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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50] 섬 가을은 바다로 온다 충남 보령시 외연도
[김준의 섬 여행 50] 섬 가을은 바다로 온다 충남 보령시 외연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4.11.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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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보령] 속세와 인연을 끊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란 말일까. 가는 길이 그랬다. 안개로 첫 배는 출발도 못했다. 하루에 두 차례 오가는 뱃길이라 오후 배를 타려는 사람들은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섰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첫 배를 타려고 새벽같이 달려왔건만 첫 배는 고사하고 다음 배도 기다려봐야 할 상황이다. 얼마나 벼르고 별러서 세운 계획인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표를 취소하려는 사람을 만났다. 외연도 가는 길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아침 물때에 나간 해녀들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새참을 먹을 시간쯤 돌아왔다. 그릇마다 해삼이 가득하다. 숨비소리를 뒤로하고 바닷속 돌 틈을 얼마나 기웃거렸을까. 배에서 내렸지만 몸이 출렁거린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보물은 늘 주변에 있다

외연도는 충청도에서 가장 먼 바다에 있다.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육지에서 멀어 연기에 싸인 듯 보이는 섬이라 외연도라 불렀다. 그래서 중국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섬이다. 유인도인 외연도를 둘러싼 10여 개의 무인도가 있다. 이들을 ‘외연열도’라고 부른다. 이 중 횡견도, 오도, 황도의 독립 가옥들은 ‘간첩에게 은신처와 밥을 내준다’는 이유로 철거됐다. 김신조 등 무장간첩의 출현 이후에 취해진 조치였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옛날에는 고구마를 심고 보리를 갈아서 식량을 했지만 지금은 파, 배추, 상추를 심는다. 식량은 뭍에서 한 번에 구해오면 되지만 채소는 시시때때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외연도는 동서로 봉화산과 망재산이 있다. 그리고 마을 뒤 당산에는 상록수림이 우거져 있다. 해안 이름을 보면 사학금, 돌삭금 등 ‘금’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금은 ‘구미’의 준말로 ‘바닷가나 강가의 후미지게 휘어져 물이 뭍으로 오목하게 들어온 곳’을 말한다. ‘곶’의 반대말이다. 외연도는 파도와 바람이 들이치는 곳은 크고 작은 몽돌이 발달해 미역, 김, 톳이 잘 자란다. 자연스럽게 해삼, 전복, 홍합의 서식지가 되었고, 물고기들이 머물렀다. 어민의 살림살이를 풍요롭게 해주고, 낚시꾼이 즐겨 찾는 곳이다. 돌삭금, 작은명금 주변 큰 바위에 전복과 해삼의 양식장임을 알리는 표시를 해두고 외지인이 함부로 채취하는 것을 막고 있다. 이를 위반할 때는 어촌계에서 제명하고 외부인은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경고문도 있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외연도의 당숲은 건강하고 영험했다. 외지인이 쉽게 들어갈 수도 없고,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오래된 나무는 쓰러지고 다시 작은 싹이 돋아나 숲이 유지되었다. 바다에서 나는 것이 소홀해지자 섬사람들은 하나둘 뭍으로 향했고, 당숲은 여행객을 위한 볼거리로 바뀌었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서해 먼 섬의 살림살이는 밭농사보다는 바다농사에 의지한다. 1970년대까지 외연도의 바다농사도 김과 미역이 중심이었다. 고기를 잡기도 했지만 외연도 사람들보다 어장에 일찍 눈뜬, 돈이 있는 원산도 사람들이 선점했다. 이렇게 주변 어장을 약삭빠른 이웃 섬에 빼앗겼으니 갯바위의 돌김과 돌미역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섬에서 돈을 마련하는 유일한 자원이었다. 김과 미역을 뜯는 시기는 마을에서 정했다. 몰래 채취하다 들키면 ‘동네 망신’을 당하고, 그해 채취권이 박탈되는 처벌도 뒤따랐다. 당시 주민들의 주식은 고구마와 보리였다. 춘궁기에는 칡을 캐고 뿌리가 달콤하다는 원추리도 먹었다. 고사리, 취, 더덕, 도라지도 남아나지 않았다. 미역과 김이 나오면 광천장에 나가 쌀과 생필품과 바꾸었다. 지금처럼 대천으로 생활권이 바뀐 것은 방조제가 막히고 쾌속선 뱃길이 열리면서였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찬 바람이 불자 해녀들은 해삼 대신 전복 바리를 위해 바다로 나섰다. 북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바다농사도 마무리해야 한다. 다시 봄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봉화산에 오르다
외연도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봉화대로 향했다. 봉화대는 외연도에서 가장 높은 봉화산에 위치해 있다. 외연도는 서해의 중간쯤 있고 뭍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들을 관찰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봉화는 어청도에서 받아 녹도와 원산도를 거쳐 충청수영이 있는 오천면의 망해정으로 이어졌다. 외연도의 봉화대는 왜적을 감시하고 바다 건너 중국을 경계하는 역할을 했다. 또 자주 출몰하던 열강의 배를 살피기도 했다.

봉화산에는 고려 때 축조했다고 전해지는 봉화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봉화산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산길이 험해 오르지 못했는데 그새 등산로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중간쯤 올랐을까. 10여 마리의 염소들이 길을 막고 시위를 벌였다. 그러다 후다닥 숲속으로 사라졌다. 숲을 헤치고 보니 천 길 낭떠러지였고,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렸다. 다음날 민박집 주인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 당산으로 넘어 가는 길목에서 야영을 하던 여행객이 작은명금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른 새벽인데 낚싯배가 굉음을 내며 다가와 노랑배 근처에 낚시꾼을 내려놓고 매바위로 향했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몇 년 전이었다. 섬에 도착하니 초등학생들이 모두 깨끗한 옷을 입고 가방을 둘러멘 채 줄을 섰다. 뭍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마저 상기되어 있었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관광객에게 당집도 열어야 할까
아침을 먹고 당산에 올랐다. 당숲 안에는 전횡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 그는 중국 제나라 왕의 동생이었다. 제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서자 전횡장군은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외연도로 들어왔다. 한나라에서 전횡장군을 찾아와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고 목숨을 끊었고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전횡장군이 섬에 머무르며 주민들에게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단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대보름이면 주민들은 400년을 이어온 전통대로 살아 있는 소를 잡아 제를 지내고 있다.

학교를 지나 마을 뒤 상록수림으로 접어들었다. 동백나무 등 상록활엽수와 그보다 훨씬 키가 크고 우람한 팽나무 등 낙엽활엽수 사이 흙길을 걸었던 옛 생각에 기분마저 상쾌해진다. 어라. 그런데 이게 뭐람. 나무데크와 계단으로 오솔길과 흙길을 화장하듯 덮어 놓은 게 아닌가. 개발은 ‘가고 싶은 섬’을 가고 싶지 않는 섬으로 둔갑을 시킬 수도 있겠다. 그것도 엄청난 돈을 써가며. 탐욕스런 인간의 냄새가 신성한 당집까지 파고들었다. 한국전쟁 직후 민속학자들이 왔다가 주민이 허락하지 않아 당숲에 접근도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신성시했던 곳이다. 육지의 모 인사가 당산 주변에 동백나무를 벌목했다가 집안이 멸족했다는 말도 전해 오는 곳이다.


숲이나 갯벌이나 바다나 가장 무서운 적은 인간이다. 마을 옆에 신성한 공간을 두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만 아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10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고사목과 그 사이로 새로 태어난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자연천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고사목은 물론 주변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후계목 조성과 식생정비’을 알리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어른 주먹보다 더 큰 외연도 해삼은 전량 중국으로 수출된다. 중국에서도 외연도, 호도, 죽도 등 충남 먼바다에서 잡은 해삼을 최고로 쳐준다. 해삼은 바다농사 중에서 가장 소득이 높다. 2014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바다를 건너 찾아오는 섬 가을
지난 6월 어느 날이었다. 기나긴 여름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선창으로 어슬렁거리다 환한 불빛을 보고 찾아가 보니 열댓 명의 해녀들이 해삼을 손질하고 있었다. 해삼을 보니 이생진 시인의 시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잔’이 생각났다. 몇 마리 사려고 물었더니 어머니 한 분이 슬며시 내장을 건네며 해삼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해삼을 자주 먹었지만 내장을 먹어본 기억은 없다. 저녁까지 먹은 터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지만 귀한 것이라며 책임자 몰래 내밀었다. “일본놈들이 좋아하는 것이야”라는 말도 덧붙였다. 후루룩 국수를 먹듯 입안에 넣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맛인가. 멍게보다 훨씬 강한 멍게 맛이라면 이해할까. 의외였다. 해삼 내장으로 젓갈을 만들기도 하고, 얼려서 보관했다가 활어와 함께 단골들에게만 내준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외연도의 가을은 삼치와 함께 깊어 간다. 선창에 10여 척의 배가 긴 장대를 세우고 끌낚시 채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다. 굵은 대나무에 묶은 긴 로프에 공갈낚시를 매달고 달리면 삼치들이 덥석 무는 습성을 이용한 어법이다. 줄의 긴장도에 따라 삼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작은 것은 ‘고시’, 중간은 ‘야나기’, 큰 것만 ‘삼치’라 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삼치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생선이다. 대청도 일대에서 배 두 척이 왔다 갔다 하면서 끌낚시로 삼치를 유인하고 있다. 삼치는 뱃살이 최고이며 등살은 퍽퍽해 하품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말린 삼치는 다르다. 꾸덕꾸덕 마른 삼치를 구워서 양념장을 올리면 하품으로 취급되던 등살에 가장 먼저 손이 간다. 전복을 잡던 제주 해녀들도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내년 봄꽃과 함께 다시 섬을 찾을 것이다. 바다가 주는 해삼바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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