 그래도 괜, 괜찮아. 그렇게도 고대하던 진주잖아!
사실 일전에 진주에 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초대형 호수에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친 일이 있었다. 그날 내게 섬뜩하리만큼 넓게 느껴진 호수는 바로 ‘진주에서 이거 안 보고 가면 바보’라는 진양호. 1970년 남강댐 건설로 생긴 진양호는 저수량이 3억1000만 톤에 달하는 인공호수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그땐 뭣도 모르고 터미널부터 진양호까지 13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이동했었다. 젊었든가, 아님 미쳤었나보다. 하지만 이젠 안다. 시내를 관통하는 버스 중 진양호가 종점인 것들이 꽤 많다는 것을.
그런데 이번엔 진양호보다 더 매력적인, 꼭 가야만 하는 데가 있다. 진주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 없다는 로컬 맛집 ‘진양호밀면’이다. 길을 알려주신 아주머니께선 “거기도 맛이 예전 같지 않아”라고 하셨지만 시식해본 바에 의하면 “예전엔 대체 얼마나 더 맛있었단 거예요?” 되묻고 싶은 맛이다. 돼지고기육전이 고명으로 수북이 쌓여 면과 함께 꼭꼭 씹히는데 시원하면서도 고소하다. 군만두와 석쇠불고기를 곁들이면 더 맛있다는데, 으아, 너무 급하게 먹었는지 밀면 하나에 배가 빵빵하다. 이러다 여행길에 체하겠네. 소화도 시킬 겸 남강 변의 레일바이크에 올라탔다.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정취를 감상하니 얹힌 느낌이 싹 사라지는 듯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등을 보이려 할 때, 이럴 때 딱 가야 하는 명당은 어디일까? 임진왜란 전적지이자 촉석루, 의암, 국립진주박물관 등 볼거리 많은 진주성? 땡! 성에서 300m 떨어진 카페 ‘다원’이다. 1982년 문을 열어 진주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라는 이곳은 평소엔 고풍스러운 카페이다가 가끔은 록, 포크, 재즈, 국악 등 장르 불문 공연이 열리는 콘서트장으로 변신한다. LP판과 와인이 빼곡하게 들어찬 카페에 나도 한 자리 차지했다. 증기의 압력을 이용해 만드는 ‘사이폰커피’를 받아들고 호로록. 제법 낭만적인 진주의 밤이다.
고단한 하루 끝에 몸을 뉘인 곳은 갤러리 겸 게스트하우스 ‘뭉클’. 잠을 잊은 여행자들이 자정까지 둘러앉아 저마다의 모험담으로 밤하늘을 수놓는다.
INFO.
진양호밀면
주소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125번길 22-6
문의 055-746-3534
진주레일바이크
주소 경남 진주시 내동면 망경로 13
카페 다원
주소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532번길 7
게스트하우스 뭉클
주소 경남 진주시 강남로247번길 7-5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향한 곳은 망경동에 자리한 벽화마을이다. 유등축제가 유명한 진주까지 와서 유등 끄트머리도 못 보고 가는 건 말도 안 돼! 축제가 열리는 10월에 다시 오고 싶지만, 아쉬운 대로 근처에서 유등의 흔적을 찾았다. 망경동은 골목마다 벽화를 그려 넣고 유등을 달아놓은 마을. 그러나 아직 소문조차 나지 않았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 보는 재미가 약하달까. 가까운 진주유등체험관이나 남강 방면의 대나무숲을 함께 둘러본다면 그나마 괜찮겠다.
가벼운 아침 산책을 마치고 가방끈을 다시 조인다. 제법 멀리 나갈 참이다. 하루에 딱 9대만 다닌다는 144번 버스에 올라탔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이 목적지다. 청동기시대의 유적 위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토기, 옥, 석기 등 유물 500여 점이 있고,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전동식 인형극과 3D영화도 상영한다.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했다는 움집은 살림살이까지 갖춰놓고 있어 꽤나 실감 난다. “정말 이런 데서 사람이 살았어요?” 지나가던 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그러게, 정말 신기하네~”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기대 없이 왔다가 의외의 보물을 발견한 기쁨에 취했나 보다.
그 흥을 이어 장터 구경에 나섰다. 개인적으로 시장을 참 좋아한다. 잘 진열된 대형마트의 상품보다 수레에 실리고 바구니에 담긴 녀석들이 더 탐난다. 중앙시장에서 제일로 유명하다는 ‘제일식당’ 육회비빔밥을 뚝딱 해치우고, 그래도 식탐이 멈추지 않아 팥물에 흠뻑 젖은 찐빵을 보러 수복빵집에도 갔다가, 1000원짜리 왕만두가 불티나게 팔리는 으뜸왕만두집 앞도 기웃거렸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장터를 누비다가 금세 가벼워지는 지갑에 헉, 정신 차려야지.
진주시장과 아주 가까운 시외버스터미널에는 경상남도수목원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 일원에 자리한 경상남도수목원은 진주 지도를 쫙 펼치면 선명한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을 만큼 존재감 최상급의 대형(743,733㎡) 수목원이다. 3100여 종의 식물이 살고 있다는데 입장하자마자 보이는 열대식물원, 산림박물관 이어서 야생동물관찰원, 난대식물원 등등 봐야 할 게 끝도 없다. 그렇다고 굳이 다 볼 필욘 없다. 너른 벌판에 누워 이대로 집에 가지 말까, 확 잠들어 버릴까, 시답잖은 생각으로 한참을 뒹굴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취향대로 고른 마지막 여행지는 반짝 생겼다 이내 사라지는 프리마켓 ‘어슬렁마켓’이다. 매달 둘째·넷째 토요일에 진주교육지원청 앞마당에서 열리는데 그저 어슬렁어슬렁 둘러만 봐도 누구 하나 눈치 주지 않는다. 이익보단 서로 어울리는 데에 의미를 두니 낯선 객도 어제 본 이웃처럼 어울릴 수 있다. 구경이나 하다 말 심산이었는데 가방, 팔찌, 인테리어 소품 등 “꺅” 소리 날만큼 예쁜 아이템까지 넘쳐난다. 전국 재주꾼들 오늘 여기에 다 모였나? 진주는 넓고 내 다리는 짧아 이쯤에서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지만, 다음번엔 실수인 척 막차를 놓치고 싶다.
INFO.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월요일 휴관
주소 경남 진주시 대평면 호반로 1353
중앙시장
주소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547번길 8-1
경상남도수목원
월요일 휴관
주소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수목원로 386
어슬렁마켓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주소 경남 진주시 비봉로23번길 8 진주교육지원청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