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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34] 한강 이남에 자리잡은 대한제국의 흔적 옛 벨기에 영사관
[도심 속 숨은 문화유산34] 한강 이남에 자리잡은 대한제국의 흔적 옛 벨기에 영사관
  • 구완회 작가
  • 승인 2015.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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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여행스케치=서울]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에는 100년 넘은 서양식 건물이 있다. 아니, 한강 이남이 개발된 것이 수십 년 안짝의 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물론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대한제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벨기에가 영사관을 짓고, 그 영사관이 통째로 한강을 건너간 것이다.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사당역에서 ‘쎄게’ 엎어지면 코 닿을 자리에 대한제국 시절의 외국 영사관이라니. 더구나 이 건물은 분명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그럴 것도 같다. 화강암 계단이 튀어나온 현관에 붉은 벽돌, 무엇보다 수십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도열한 건물의 좌우 발코니가 서양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마당에 들어선 전시물들은 이곳이 미술관임을 말해주지만, 사뭇 이국적인 건물의 풍경은 여기가 근대문화유산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건물 좌우로 도열한 이오니아식 화강암 열주.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사연인 즉 이렇다.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에 벨기에 영사관이 들어선 것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의 일이었단다. 처음 영사관이 지어진 곳은 사대문 안인 중구 회현동이었다. 그러다 1982년 도심 재개발 사업에 밀려 이곳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짐만 옮긴 것이 아니라 아예 건물을 통째로! 그만큼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로 인정을 받은 까닭이다.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변웅필 작가 ‘portrait as a man-mr.fernandes’ 연작.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대한제국과 벨기에
마당에 들어서 안내판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대한제국이 유럽의 소국인 벨기에와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은 언제일까? 왜 벨기에 영사관은 다른 나라 영사관들이 몰려있던 정동이 아니라 한참 떨어진 회현동에 자리를 잡았던 것일까? 대한제국이 사라진 이후 벨기에 영사관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대한제국과 벨기에가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901년의 일이었다. 당시 벨기에는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청나라에 이어 대한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10번째 나라였다. 겨우 13년의 짧은 역사 동안 대한제국이 통상조약을 맺은 나라는 모두 11개국. 벨기에 이어 이듬해 조약을 맺은 덴마크가 그 마지막 국가이다. 그 무렵 벨기에는 유럽의 떠오르는 신흥 강국이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나 19세기 중반에 독립,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거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콩고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아무튼 넘쳐나는 국력으로 극동의 작은 나라에도 숟가락을 얹은 벨기에는 우선 정동에 공사관을 개설했다. 정동은 고종이 있던 덕수궁과 가깝고 다른 나라의 공사관들이 몰려 있을 뿐 아니라 치외법권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벨기에의 국력을 과시할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을 새로 짓기에 정동은 이미 만원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벨기에는 공사관 건물을 회현동에 짓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대신 크고 웅장한 설계도를 그렸다.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성동훈 작가의 ‘헤드’는 ‘진실을 원하지만 모순이 난무하는 현실’을 표현했다.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옛 벨기에 영사관의 ‘건생유전(建生流轉)’
일본 건축회사의 주도하에 멋진 건물을 세운 것까지는 좋았는데, 건물이 완공되고 본격적인 외교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른바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고, 공사관으로 계획되었던 건물은 한 단계 아래인 영사관이 되었다. 거기다 1910년 대한제국이 주권마저 빼앗기자 벨기에 영사관은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몇 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스위스와 함께 영세중립국을 선포했던 벨기에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벨기에 영사관은 이 웅장한 건물을 일본 보험회사에 팔고는 충무로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성동훈 작가에게 사슴은 세상의 권력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2015년 11월 사진 / 구완회 작가

이후 이 건물은 일본 해군 관저로, 해방 후에는 해군 헌병대 건물로 쓰이다가 1970년 상업은행이 소유하게 되었으나 앞서 이야기한 대로 1982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상업은행이 우리은행으로 바뀐 후에는 서울시에 무상 임대하여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쓰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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