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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김준의 섬 여행 38] “미역섬, 밤새 안녕할까?” 전남 진도군 맹골군도
[김준의 섬 여행 38] “미역섬, 밤새 안녕할까?” 전남 진도군 맹골군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3.10.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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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진도] 맹골군도는 맹골도를 비롯해 등대가 있는 죽도와 미역섬인 곽도까지 유인도 세 곳과  몇 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외로워서일까. 사람 사는 세 섬이 큰 섬에서 나와 마실 길을 나서듯 먼 바다에 나란히 있다. 하루에 딱 한 번 배가 오가는 낙도다. 얼마 전까지 이틀에 한 번 배가 다녔으니 매일 다니는 정도면 정말 교통이 좋아진 것이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바닷속 미역이 뭍으로 올라왔다. 밥상 위로 올라오려면 작은 섬사람들의 수많은 손길을 거쳐야 한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섬마을 가족들이 모두 모인 이유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친 바다, 바다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 그 바다에 몸을 실었다. 진도대교를 건너 다시 반 시간을 숨 가쁘게 달려 닿은 곳은 팽목항이다. 지금은 진도항으로 이름을 바꾸어 서남해안을 대표하는 거점항으로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명절 뒤끝이라 그런지 섬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단풍놀이는 이르고, 여름휴가에 곧바로 이어진 추석 몸살을 추스르는 중일까. 명절에 뭍으로 나갔다 병원까지 들러 여유롭게 귀향하는 노인들도 한둘 있었다. 하조도 어류포항(창유항이라고도 부른다)에서 내려 맹골도로 가는 배를 기다렸다. 

구한말, 맹골도에 사는 이씨 성을 가진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수려한 사람이 미역을 짊어지고 경남 하동으로 도부를 갔던 모양이다. 미역을 팔다 날이 저물어 머문 곳 주인이 하필 과부댁이었다. 이 씨가 맘에 들었는지 과부는 어디서 왔느냐며 친절하게 대했다. ‘맹골’에서 왔다고 하자 큰 고을에서 온 장사꾼으로 알고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따라나섰다. 도착해서 보니 물선 외딴섬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마을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씨는 미리 주민들에게 “누구든지 마누라를 육지로 건네주면 내 원수가 될 줄 알아라”라고 단단히 일러놓은 뒤였다. 할 수 없이 하동댁은 이 섬에서 아들딸 낳고 정착해 잘 살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섬에서 사람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섬사람들이 미역바위로 향했다. 1년 농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몫을 챙길 수 없기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선 최 씨.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맹골도는 매년 미역 철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들은 물론 시집간 딸들도 고향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것이 다반사다. 김길복(1941년생) 선생 집에도 아들딸과 손자들이 모두 모였다. 아이들에게는 선창이 해수욕장이다. 금세 온몸이 새까맣다. 그래도 마냥 즐겁다. 맹골도만 아니라 자연산 돌미역으로 생활하는 진도군 조도면 외딴 섬마을에는 미역 철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향을 떠난 섬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밤새 가닥을 만든 미역을 다음 날 아침 마당에 널었다. 

진도미역은 일찍부터 진상품이었고 ‘진도곽’이라 하여 최고가를 받았다. 맹골군도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동안 해남 윤씨 집안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매년 보리, 미역, 마른고기, 전복 등을 세금으로 바치기도 했다. 나중에는 진도 십일시조합의 소유가 되었다가 주민들의 손으로 돌아왔다.

“갱본 가요”
곽도는 맹골도에서 1km 거리에 있는 면적 15ha 바위섬이다. 일명 미역섬이라고 한다. 어장 배도 없고 인적도 드물어 갈매기조차 머물지 않는 섬이다. 맹골도에 사는 어부의 도움을 받아 미역섬에 들던 날은 바다도 조용했다. 그런데 죽도와 맹골도 사이를 빠져나오자 사정이 바뀌었다. 울렁울렁 크게 요동치더니 급기야 파도가 이물을 넘어 뱃전으로 쏟아졌다.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그런데도 어부는 이 정도는 너울에 불과하다며 웃었다. 

곽도는 한때 40여 명이 거주했다. 지금은 9가구에 15명이 살고 있다. 실제로 섬에서 겨울을 나는 가구는 두세 가구에 불과하다. 몇 년 전 이른 봄, 곽도에 들렀다 운 좋게 세 분의 할머니를 모두 만났다. 이번에는 집집마다 사람이 있었다. 먼저 강개역 할머니 댁을 찾았다. 곽도에서 가장 건강한 할머니다. 사람이 그리웠는지 첫 만남에도 반가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어디서 왔소. 어디 방송국이오? 내가 자꾸 잊어버려.” 지난번에 만났다는 말에 웃으셨다. 방송에도 몇 번 출연하셨다. 해남에서 시집온 할머니는 팔순이 넘었지만 곽도에서 제일 큰 밭을 일구며 사신다. 미역 채취를 위해 온 시집간 딸과 손자가 있었다. 할머니는 돌담에 숫돌을 끼워 익숙한 솜씨로 낫을 갈았다. 딸과 손자가 미역 작업을 할 때 사용할 도구다.

누군가 “갱본 가요”라며 소리를 쳤다. 방송도 필요 없다. 주민들은 골목을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갱본 가요.” 그렇게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들 구명조끼를 입었다. 숲길을 지나자 거친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렸다. 물이 빠지면 갯바위에 붙은 미역을 재빨리 한 주먹 베고 올라왔다. 젊은 남자들이 몇 주먹 더 베려고 파도와 맞서다 몇 차례 바다에 휩쓸리기도 했다. 주변에서 끌어내주거나 줄을 던져 잡아주었다. 채취한 미역을 마을로 옮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코가 땅에 닿을 듯 미역을 짊어지고 가파른 해안길과 숲길을 지나 마을까지 옮겨야 한다. 채취한 미역을 나누는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 우선 채취한 미역을 똑같이 8개의 더미로 나누어놓는다. 그리고 신발 한 짝을 벗어 바구니에 담아서 잘 흔든 다음 무작위로 뽑아서 미역 더미에 던진다. 미역 더미의 주인은 그렇게 결정된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왁자지껄하던 등대지기(항로표지관리원) 관사는 터만 남았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등대도 외롭다
사람들은 섬에 가면 으레 맛있는 회가 기다리고 있는 걸로 착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활어는 잡는 대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위판을 하거나 활어차로 넘겨야 한다. 선어도 집에서 먹거나 자식들에게 줄 것이 아니라면 팔아야 한다. 예약해놓지 않으면 섬에서 아예 구경도 못하기 십상이다. 큰 섬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에는 횟집이나 식당이 있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물때와 계절에 따라 들쑥날쑥하고, 관광객의 수요도 꾸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골군도에서 생선회는 기대도 안 했다. 게다가 미역 철이 얼마나 바쁜가. 밥이라도 제때 찾아 먹으면 감지덕지다. 

이틀째 되던 날 밤 저녁을 먹고 선창에 나와 죽도등대에서 비추는 불빛과 눈을 맞추고 있는데 목포 M방송국의 김 PD가 죽도에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죽도로 건너갔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모처럼 가족들이 모였다. 새벽같이 갯가에서 고둥과 삿갓조개를 따다 된장국을 끓였다. 빨래가 꾸덕꾸덕 마르는 사이 구수한 냄새가 스멀스멀 선창으로 몰려온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팔순 어머니는 돌담 아래 거친 바람을 피해 자란 질경이를 뽑아 말린다. 2013년 11월 사진 / 김준 작가

죽도등대가 처음 불을 밝힌 것은 1907년이다. 당시엔 석유 백열등이었다. 우리나라 최초 등대인 팔미도 등대보다 4년 늦지만 목포 해역에서 가장 빠르다. 일본의 조선과 중국 진출에 있어 그만큼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동중국해를 오가는 배는 맹골 바다를 지나야 한다. 그 길목에 등대가 있다. 한때 항로표지관리원만 7명이나 되었다. 주민도 15가구, 130여 명이 살기도 했다. 지금은 겨울철에 10명도 되지 않는 할머니들이 섬을 지키고, 등대는 무인으로 바뀌었다. 

곽도와 마찬가지로 몇 년 전 죽도에 들렀을 때와 많이 달라졌다. 새로 지은 펜션형 집과 도시형 집이 눈에 띄었다. 죽도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등대도 할머니도 아닌 자연산 광어였다. 어제 김 PD가 전화로 인공호흡을 해서라도 살려놓겠다던 녀석은 밤새 기다리지 못해 죽고 말았다며, 새벽에 다시 낚시로 잡아온 놈이 족히 60cm는 넘어 보였다. 몇 점씩 집어 된장을 듬뿍 발라 입안에 몰아넣었다. 모름지기 회는 이렇게 먹어야 맛이 있다. 그러나 횟집에서 이렇게 먹었다간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제대로 받는다. 

‘맹골’은 바다가 험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진도에는 ‘울돌목’, ‘거차도’ 등 거친 바다를 일컫는 지명이 많다. ‘맹골’은 그중 으뜸이 아닐까. 미역이 없었다면 사람이 살 수 있었을까. 사람보다 미역이 먼저 자란 섬이다. 거친 물살을 이겨내고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랐으니 얼마나 몸을 흔들어댔겠는가. 맹골 사람들을 닮았다. 그래서 명품 반열에 오를 수 있었겠지. 아픔 없이 어떻게 그 자리를 얻었겠나. 찬 바람 일면 파도가 높아질 것이다. 올해도 미역섬은 안녕하겠지.


INFO.
팽목항에서 오전 9시, 1일 1회 운항한다. 
11번째 섬인 맹골도까지 3시간 30분 소요. 
운임 어른 1만3600원, 학생 1만22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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