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여행스케치=제주] 우리나라에서 가장 둥근 바다를 가진 곳이 어디일까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애월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해나 서해, 남해 어느 바닷가를 가보아도, 애월 앞 바다만큼 둥근 바다를 보지는 못했다. 시름이 있거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날이면 애월리로 향한다. 그러면 팽팽히 당긴 활 시위 같은 둥근 수평선을 만나게 된다.'
햇살 좋은 날, 달의 난간인 애월리(涯月里)로 향한다. 애월의 바다를 동해와 비교해보면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동해와 애월 바다는 탁 트인 바다이다. 걸림이 없다. 색깔 또한 맑다. 시퍼런 물색이 몇 계단을 이루고 있다.
바다는 깊은 곳일수록 짙푸른 색을 띤다. 에메랄드를 뿌려놓은 듯 빛나는 바다. 이런 점들을 공통점으로 본다면, 다른 점도 있다. 동해의 수평선이 직선이라면 애월의 수평선은 곡선이다. 단순한 곡선이 아니라, 분명한 반원을 그리고 있다. 또 동해의 수평선이 멀고 막막하다면 애월의 수평선은 금방이라도 끝이 만져질 듯 가깝다. 처녀애의 팽팽한 엉덩이 같은 애월 바다의 수평선은 가슴 속으로 싱싱한 기운을 밀어 넣는다.
애월로 가는 길은 내로라하는 여행가들이 이 땅 최고의 해안도로로 꼽는 곳이다. 내도를 지나 하귀에 이르면, 누군가가 팽팽히 시위를 당기는 듯 바다는 점점 둥글어진다. 해안으로 달려 나온 용암이 그대로 굳었을 바위 모양은 기묘하기 그지없다. 상상 속 동물들을 조각해놓은 것 같다. 어떤 바위는 매달려 있고, 어떤 바위는 우뚝 서 있다. 갑자기 정지된 화면 속 인물들처럼 금방이라도 바다를 향해 뛰어들 것만 같은 바위들 사이에서 파도가 허연 거품을 문다.
제주는 화산섬이라서 바닷가 쪽에 샘이 많다. 그래서 많은 마을이 바닷가에 몰려 있다. 바다와 만나는 곳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마을 공동 우물로 쓰기도 하였고, 목욕물로 쓰기도 하였다. 돌멩이를 높이 쌓아둔 곳이 목욕탕으로 썼던 곳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백록담에 떨어진 빗방울이 해안가 샘에 솟기까지는 200년이 걸린다고 하니, 도시의 수돗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올레(골목) 길을 걸어보자. 내가 생각컨대, 어느 지역의 사람도 제주 사람만큼 돌담을 잘 쌓지는 못할 것이다. 높은 돌담이 외줄로 쌓여진 것을 보라. 어떤 곳에는 사람 키의 배쯤 되는 높이의 돌담이 있다. 돌담의 틈은 성글어서 집 안의 모습이 다 보인다. 살아서 돌담 속에 살다가 죽어서 돌담 속에 묻히는 제주 사람들, 제주는 담의 문화다. 휘어진 돌담길을 굽어 들어가면, 제주의 정낭(제주의 대문, 세 개의 나무기둥을 이용해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려준다)이 주인의 행방을 말해준다.
해풍을 안고 바다로 향하면, 얕은 바다에 돌담을 쌓아둔 것이 보일 것이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해 고기를 가두어 잡는 일종의 돌 그물인 ‘원담’이다. 돌과 함께 사는 제주 사람들은 바다에도 밭을 만들었다. 지금은 옛날처럼 많이 사용되지 않지만 원담은 제주의 생활방식을 잘 알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해질녘이면 원담 안에서 노을이 진다. 이때쯤 하늘을 보라. 노을을 받아 노을보다 더 곱게 빛나는 까치 노을을 볼 수 있으리. 까치 노을의 비늘 하나쯤을 빌려 새로이 만난 한 해를 헤엄쳐 갈 빛나는 신념 하나쯤 세워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