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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김준의 섬 여행 44] 너는 늦게 피는 꽃이야 경기도 안산시 풍도
[김준의 섬 여행 44] 너는 늦게 피는 꽃이야 경기도 안산시 풍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4.05.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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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안산] 야생화가 다 졌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 길이 나지 않은 풍도 마을 뒤편으로 내달렸다. 이내 해안의 산모퉁이 절벽에서 큰개별꽃이 손짓했다. 비록 산자락을 온통 노란빛으로 색칠한 복수초는 만날 수 없었지만 늦게 핀 복수초의 청아함을 느꼈다. 사람도 꽃도 더디게 피는 게 더 가치 있다. 풍도와 늦게 핀 야생화는 닮은꼴이다.

“늦었네. 다 졌어. 지난주까지는 하루에 400~500명이 왔는데.”


그러고 보니 풍도에서 내리는 사람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지난주까지 수백 명이 오갔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앞서 가던 등산객이 비닐봉지에 가득 담긴 산두릅을 놓고 할머니와 흥정을 하고 있었다. 등산객은 “동네 시장에서 깎아. 허리 꼬부라진 할매가 가시 넝쿨 헤치고 따온 걸 깎아.”라는 핀잔을 듣고 만 원짜리 2장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1000원짜리 5장을 헤아려 사내에게 주었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간재미가 갯바람에 쫄깃하게 마르고 있다. 봄철에 된장으로 간을 맞춰 끓여낸 탕과 새콤달콤하게 무침으로 입맛을 돋우지만 말렸다가 여름과 가을에 찌거나 찢어서 탕을 끓여도 맛이 좋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풍도는 경기도 안산시에 속하는 섬이다. 봄에는 온통 야생화 천국이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섬이다. 여름철에는 몽돌해수욕장을 찾는 해수욕객이, 가을철에는 낚시꾼이 즐겨 찾는다. 그런데 섬 이름은 단풍나무 풍(楓)도 바람 풍(風)도 아니다. 풍성할 풍(豊)자를 쓴다. 

야생화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니지만 야생화가 다 졌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다. 어디 꽃이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피고 지던가. 사람도 그렇지만 늦게 피는 꽃도 있지 않던가. 더디게 피는 꽃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다. 야생화를 보려고 풍도를 찾는 사람들은 영흥도나 탄도 혹은 충남 당진군 도비도선착장에서 낚싯배로 당일치기 풍도여행을 한다. 인천에서 출발해 대부도 방아머리를 거쳐 풍도와 육도를 순항하는 배는 하루에 1차례뿐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섬에서 보내기로 했으니 급할 것도 없다. 보통 야생화를 보려는 사람들은 마을 뒤 은행나무를 지나 야생화 밭으로 달려간다. “길이 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민박집 안주인의 당부를 뒤로 하고 등대를 지나 서쪽 북배로 향했다. 노을이 내려앉은 듯한 붉은 바위가 푸른 바다와 대조를 이루는 곳이다. 야생화가 만발하는 후망산과 마을 뒤쪽이다. 그곳에는 채석장이 작은 섬의 큰 생채기처럼 남아 있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풍도분교는 초등학생이 둘, 유치원생이 둘 그리고 선생님이 둘이다. 진달래가 활짝 핀 운동장 너머에 작은 학교 건물이 정겹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할머니는 산나물을 찾고, 등산객은 배낭에 담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해안의 산모퉁이 절벽에서 큰개별꽃이 반기기 시작했다. 나지막한 봉분을 한 무덤가에는 풍도바람꽃, 풍도대극, 왜제비꽃 등 야생화꽃밭이었다. 특히 가시넝쿨 속에 핀 꽃이 더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배낭을 메고 숲속으로 들어가는 할머니를 만났다.

“며칠 전에 더덕을 캤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가져가서 주문한 사람이 다시 캐달라고 해”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풍도의 명동은 선창에서 마을회관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다. 그곳에는 플라스틱 의자 5개가 놓여 있고, 작은 슈퍼도 있다. 섬으로 들고 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웬만한 섬 이야기는 이곳에서 다 들을 수 있는, 그야말로 ‘광장’이다.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는 고사리도 없다며 가시넝쿨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한 무리의 등산객이 내려왔다. 그리고 두서너 명이 익숙하게 길옆으로 들어가더니 이제 막 순이 올라오기 시작한 두릅을 꺾었다. 또 다른 일행은 바람꽃을 보더니 휴대용 삽으로 덥석 캐서 봉지에 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여성의 손에는 파뿌리처럼 굵은 달래가 들려 있었다. 두릅은 집에 가는 길에 노인에게 사면 될 일이고, 야생화는 도심의 꽃집에서 판다. 알려지지 않는 작은 섬에는 야생화가 많이 자란다. 그런데 섬 구석구석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야생화는 물론 산나물과 산야초들도 육지 것들의 손을 타고 있다. 섬 노인의 용돈벌이도 어려지는 실정이다.

풍도인의 아픔 ‘겨울철새’
사실 풍도는 야생화보다는 ‘도리도 바지락’이라는 기억이 먼저였다. 도리도는 풍도에서 뱃길로 반시간 거리에 있는 경기도 화성군에 속하는 작은 무인도다. 납작하게 엎드린 모양새라 백중사리에는 섬이 물이 잠길 듯 위태롭지만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넓은 갯벌은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산 바지락 밭이었다. 바지락 종패를 우리나라 최대의 바지락 어장인 곰소만의 어민들에게 판매했던 곳이다. 섬 이름과 달리 풍요롭지 못한 풍도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100여 년 전 고향에서 무려 20여㎞ 떨어진 무인도에 바지락 밭을 일궜던 것이다. 농사라고 해야 후망산 자락을 일궈 씨를 뿌린 작은 밭뙈기가 전부였기 때문에 바다농사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자자손손 1990년대 중반까지 매년 11월 중순이면 열댓 척의 작은 똑딱선에 솥과 이불 등 세간을 싣고 도리도로 이주하여 굴을 채취하고 잠깐 명절을 지낸 후에는 봄철 내내 바지락을 팠다. 겨울철새처럼 집단이주를 하여 겨울을 났다. 주민들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 경찰 심지어는 집에서 기르던 가축도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방과 부엌 한 칸씩 딸린 죽담집을 짓고 10여 명이 1년의 반은 도리도에서 생활했다. 1년 농사를 짓는 셈이다. 그렇게 겨우살이로 얻는 소득이 800여만 원에 이르니 적잖은 수입이었다. 


그 무렵 시화지구 등 크고 작은 개발계획들이 추진되면서 평화롭던 풍도주민들의 도리도 겨우살이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신면 일대의 어촌은 가까운 갯벌에서 쏟아지는 조개 덕에 풍도주민들이 자리 잡고 있는 도리도는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간척과 매립을 위한 방조제가 쌓이면서 하루에 수십 톤씩 캐던 동죽과 바지락 등이 죽어서 조개 무덤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어업권보상도 수면위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도리도 인근 송교리, 궁평리, 백미리 어촌계에서도 바지락과 굴 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기는 보상받고 끝났지. 그게 1년 농사였어. 그래서 이렇게 맨날 의자에 앉아서 바다나 쳐다보고 살지.”100여 년 동안 가까이 한 생명줄인 어장을 포기해야 했던 사연치고는 답은 간단했다.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쩍쩍 갈라진 거친 손바닥이 겨우살이의 징표인 듯 했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풍도는 ‘야생화의 천국’이라고 한다. 이른 봄 복수초를 비롯해 대극과 붓꽃 등 많은 봄꽃이 피어난다. 야생화를 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주민들이 야생화가 많이 피는 후망산 
자락에 오솔길을 만들었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풍도바람꽃, 풍도의 꽃이 될까
선창으로 내려와 노랗게 핀 개나리와 붉은 진달래에 취해 학교로 들어섰다. 초등학생 2명과 유치원생 2명 그리고 선생님 2분이 생활하는 아담한 학교였다. 돌담에는 우럭, 꽃게도 학교에 가려는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마침 선생님이 유치원생을 데리고 마을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 길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섰다. 새로 지은 마을회관보다는 좁은 골목과 세월과 가난이 덕지덕지 붙은 집들이 오히려 정겨웠다. 주인이 떠난 집터는 이웃집에서 심은 마늘과 파가 집터를 지켰고, 겨우 한 사람이 앉아서 일을 볼 수 있을 만한 작은 뒷간은 들고양이들의 집터가 되었다.

풍도의 상징은 은행나무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용문사의 은행나무 못지않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풍도에 머물 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뒤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에 심어져 있고 뱃사람들은 은행나무를 보고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주민들에게는 은행나무 옆에 있는 샘이 더 친숙하다. 은행나무가 수맥을 끌어 당겨 만든 샘이라 마르지도 않고 수액 맛이 나 물맛도 좋다고 한다. 샘이 귀하던 시절에 주민들은 이 샘에 의지했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풍도 사람들은 1990년대 초까지 풍도와 바지락 어장이 있던 도리도 두 섬을 오가며 살림살이를 했다. 그래서 세간살이도 쉽게 옮길 수 있게 단출하다. 집도 그렇다. 사람이 떠난 빈집에 마늘을 심었고 뒷간은 들고양이들이 차지했다. 2014년 6월 사진 / 김준 작가

은행나무 우측으로 오솔길을 따라 가면 야생화군락지이다. 매년 야생화를 찾는 관광객을 위해 주민들이 가시넝쿨을 걷어내 오솔길을 마련하고 쓰레기처리를 위해 얼마간 입장료를 받고 있다. 또 야생화 군락지의 생태계 보전과 관광자원화를 위해 지자체와 민간단체도 안내소와 탐방로를 만들었다. 앞으로 풍도둘레길을 조성할 계획이며, 최근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청옆골 몽돌해수욕장 옆에 체험시설도 들어설 예정이다.

오솔길을 따라 현오색이 절정이었고 곳곳에 산자고, 바람꽃도 모습을 보였다. 등대풀과 헷갈리는 풍도대극도 새로웠다. 산자락을 노랗게 물들인 복수초는 볼 수 없었지만 늦게 핀 복수초가 더욱 청조했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어 좋았다. 꽃밭에 앉아 새소리를 드는 호사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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