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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권다현의 아날로그 기차 여행] 무수한 사연을 품은 폐역, 익산 춘포역
[권다현의 아날로그 기차 여행] 무수한 사연을 품은 폐역, 익산 춘포역
  • 권다현 여행작가
  • 승인 2020.06.10 0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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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차역
대장도정공장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소설 '1938년 춘포' 속 에토가옥을 엿보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차역으로 꼽히는 익산 춘포역.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익산] 기름진 평야를 자랑하는 전라도엔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기차역이 유난히 많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차역 중 가장 오래됐다는 익산의 춘포역도 그중 하나다. 마을엔 일본인들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했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공간이 품은 무수한 사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춘포역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차역으로 꼽힌다. 겹겹이 쌓인 시간만큼 공간이 품은 사연도 다양하다.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를 만날 수 있는 대장도정공장과 에토가옥, 소작쟁의와 4.4만세운동 등 춘포 사람들의 뜨거웠던 저항을 기록한 낡은 신문과 빛바랜 사진, 여기에 춘포역사 내부에 들어서면 전주와 이리(지금의 익산)로 통학하던 학생들의 풋풋한 추억까지 더해진다. 

이름까지 바뀐 사연 많은 기차역
춘포역의 원래 이름은 ‘오오바역(おおばえき)’이었다. 물론 이는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고, 조선인들은 해방 후부터 그 뜻을 따서 대장역(大場驛)으로 불렀다. 이름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대장역 주변은 사방이 드넓은 평야로 이뤄졌다. 바로 옆으로 만경강의 풍성한 물줄기까지 흐르니 쌀농사를 짓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이 비옥한 땅을 일본인들이 가만히 두었을 리 없다.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잘 여문 쌀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춘포역 내부에 역무원 유니폼과 모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과거 춘포역 전경과 옛 열차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흑백사진으로 남은 많은 이들의 추억.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서글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대장역이란 이름은 결국 1996년 춘포역(春浦驛)으로 바뀐다. 춘포는 이 지역의 옛 이름으로, 조선 중기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춘포란 지명이 기록돼 있다. 그보다 120여 년 후에 발간된 <동국여지지>에는 춘포산이 등장하는데, 이는 지금의 봉개산을 뜻한다.

춘포를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봄개, 즉 봄 나루란 의미다. 봄개가 발음하기 편하게 바뀌면서 봉개산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기차역 이름만 바뀐 게 아니다.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행정구역명도 대장촌리에서 춘포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일부에선 19세기 후반부터 대장촌이란 지명을 사용했고, 일본인들이 자리 잡으며 ‘큰 농장이 있는 마을’로 의미가 바뀌어 오해가 빚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거나 이 작은 기차역이 이름까지 바뀌며 100년 남짓한 세월을 견뎠다니 애처롭고 쓸쓸한 마음이 든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춘포역의 기념 스탬프.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INFO 춘포역
주소
전북 익산시 춘포면 춘포1길 17-1

춘포역의 역사는 한국철도의 역사
춘포역은 1914년 처음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엔 기관차가 작고 궤도가 좁은 협궤철도였다. 건설비용이 저렴한 협궤철도는 전주와 익산, 군산을 잇는 근거리 운행에 적합했다. 열차는 승객들이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만큼 작아서 ‘꼬마열차’로도 불렸다.

춘포역 광장에 자리한 마을 기차에는 1917년 만경강 목교를 달리던 협궤열차의 사진이 실린 신문 기사도 전시돼 있다. 특히 인근 지역 학생들이 춘포역을 통해 전주와 익산으로 통학하면서 기차역은 아침저녁으로 북적였다. 한창나이의 청춘들이 매일같이 꼬마열차에서 무릎을 맞대고 있었으니 풋풋한 로맨스도 꽃피었을 법하다. 소설 <1938 년 춘포>는 이를 배경으로 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된 춘포역사.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놀이 공간으로 꾸며진 춘포역 마을기차.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일본이 협궤철도를 국유화하면서 1929년 춘포역도 지금과 같은 열차 궤도로 확장됐다. 광복 후에는 만경강이 모래찜질로 유명세를 얻으며 하루에 수백 명이 춘포역을 드나들었다. 1970년대엔 어린 여공들이 춘포역을 이용해 익산의 섬유공장으로 출퇴근하곤 했다.

그러나 도로가 발달하면서 춘포역은 점점 사람들의 필요에서 멀어졌다. 대장역에서 춘포역으로 이름이 바뀐 이듬해, 보통역에서 간이역으로 격하된 춘포역은 2004년 역무원이 근무하지 않는 무배치간이역이 됐다. 2007년엔 결국 폐역이 되면서 더 이상 기차가 멈춰 서지 않는다. 철로도 모두 거둬내 역사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러나 춘포역 뒤로 새롭게 놓인 기찻길엔 고속열차가 과시하듯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그 변화무쌍한 세월에도 춘포역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섰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은 대장도정공장 전경.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대장도정공장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춘포역을 등지고 마을 쪽으로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의 흔적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대장도정공장과 에토가옥이 그렇다. 대장도정공장은 춘포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호소카와농장의 도정공장이다.

정미소가 아닌 도정공장이란 간판이 걸린 이유는 그 내부에 들어서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춘포의 비옥한 땅과 춘포 사람들의 땀으로 키워낸 쌀은 이곳에서 한 차례 도정을 거치며 부피를 줄였다. 군산항으로 더욱 많은 쌀을 상하지 않고 보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공장 내부는 현재까지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가 놓인 대장도정공장.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현 대장도정공장 대표는 “호소카와 가문은 일본에서도 명문가로 꼽힌다”며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 도정공장 주변에 직원들이 이용하는 병원까지 운영될 만큼 규모가 대단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공장을 청소하다 일본어가 적힌 목재 등 다수의 일제강점기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며 “춘포 지역과 역사를 같이 하는 공간인 만큼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한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대장도정공장의 낡은 간판.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INFO 대장도정공장
주소
전북 익산시 춘포면 춘포4길 66-6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일본식 가옥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에토가옥.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소설 <1938년 춘포> 속 에토가옥
대장도정공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에토가옥(일본인 농장가옥)이 자리한다. 호소카와농장에서 일하던 에토라는 사람의 집이라 전해지는데, 그 소유자에 대해선 이견도 많다. 어쨌든 1940년대에 지은 일본식 가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춘포역과 더불어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됐다.

현재 주민이 거주하는 관계로 군산의 히로쓰가옥처럼 관람시설로 관리되지는 않는다. 주인의 사정에 따라 개방되는데 낮 시간에는 대부분 외부 관람을 허용해준다. 앞서 언급했던 소설 <1938년 춘포>의 여주인공 ‘미유키’가 이곳 주택에 살고 있는 대지주의 딸로 등장한다. 그만큼 규모도 크고 장식적인 요소도 많은 집이다.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대장교회 옛터에 세워진 비석. 사진 / 권다현 여행작가

춘포역 광장에도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자료들이 남아있다. 1932년 춘포 사람들이 중심이 됐던 소작쟁의를 보도한 신문기사와 4.4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대장교회(옛 용연교회) 신도들의 사진이 전시된 것.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익산의 남부시장 인근에서 시작된 4.4만세운동은 두 팔이 잘리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던 문용기 열사의 순국으로 잘 알려진 항일운동이다.

대장교회는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창고를 예배당으로 개조해 ‘창고교회’로 불리던 곳으로, 대장도정공장 옆에 옛터를 알리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INFO 에토가옥
주소
전북 익산시 춘포면 춘포4길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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