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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이루리의 성곽여행] 신라호텔부터 반얀트리호텔까지, 은밀한 산책로 다산성곽길
[이루리의 성곽여행] 신라호텔부터 반얀트리호텔까지, 은밀한 산책로 다산성곽길
  • 이루리 여행작가
  • 승인 2020.07.17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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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한양도성 남산구간 다산성곽길.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서울] 뜨내기처럼 사는 일에 지쳤을 무렵, 늘 그냥 거기 있었을 성곽길이 툭 치며 말을 걸어온다. 그의 존재를 내가 몰랐어도 그는 거기에 있었고 우리는 무시로 지나쳤다.

그러다가 잠시 숨 고를 여유가, 그것도 본의 아니게 찾아왔을 때, 다시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됐다. 거기 그대로 몇 백 년을 이어온 성곽길이 있었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 5번 출구로 나와 100m쯤 걷다보면 장충체육관을 끼고 신라호텔 면세점 뒷편으로 난 데크 계단길을 만날 수 있다. 한양도성 남산구간 다산성곽길 진입로다.

한양도성 6개 구간 중 남산구간에 해당하지만 다산성곽길은 남산구간 중에서도 남산공원을 제외한 신라호텔과 반얀트리호텔 두 호텔 사이의 은밀한 사이길이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신라호텔 인근 다산성곽길. 어린 소나무가 길을 반긴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어딘가 숨고 싶은 날, 나는 비밀 산책로에 간다   
장충체육관 뒷길로 들어서면 초반엔 신라호텔 야외정원을 오른쪽 옆으로 끼고 걷게 된다. 왼쪽으로는 나트막한 성곽을 끼고 바깥의 주택가와 그 너머 시원스럽게 펼쳐진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호젓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다. 드문드문 인적을 만날 때면 슬며시 턱에 걸쳐놨던 마스크를 올리면서도 내심 반가운 기분마저 들 정도다. 코로나19에 함부로 길나서기 망설여지는 요즘에도 짐짓 안심하게 되는 길이다. 오솔길처럼 아늑하다. 2m가 채 안 되는 폭이지만 양쪽으로 트인 시야 덕분에 너른 품이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초입부를 지나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면 장충동 시내 일대가 한눈에 훤하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이 길을 모르는 사람이 아직은 대다수 일 것 같다. 호텔 뒤로 은밀히 숨어있는 다산성곽길은 누군가에겐 여태 비밀 산책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평일 오전에 이 길을 걷다가 슈퍼스타였던 배우 S와 정치인인 그의 남편, 어린 두 딸이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일이 있다.

다만 풍경을 찍고 있었지만 너무 큰 카메라를 사방으로 돌렸던 탓인지 배우 남편은 내가 파파라치인줄 알고 “사진 찍지 마세요”라며 경고를 보내기도 했더랬다. 

유명인이 얼굴 가림도 전혀 없이 산책에 나설 정도로 이 길은 한적하고 나름 은밀하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데다 주변에 오래된 주택가가 있고 할머니들이 수시로 마실을 나오기도 하는 길이지만 비밀의 정원 아니 비밀의 산책로로 불려지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다산성곽길은 연인들 데이트 코스로도 좋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다산성곽길은 한양도성길의 일부지만 한편으론 특급호텔인 신라호텔과 반얀트리호텔을 이어놓은 뒷길이기도 하다. 호텔 투숙객이 언제든 산책할 수 있도록 호텔과 연결되어 있다.

반얀트리호텔 옥외주차장의 분수대 옆으로 난 길에는 출입문이 없지만 신라호텔과 연결된 부분에는 호텔 카드키가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다. 이 성곽길이 호텔과 호텔을 잇는 한가한 산책로이다 보니 어쩐지 성곽이 축성됐던 조선시대에도 이 길로 수많은 연애담과 밀담들이 오고갔을 것만 같은 상상에 빠진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다산성곽길 초입부인 신라호텔 뒷길로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산라호텔의 야외정원을 끼고 걷게 된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검버섯 폈지만 아름다운 이 주춧돌처럼
성곽 안쪽으로 걷다가 성곽의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오른쪽으론 높다란 성벽의 면모와 다른 쪽으론 주택가의 소소한 가게들과 집, 주민들을 구경하며 걸을 수 있다. 성곽 바깥쪽의 길과 안쪽의 길이 사뭇 다른 느낌이다.

마치 성곽 안쪽은 조경이 잘 꾸며지고 안전한 귀족의 길, 바깥쪽은 구멍가게와 오래된 주택들이 다가서는 서민의 길 같다. 안쪽에선 산자락을 걷다보니 위에서 아래로 주택가를 내려다보며 걷게 되고 차도와 인도가 나 있는 바깥쪽에선 성곽 쪽을 위로 올려다보며 걷게 되니 더 그렇다. 

하지만 진정한 성곽길의 면모를 보려면 성곽 안길보다는 바깥 길로 걸어야 한다. 오래된 돌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모습에서 켜켜한 세월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깎여 나온 제품형 돌이 아니라 돌마다 자신만의 형태와 무게를 유지하면서 튀어나오고 들어간 그 모양대로 서로 퍼즐처럼 짜 맞춰져 쌓여있는 모습이 마치 인간사 같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호텔 뒷길을 잇는 다산성곽길은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 산책로.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다산성곽길은 전체 18.6㎞의 한양도성길 가운데서도 600여년 역사의 변화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길이다. 축성 시대별 건축기법의 차이를 관찰할 수도 있다. 성곽 축성을 담당한 지역과 담당자명 등을 표기한 ‘각자상석’이 여러 곳에서 발견돼 한양도성길 중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깊은 구간이다.  

이끼 끼고 주름지고 바람맞으며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름대로 나이가 든 돌들의 연륜이 그 모습에 그대로 묻어있다. 나이든 사람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성정을 숨길 수 없듯 거뭇거뭇 검버섯 핀 돌들에도 각자의 표정이 있다.

한해 한해의 날씨와 시련이 차곡차곡 쌓여 나무에 나이테를 만든 것처럼 성곽을 올리기 위해 쌓여진 저 돌들에서도 얼핏 한해 한해의 세월이 보이는 듯하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인근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는 다산성곽길.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천천히,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그래야 예쁘다. 예뻐서 예쁘다는 게 아니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담담한 나이듦이 예쁘다. 가만가만 그 나이든 돌들을 쓰다듬어 본다. 문득 대학 1학년 때 처음 배웠던, 교가나 애국가처럼 아무때고 불러재끼던 민중가요 ‘바위처럼’이 생각난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니.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구나”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나무가 많아 울창한 다산성곽길은 한여름 산책길로도 좋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성곽 안쪽으로 걸으면 나트막한 성곽과 함께 전망을, 성곽 바깥쪽으로 걸으면 키 높은 성벽의 세월을 실감하며 걸을 수 있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바위의 단단함, 끈기, 굳건함, 담대함, 무언가를 위해 기꺼이 주춧돌이 되기를 마다 않는, 어쩌면 미련함. 자기를 내세우고 개성을 드러내고 개인의 욕구를 가감 없이 표현하고 플렉스(flex)라는 이름으로 자기 과시가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시대에도 바위 같은 마음은 필요하다. 특히나 요즘처럼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 쉬운 날들에는 검버섯 낀 오래된 바위들을 쓰다듬고 바라보며 지그시 마음을 다잡아 볼 일이다.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성곽길 한켠에 한여름 해바라기도 활짝. 사진 / 이루리 여행작가

가볍고 심플하게, 삶도 이처럼
이 길의 안내에는 사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어느 쪽으로 걸으라거나 어떤 지형지물을 발견할 수 있다거나, 길 위에서 어느 카페나 식당에 가보라거나, 어떤 풍경이 보인다거나를 굳이 설명하기에 이 길은 단순하고 또 짧다.

설명할 만한 편의시설도 별로 없다. 켜켜한 성곽의 역사와는 달리 가볍고 심플하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어 걷기도 편하다. 동대입구와 장충체육관이 있는 신라호텔에서 시작하느냐 국립극장과 남산공원이 닿아 있는 반얀트리호텔에서 시작하느냐만 선택하면 될 일이다. 

길이도 2km가 채 되지 않는다. 한번은 성곽 안길로, 다른 한번은 성곽 바깥 길로 걸어보기를 권한다. 왕복을 해도 4km 남짓이니 쉬엄쉬엄 놀며 쉬며, 구멍가게에 들려 음료수 한 잔 마시고 정자에 들러 심호흡 좀 하다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더 걷고 싶다면 반얀트리 호텔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남산이다.

Tip. 다산성곽길이 포함된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1396년에 조선건국과 함께 한성부의 경계와 권위를 드러내고 수도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됐다. 왜란 등으로 소실된 성곽은 이후 여러 차례 개축되었는데 특히 1704년 숙종이 대대적으로 정비 사업을 벌여 보수했다.

한양도성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한 구조물로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과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연의 선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형을 그대로 따라 가며 성을 쌓아 자연의 일부처럼 자리 잡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됐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이으며 총 6개 코스, 18.6㎞로 구성돼 있다. 백악 구간, 낙산 구간, 흥인지문 구간, 남산 구간, 숭례문 구간, 인왕산 구간 등 6개 코스 모두 시내에서 접근이 용이하다. 서울시에서 만든 ‘서울한양도성’앱을 다운받으면 한양도성 전체와 각 코스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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