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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가을추천 억새 여행지] 문학과 갈대가 어우러지는 전주천 가을역에 내리실 분, 전주천으로 오세요
[가을추천 억새 여행지] 문학과 갈대가 어우러지는 전주천 가을역에 내리실 분, 전주천으로 오세요
  • 김상미 객원기자
  • 승인 2007.09.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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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억새가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전주] 삽상한 가을바람이 분다. 바람, 구름처럼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언젠가 바랑하나 덜렁 걸머지고 길 떠나는 수행승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가뿐한 뒷모습의 자유를 닮고 싶을 때 나는 길을 떠난다. 

‘삶이란 잠깐 피었다가 사라지는 구름’이라는 생각이 길 위에 나를 올려놓더니 전주행을 종용했다. 아직 가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르다 싶은데 전주톨게이트에 들어서자 기와지붕에 내려앉은 햇살이 가을 편지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그 옆에 서 있는 가로수가 뒤집어지는 초록빛을 버리고 은은하게 깊어져가고 있다. 하늘에는 고추잠자리가 떼지어 다니며 가을을 수놓고 있다.

한소리, 한춤, 한지, 한식 등 ‘韓’브랜드를 지니고 있는 전주는 어디를 가도 느림의 미학을 잘 소화해내고 있다. 도심 번화가 빼고는 20년 전이나 별다를 것 없는 풍경들이라 낯설지 않다. 무엇보다 전주를 감싸고 도는 전주천의 맑은 물길이 눈길을 끈다. 한때 도시가 산업화 물결을 타면서 전주천 수질이 오염되어 마음을 안타깝게 하기도 하였다. 전주사람들이 2000년부터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더니 2~3급수 수준으로 정화되었다. 자연형 하천을 만들기 위하여 콘크리트 호안을 자연석 호안으로 바꾸고 물억새, 조팝 등을 심었단다. 지금은 맑은 물에만 사는 쉬리, 참종개, 참붕어, 몰개 등 30여 종의 물고기가 전주천으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다.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한벽당에서 바라본 전주천.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갈대숲이 휘돌아가며 물길을 감추더니 다시 냇가와 만난다. 아직 여름을 보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미역을 감으며 세상에서 가장 맑은 소리를 낸다. 맑은 소리에 마음을 비우고 나니 잊고 지냈던 어린 날의 동화가 떠오른다. 내 고향마을 풍경에도 마을을 휘감고 도는 실개천이 있었다. 친구들과 놀던 기억들이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이어졌고 시공을 넘나들다 추억 속으로 풍덩 빠졌다. 

다리가 되어주겠다고 손짓하는 징검다리를 건너려다, 왠지 미안한 것 같아 신발을 벗었다. 징검다리에 앉아 햇살이 자맥질하는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소나기> 속 주인공처럼 물장난을 하였다. 그런데 온종일 앉아 있어도 숨어서 쳐다보는 소년이 없을 것 같아 일어서고 말았다.

전주천은 얽히고설킨 인연의 끈을 달고 흐르고 있다. 어은다리 밑에는 장기판과 바둑판을 가운데 놓고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공간이다. 다가다리 아래 빨래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손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이 모여든다. 시간을 40년 전쯤으로 돌려놓은 듯한 느낌이다.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전주의 새벽을 여는 매곡번개시장.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전주천에서 신나게 미역을 감는 아이들.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옛날 전주의 새벽은 풍남문 종소리가 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매곡다리 번개시장이 연다. 

새벽바람을 맞고 나온 배추, 무, 포도, 사과, 오징어, 갈치…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 앞자락에 수세미를 소복하게 올려놓은 할머니를 보고 나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외할머니를 찾았다.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는 새벽마다 광주리에 푸성귀를 이고 나가 익산역 번개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래서인지 전주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훈김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주하면 무엇보다 맛의 고장 아니던가. 콩나물국밥, 오모가리탕, 전주비빔밥, 전주막걸리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풍성한 손맛을 보러 천변길을 따라 한벽교 아래까지 간다. 버드나무와 은행나무가 우거진 냇가에서 마술을 끓여내는 식당들이 한 줄로 서 있다. 은행나무길에는 한정식집들이 있는데 만원짜리 정식을 시키면 귀한 손님에게나 대접하는 전통주도 한 잔 따라 나온다. 그것이 전주 인심이란다. 전주에는 먹을 것이 많아서 꼭 배를 비워가야 한다. 

이제 배도 부르고 진짜 전주 여행길에 올라보자. 전주천은 수많은 작가들에게 창작의 원천이었다. 한옥마을에서 태어나 완산동과 다가동에서 자란 최명희의 장편소설 <혼불>과 미완성 장편소설 

<제망매가>, <만종>에는 전주천에 안겨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도대체 어느 동네 냇물소리가 그렇듯 귀밑을 긁적이게 할 만큼 은밀하단 말인가”라고 기억하고 있다. 전주천은 목적을 두고 걷기보다 <혼불>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자근자근 밟아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천변에는 어슬렁거려도 좋은 길과 해찰하며 빈둥거려도 좋은 길이 탄력 있게 놓여 있다.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덕진공원의 덕진연못을 가로지르는 연화교.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수세미. 2007년 9월. 사진 / 김상미 객원기자

전주 사람들은 아침에 다리를 건너가 사람을 만나고 저녁에 건너와서 술잔을 기울인다는 말이 있다. 다리 안쪽은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이고 바깥쪽은 베드타운인 셈이다. 한벽교, 남천교, 전주교, 매곡교, 서천교 다리는 물길이 나눠놓은 도시를 부지런히 연결해주고 있다.

사람은 물길을 닮는다고 하는데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전주 사람들의 속내를 닮은 듯하다. 완산교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순전히 냇물 탓이다. 벌써 완산교 아래로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이제 하루 종일 옆구리에 끼고 온 냇물을 놓아주어야 한다.

오늘따라 냇물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 천변에 있는 숲정이성당, 다가공원, 풍남문, 향교, 한옥마을, 경기전 등 대하소설책 같은 전주를 다 읽지 못하고 떠나려니 섭섭하다. 하지만 읽은 페이지 뒤에 책갈피 대신 추억을 키워두고 간다. 전주는 낯선 새로움과 통속적인 이야기가 혼재해 있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도시다. 아무래도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다리 아래 갈대숲 길에 부려놓은 시간을 찾으러 다시 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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