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서울] 가끔은 문화유산 속에 또 다른 문화유산이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전혀 관계가 없는 문화유산들이 생뚱맞게 붙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런 만큼 기구한 사연이 담겨 있기도 하다. 고려 최고의 석탑으로 꼽히는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은 원주의 법천사가 아니라 서울 경복궁에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이 법천사 대신 경복궁에 자리잡은 사연은 무엇일까?
경복궁의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는 수문장 교대식이 펼쳐지는 너른 광장이 있고, 궁궐의 화려한 유물을 볼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있고, 고려시대 최고의 석탑으로 꼽히는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이 있다. 이중 수문장 교대식은 시간만 맞으면 누구라도 볼 수 있고, 국립고궁박물관은 언제나 수행평가 중인 아이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은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인 외진 장소에 자리잡고 있다. 나만 해도 경복궁은 수십 번, 국립고궁박물관을 여러 번 찾았으나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은 이름 그대로 원주 법천사에 있던 고려 지광국사의 현묘탑이다. 지광국사는 고려 전기의 이름난 고승으로 현종과 문종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문종은 지광국사를 왕사와 국사로 임명했단다. ‘왕사’란 왕의 스승, ‘국사’란 국가의 스승을 일컫는 말이다. 현묘탑(玄妙塔이란 탑의 이름, 즉 탑호(塔號)다. 왕의 무덤에 능호를 붙이듯, 고승의 사리를 모신 탑에는 탑호를 붙였다. 조선 성종의 무덤 이름이 선릉이듯 지광국사의 탑은 현묘탑으로 불리는 것이다.
경복궁에 숨어 있는 고려 최고의 석탑
생전에 영광스런 삶을 누렸던 지광국사의 현묘탑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탑의 받침대에 해당하는 기단부에는 여러 단을 두어서 꽃과 상여, 신선, 장막 등으로 장식했고, 탑의 몸체에는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내리고 드림새 장식을 했다. 지붕과 꼭대기에도 불보살상, 봉황, 연꽃 등의 화려한 무늬를 새겨 넣었다. 한눈에도 우리나라 석탑의 대명사인 다보탑과 석가탑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닌 듯 보인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국보 제101호로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꼽혔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 최고의 석탑이 경복궁과 국립고궁박물관 사이에 자리잡게 된 사연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원래 강원도 원주시 법천사 터에 있던 지광국사현묘탑을 제자리에서 옮긴 것은 일본인이었다. 1912년 한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되어 3년 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진 것이다. 남의 나라 귀중한 문화재를 밀반출한 것도 나쁘지만, 기껏 되돌려 주면서 원래 자리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 그것도 눈에 잘 뜨이지도 않는 귀퉁이에 세워놓은 것은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지광국사현묘탑의 탑비는 여전히 원주 법천사에 남아 있으니, 졸지에 탑과 탑비가 이산가족 신세가 된 것이다. 경복궁을 보면서 고려 최고의 석탑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역시 문화유산은 처음 세워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제자리를 찾은 북관대첩비
지광국사현묘탑 옆에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의병이 왜군을 격파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북관대첩비가 있다. 진품은 함경북도 김책시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그런데 이곳에 북관대첩비의 모조품이 서게 된 것에는 지광국사현묘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연이 있다. 원래 북관대첩비가 있던 곳은 함경북도 길주였다. 그런데 러일전쟁 당시에 이곳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이 비석을 알아보고는 자신들의 패배를 기록했다 하여 일본으로 보내버렸단다. 그후 북관대첩비는 일본 황실에서 보관하다가 야스쿠니신사로 옮겨졌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는 승전비가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이 안장된 야스쿠니신사로 가다니. 이 사실을 안 민간단체와 한국 정부가 반환 노력을 기울여서 결국 2005년에 비를 돌려받았고, 남북 협의에 따라 이듬해 북한에 인도되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지광국사현묘탑도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