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통영] 여행의 고수들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여행지를 꼽을 때 꼭 빠뜨리지 않는 곳이 있으니 바로 통영 욕지도다. 통영의 쪽빛 바다를 치마처럼 두르고 빼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여기에 사계절 풍성한 어종으로 강태공들을 불러 모으고, 달고 맛난 ‘고메(고구마의 통영 사투리)’가 입맛을 사로잡는다.
황토밭 너머 옥빛 바다
통영에는 41개의 유인도가 있다. 욕지도는 그중 가장 큰 섬이며 외해와 접해 있다. 욕지도를 중심으로 연화도, 노대도, 두미도 등 9개의 유인도와 작은쑥섬, 볼기이, 소두방서, 검디이, 개섬, 바깥풀이 등 30여 개의 무인도가 있다.
욕지도 가는 길은 삼덕항과 통영여객선터미널을 통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 중 삼덕항을 이용하길 권한다. 욕지도와 가까워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데다 배도 크고 쾌적하다. 우도나 연화도 등으로 가려면 통영여객선터미널을 이용해야 한다.
처음 욕지도를 다녀온 후 그즈음 심심찮게 통영과 거제 일대의 섬을 다녔다. 모두 아름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욕지도가 강렬한 인상으로 계속 뇌리에 남았다. 황토밭과 고구마 때문이었다. 남도에서 숱하게 황토를 보고 만졌지만 욕지도처럼 강하게 뇌리에 남지는 않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바다였다. 푸른 바다와 붉은 황토가 더욱 강하게 대비되었던 것이다.
첫 방문 때의 일이다. 섬을 둘러보고 아침도 먹지 못하고 첫배를 타기 위해 선창으로 나왔다. 선창은 지금 위치가 아니라 자부마을로 가는 동촌 입구에 있었다. 아침 먹을 곳을 찾지 못하고 배표를 사 들고 나서다가 유리창에 써 붙인 ‘빼떼기죽’이란 글씨를 보았다. 먹는 음식임은 분명했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말린 고구마를 갈아 만든 죽이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통영은 ‘충무김밥’, ‘꿀빵’, ‘시래깃국’, ‘다찌집’과 함께 빼떼기죽이 유명했다. 빼떼기죽은 고구마를 원료로 사용한다. 통영에서 고구마로 유명한 곳이 욕지도다. 이곳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 불렀다. 말린 고구마를 씻어서 냄비에 넣고 물을 붓고 끓인다. 이때 팥과 좁쌀을 함께 넣는다. 주걱으로 잘 저으면서 빼떼기라 부르는 ‘말린 고구마’를 넣어 으깬다. 설탕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면서 끓인다. 조리 과정도 어렵지 않다.
죽을 시켜놓고 앉아 있는데 자부마을 너머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주인은 느긋했다. 시간이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라며 김치와 함께 내왔다. 쫄쫄 굶어야 할 형편이었는데 얼마나 맛이 있었겠는가. 그 뒤로 몇 차례 통영에서 빼떼기죽을 먹었지만 욕지도 선창에서 먹은 그 맛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펜션이 섬 집 노릇을 하다
꽤 높은 산자락인데도 묵힌 밭이 거의 없다. 고구마 때문이었다. 발길을 막는 반가운 집을 만났다. 지난번에도 이곳을 지나다 집을 발견하고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대나무로 만든 사립문 앞에 파리똥나무(왕보리수나무)와 동백나무가 아치형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인기척이 없다. 그때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었다. 주변에 집이 네 채가 있었다. 세 집은 빈집이었다. 그중 한 집으로 들어섰다. 돌담도 지붕도 무너졌지만 장독대만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뚜껑을 열었다. 된장, 간장, 멸치젓이 그대로 남아 있다. 주인은 떠났지만 젓갈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빈집이 된 지는 몇 년 되어 보였지만 금방 잘 갈무리하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섬사람들이 떠나는 와중에도 더 높은 산자락에 펜션을 짓고 있었다. 이곳만이 아니었다. 섬 곳곳에 펜션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 숙소도 주인이 부산에서 생활하다 퇴직해 들어온 사람이었다. 해안도로 곳곳에 펜션을 알리는 안내판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미 포화 상태라고 하는데도 새로운 펜션이 지어지고 있었다.
몽돌해수욕장에서 군소를 만나다
도동마을은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와 <1박 2일>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마을 입구에 피어 있는 동백꽃이 아름답다. 덕동은 몽돌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은 선창에서 배 바닥을 씻고 있는 주민과 마을 입구에서 만난 노인뿐이었다. 아내가 돌 틈에서 군소를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가만히 물속에 놓아주었더니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며 숨어들었다. 주변에는 톳과 미역과 파래가 돌에 붙어 자라고 있었다. 군소가 좋아하는 먹이들이다.
고래머리에서 유동을 지나 삼여, 노적, 솔구지로 이어지는 해안도로가 아름답다. 그 길 중간에 욕지 개척 100년 기념비가 있다. 욕지도와 주변의 작은 섬에서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가 발견되었고 각종 석기와 사람 뼈도 발견되었다.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1988년 욕지 개척 100년이라는 기념비는 왜 세운 것일까. 왜구와 해적의 잦은 출현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섬에 공식적으로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해양 방어 목적으로 군인들만 머물렀다. 백성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887년(고종 24년)이다. 1988년에 100년 기념비를 세운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다. 선사시대는 물론이고 정책적으로 백성을 뭍이나 안전한 곳으로 이주케 하고, 수군이 머물던 섬의 역사는 역사가 아닌가 싶었다.
저녁을 먹고 현금을 찾기 위해 우체국을 찾았다. 좁은 골목길을 서너 번 돌아가는 길에 ‘해녀집’, ‘여관’, ‘다방’, ‘세탁소’ 등이 섬마을의 어둠을 밝혔다. 이 골목이 한때 뱃사람과 작부들이 밀고 당기며 흥정을 하고 풋사랑을 나누었던 곳이리라. 나이 든 해녀가 운영하는 선술집에서 나온 사내 세 명이 부산여관이라는 상호가 별처럼 빛나는 골목길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의 욕지도엔 아지(전갱이)와 고등어 파시가 형성되었다. 마산과 서울은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수출했다.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나로도, 거문도 등과 함께 욕지도는 어업 전진기지가 되었다. 가거도처럼 ‘챗배’를 이용해 불을 밝혀 멸치를 잡았다.
지금도 수족관에는 방어, 농어, 볼락, 고등어, 자리돔, 문어, 전복, 소라 등이 철 따라 가득하다. 내항에는 우럭과 돔을 양식하며 가두리 낚시 체험도 할 수 있다. 고등어 양식도 성공했고, 유동 앞바다에는 참치 양식도 시도되고 있다.
새벽같이 쏘다녔더니 출출했다. 어제 고등어와 방어회를 맛있게 먹은 해녀집을 찾았다. 물질을 하는 김 씨는 새벽 4시에 나가고 없었다. 남편이 일찍부터 아침을 준비하며 주문한 고등어회를 썰었다. 성게알미역국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아내를 데리러 숙소로 갔다. 아침을 먹고 나오는데 김 씨가 ‘대송끝’에서 물질을 마치고 돌아왔다. 망사리에는 앙장구라 부르는 말똥성게, 문어 한 마리, 돌미역 약간, 전복 4개, 모자반 약간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잠수복을 입은 김 씨의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어젯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던 늙은 해녀의 가게가 생각났다.
INFO.
미륵도 삼덕항에서 하루 8회 운항
시간 6:45, 8:30(주말에만), 10:00, 11:00, 13:00, 14:00, 15:30
운임 7600원(편도)
소요 시간 약 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