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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김준의 섬 여행 35] 바람의 섬, 밭틀길을 걷다 제주 가파도
[김준의 섬 여행 35] 바람의 섬, 밭틀길을 걷다 제주 가파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3.06.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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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제주] 제주에는 바람 자는 날이 드물다. 그런데 가파도로 향하던 날은 바람이 잤다. 게다가 날씨도 화창했다. 바람이 잔다고 바다가 조용한 것은 아니다. 잔잔한 수면과 달리 바닷속은 거칠다. 모슬포와 가파도 사이가 그런 곳이다. ‘허성장골’이라 부른다. 전복이 많지만 거친 물살 때문에 조금에 상군 잠녀들만 물질을 할 수 있다. 가파도 잠녀들은 그곳을 ‘청와대’라 부른다. 검푸른 바다의 유혹에 빠져들 즈음 배가 상동마을 포구에 도착했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가파도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산을 볼 수 있는 섬이다. 설문대할망이 치마로 흙을 담아 날라 만들었다는 한라산의 실루엣이 허성장골 바다와 잘 어울린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바람을 막고을 들이다

가파도는 솥뚜껑마냥 생겼다. 그래서 더푸섬이라고도 불렀다. 나중에는 개도(蓋島), 개파도(蓋派島), 가파도(加波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라 했다. 가파도라는 명칭은 1481년(성종 12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처음 기록되었다. 가파도의 관문은 상동마을 ‘시리 포구’다. 말과 소를 싣고 갔던 곳이라는 의미다. 큰 여객선이 다니기 전에는 하동마을 선창이 가파도의 나들목이었다.

1750년(영조 26년) 가파도에 국영 목장이 설치되었다. 진상용 흑우 50마리를 방목하고, 소를 키우기 위해 40여 가구의 입도를 허가했다. 하동마을 선창에 ‘가파도 개경 12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865년(고종 2년) 대정읍 모슬포 상모리, 하모리에 살던 경주 이씨, 진주 강씨, 제주 양씨, 나주 나씨, 김해 김씨 등 40여 명이 입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섬에서 수많은 고인돌과 조개무지가 발견되어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상동마을 입구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청보리축제와 황금연휴가 겹쳐 작은 섬에 사람들이 빼곡했다. ‘게엄주리코지’로 향했다. 게엄주리는 ‘갯강구’, 코지는 ‘곶’의 제주어다. 갯강구가 많은 바다밭이다. 예전 그곳에서 보았던 돌담이 안녕한지 궁금했다. 신안이나 진도에서 볼 수 있었던 ‘우실’과 꼭 닮았다. 마을 숲이나 흙, 돌 등으로 쌓은 담을 일컫는 우실은 바람과 모래를 막았다. 제주의 환해장성처럼 가파도를 둘러싼 돌담은 비바람이 불 때 말들이 담벼락에 붙어 서로 의지하고 비와 바람을 피하도록 일부러 쌓은 담이다. 그런데 돌이 현무암이 아니다. 단단한 몽돌이다. 거친 파도와 바람에 모난 돌이 없다. 둥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작은 섬사람을 닮았다. 섬 안에는 내 밭, 네 밭을 구분 짓는 밭담과 묘지 주변에 쌓은 밭담, 그리고 마을에 울담이 있다. 제주도의 축소판이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소라와 전복은 물질을 해야 딸 수 있지만 가사리와 미역은 물이 빠진 갯바위에서 뜯는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밭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뒤시여’로 가는 길에 미역을 베는 주민을 만났다. 길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물질을 하다 갯바위에 붙은 미역을 낫으로 베고 있었다. 제주에서는 뭍에서 곡식이나 풀을 베는 낫을 ‘호미’라고 한다. 특히 물속에서 해조류를 채취할 때 쓰는 낫을 ‘종개호미(게호미)’라 한다. 제주에서 미역은 아주 특별하다. 보리와 함께 가파도 사람들의 식량이었다. 그래서 미역이 다 자랄 때까지 채취를 금했다. 음력으로 3월 보름 무렵이면 제주 미역이 다 자란다. 이때 비로소 미역을 채취한다. 이를 ‘메역해경’이라 했다. 미역을 채취하는 날이면 은퇴한 해녀와 모든 가족이 바다로 나갔다.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 온 가족이 나가서 미역을 베었다.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오직 ‘게호미’ 하나였다. 미역 한 가닥을 ‘한 락’이라 했다. 열 락이면 ‘한 뭇’이고 열 뭇이면 ‘한 뭉치’라 했다. 옛날에는 한 뭇의 가격이 보리쌀 몇 말을 살 정도였다. 

그렇게 귀한데 왜 메역밧(미역밭)에서 혼자 미역을 베고 있을까. 갯바위에는 톳이 무성했지만 오직 미역만 베고 있었다. 왜 그럴까. 그 의문은 하동마을을 지나 마라도가 보이는 ‘큰아끈여’ 입구에서 만난 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풀렸다. 이곳에서 대여섯 명의 주민이 전복 껍데기를 이용해 가사리를 뜯고 있었다. 가파도 사람들에게 미역이 더 이상 상품이 되지 않는단다. 뭍에서 들어오는 양식 미역 때문이다. 대신 소라와 전복이 주 소득원이다. 최근에는 올레꾼들에게 팔기 위해 미역을 뜯는 사람이 있다. 그럼 왜 톳은 베지 않을까. 톳은 아직도 상품성이 있어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미역은 가파도 사람에게 특별했다. 자급자족을 할 수 없는 섬에서 쌀을 사고 생필품을 마련할 수 있는 ‘화폐’였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가파도에는 130여 명의 여자 중 70여 명이 잠녀다. 이들 중에서도 50여 명이 활발하게 물질을 하고 있다. 보리밭뿐인 척박한 땅에서 섬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당’과 ‘잠녀’ 덕이다. ‘바당’은 잠녀들이 물질을 하는 바다밭이다. 제주 여자들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물질을 배웠다. 뭍으로 시집을 갔지만 가파도 바당만 한 벌이를 찾기 어려웠다. 다시 섬으로 돌아온 어머니도 있다. 잠녀에게 메역밧과 구젱이밧(소라밭), 어부에게는 자리밧(자리돔이 많이 잡히는 곳)이 최고의 바다밭이다. 최근 밭의 정의에 ‘바다에서 수산물을 양식하는 곳’이라는 개념이 추가되었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뭍으로 떠난 자식들이 눈에 밟히면 잠녀들은 으레 ‘할망당’을 찾았다. 할망당은 제주 여성들의 힐링 센터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바람 분다, ‘까메기동산’에 오르지 마라
섬과 어촌은 뭍과 농촌에 비해 금기가 많다. 마을 공동체의 금기는 마을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요사이 가파도 섬살이를 위해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 많아지고 관광객이 늘면서 금기도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하동마을 노인은 지금도 낯선 사람들이 ‘까메기동산’에 오르는 것이 마뜩잖다. 이곳에 오르면 꼭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람은 섬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바람은 갯밭에 자라는 메역과 톳을 모두 가져가버리기도 한다. 까메기동산에는 잠녀가 물질하러 오가며 축원을 하는 당할머니가 있다. 가파도에는 하동마을의 ‘항개당’, 상동마을의 ‘메부리당’이 있다. 본향당이다. 항개당은 메부리당에서 나뉘어 온 것이고, 메부리당은 입도민과 함께 대정읍 ‘문수물당’에서 들어왔다. 이런 것을 제주에서는 ‘가지가른당’이라 한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가파도가 탄소 제로 섬으로 조성되면서 자전거가 인기다. 천천히 걸어도 두어 시간이면 족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골목과 해안을 쏘다니는 맛도 쏠쏠하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본향당과 달리 포제단은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서 유교식으로 정월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춘포제를, 칠월에는 풍농을 기원하는 농포제를 지낸다.  

관광객이 드나들면서 할망당은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잠녀들이 칠성판을 등에 지고 바다를 오가며 축원하던 할망당엔 오가는 관광객이 기웃거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할망당의 영험함이 덜할까 걱정일 뿐이다. 섬사람의 속살이 자꾸 관광객의 볼거리로 변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할망당 안에는 백지, 실, 돈 등이 있었다. 주머니를 뒤져 지폐를 꺼냈다. 그리고 길지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섬사람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자식 교육을 핑계 삼아 섬을 떠났지만 이제 뭍사람들은 청보리가 좋아 섬을 찾는다. 2013년 7월 사진 / 김준 작가

가파도에 ‘개발 바람’이 분다

가파도는 평균 고도가 20.5m다. 모슬포 쪽 상동마을과 마라도 쪽 하동마을을 연결하는 길은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상동마을을 벗어나자 쪽빛 바다와 산방산을 배경으로 청보리밭 벌판이 펼쳐졌다. 그 뒤로 한라산과 오름이 실루엣처럼 드리워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섬 가파도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제주의 존재이며, 역사이며, 풍경이다. 가파도는 산이나 봉우리가 없다. 높은 산이 없어 농사짓기에 좋을 것 같지만 바람이 강해 쉽지 않다. 말을 섬에 들일 때 쌓았던 돌담이 근대에 들어서도 유효했던 것은 밭농사를 짓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상동포구에 줄이 길게 이어졌다. 모슬포로 나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다. 은둔의 섬이라 했던 가파도가 올레길과 생태 관광으로 새 옷을 입고 있다. 관광객이 북적댄다. 보릿고개의 아픔을 간직한 청보리가 축제로 변신을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붙들었던 할망당도 관광객에게는 신기하다. 개발이 늦어 남아 있는 생태 자원과 생활 문화가 가파도의 새로운 자원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여기에 2011년 ‘가파도 탄소 없는 섬(Carbon Free Island)’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하기 이르지만 섬 곳곳에 박혀 있던 100여 개의 전봇대가 사라져 경관 연출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화력발전을 풍력과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 바꾸었다. 

낚시꾼만 찾던 섬이 관광객이 찾는 섬으로 바뀌고, 낚시 관광에서 녹색 관광으로 이름표를 바꾸었다. 2009년부터 청보리축제를 시작했다. 2010년 3월에 올레 코스가 만들어졌다. 예부터 윗마을과 아랫마을, ‘바당’을  오가는 길이건만 섬사람들에겐 ‘올레길’이 새롭다. 

INFO.
제주 모슬포항에서 가파도로 들어가는 배가 하루 4회(9:00,11:00, 14:00, 16:00) 출항.
운임 9시, 11시, 14시편도 성인 4000원, 어린이 2000원, 16시 편 성인 5000원, 어린이 2500원
소요 시간 15~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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