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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임요희의 소설 속 여행지] 박경리 문학이 살아 숨 쉬는 원주 이기호의 '원주통신'
[임요희의 소설 속 여행지] 박경리 문학이 살아 숨 쉬는 원주 이기호의 '원주통신'
  • 임요희 여행작가
  • 승인 2020.07.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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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원주] “두메에 가깝기 때문에 난리가 나도 숨어 피하기 쉽고, 서울과 가까워 벼슬길에 나아가기가 쉽기 때문에 한양의 사대부들이 이곳에 살기를 즐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강원도 서남부도시 원주의 장점을 이렇게 기술했다. 박경리 선생이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에 자리 잡은 것은 이 도시가 자연과 벗하기에도 좋고 서울로 외출 나가기에도 좋은, 지정학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온 것은 일천구백팔십년도의 일이었다. 선생의 정확한 주소는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742-9번지. 우리집은 선생의 집에서 오십 미터 쯤 떨어진 742-1번지였다.” - 소설 <원주통신> 中

원주는 소설가 이기호의 고향이면서 박경리 선생 제2의 고향이다.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은 경남 통영이다. 묘역도 통영에 있다.

하지만 선생이 대하소설 <토지>를 마무리하고 여생을 보낸 곳은 원주이다.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의 도시이고, 바르샤바가 쇼팽의 도시라면, 원주는 <토지>의 도시이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성진강변 하동 평사리를 구현한 '평사리마당'.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박경리 선생 제2의 고향 ‘원주’ 

이기호의 <원주통신>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원주통신>은 단편소설로 소설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 수록되어 있으며, 박경리 선생의 산문집 <원주통신>(1985)에 대한 오마주이다.

<원주통신>의 화자는 가난한 취준생, 이기호 자신이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 그도 처음에는 선생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7년 TV에서 드라마 ‘<토지>’를 방영하면서 박경리 작가가 원주 단구동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는데….

자기 동네에 <토지>의 작가가 산다는 것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은 너도나도 박경리 선생과의 친분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화자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 철없는 허세는 훗날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오게 된다. 바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동창으로부터 자기 룸살롱에 ‘토지’라는 상호명을 쓸 수 있도록 선생에게 승인을 받아오라는 청탁이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야무네 초가지붕 너머로 짙은그늘을 드리우던 커다란 느티나무. 오른쪽 건물은 북카페.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화자의 동창 용구는 룸살롱 상호명으로 ‘토지’를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천연덕스럽게 종업원의 이름마저 <토지> 속 이름들을 차용한다.

“저 친구 이름이… 길상이야?”

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 위에 양주와, 생수와, 얼음과, 과일안주를 올려놓는 청년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용구에게 물었다.
“어, 우리집 3번 웨이터 길상이. 왜 이상해?”

(…)

“야 뭐, 우리집에는 길상이만 있는 줄 아냐?” 

용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호출벨을 두 번 연속으로 눌렀다. 그러자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서희라고 합니다.”

용구의 천연덕스러움, 아니 이기호 작가의 기발함과 발랄함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감히 토지를 룸쌀롱 상호로 만들고 종업원 이름을 길상이, 서희로 만든 것은 사실 용구가 아니라 작가 이기호 아닌가. 

박경리 선생과 일면식도 없는 화자가, 나름 깨어 있는 지성인인 화자가 과연 선생으로부터 ‘토지’ 사용권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작가 이기호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박경리 문학의 집' 전시관 내부에 전시된 선생의 학창시절 사진.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문학공원이 된 단구동 가옥
원주에는 두 곳의 박경리 가옥이 있다. 하나는 문학공원으로 재탄생한 단구동 집이고 하나는 단구동이 주택단지로 개발되면서 이주한 매지리이다. 선생의 팬이라면 두 곳 다 의미 있는 여행지이다. 단구동 집이 창작의 물을 길어 올리던 장소였다면, 매지리 집은 문화공동체 성격을 띠고 있다.

‘박경리 문학공원’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소설 속에 나와 있는 지번을 그대로 따라 가면 된다.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742-9번지. 청량리에서 열차를 이용해 원주역까지 간 후 시내버스로 환승, 단두사거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광주원주고속도로를 타다가 남원주IC로 진입하면 바로 연결된다.  


2000년대 중반, 택지개발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단구동은 원주천 너머 치악산이 늠름하게 버티고 선 조용한 전원마을이었다. 선생의 단구동 주택은 박경리 선생이 17년간 머무르면서 소설 <토지>를 완성한 곳이다.

택지개발계획으로 선생의 집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한국토지공사에서 이곳을 공원부지로 전환했고 ‘박경리 문학공원’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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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는 영동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광주원주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사진 중앙은 원주 시청.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박경리 선생이 거주하던 슬라브 주택
박경리 문학공원은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된다. 선생의 집이 있는 옛집 구역, 집 뒤 평사리마당, 텃밭 위쪽에 마련된 홍이동산, 옛집을 외부에서 에워싼 용두레벌이 그것이다.  

문학공원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선생의 옛집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이름난 건축가가 공들여 예쁘게 지은 집이 아니라 그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흔한 이층집이다.

1980년대 풍 슬라브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선생의 숨결이 묻어 있는 1층 생활공간이 나타난다. 2층은 방문자를 위한 사랑방 공간으로 꾸몄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해란강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우뚝 서 있는 '용두레벌 일송정'.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건물 바로 왼편에 선생이 손수 가꾸던 텃밭이 있다.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밭에는 고추며, 상추 같은 채소가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누군가 잘 돌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당가 선생의 동상 옆에는 책과 호미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선생이 가장 중요시했던 일 두 가지를 나타낸다. 하나는 글을 집필하는 것, 하나는 밭을 경작하는 것. 선생은 생명을 사랑했고, 흙을 사랑했다. 그 정신이 집대성된 게 소설 <토지>이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주요 페이지마다 연관된 물상을 입체적으로 전시, 한눈에 소설 내용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토지> 전반부의 주 무대인 ‘평사리마당’
‘평사리마당’은 대하소설 <토지> 전반부의 주요 무대인 섬진강변 하동 평사리를 그리고 있다. 철 따라 꽃이 피고 지는 악양벌판, 선착장, 둑길, 최참판댁을 아기자기한 조경으로 마무리했다. 평사리마당 한가운데 우뚝 선 느티나무는 소설 속 야무네 초가지붕 너머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던 큰 나무를 표현한 것이다. 

평사리마당은 북카페, 문학의 집 전시관으로도 연결된다. 한 마디로 평사리마당은 ‘박경리 문학공원’의 중심축인 것이다. 

‘박경리 문학의 집’ 전시관 내부로 들어서면 선생의 육필 원고, 밭 매는 데 사용했던 도구, 선생이 사랑했던 도자기와 조각, 선생의 소싯적 사진 등과 만날 수 있다. 또한 주요 페이지마다 연관된 물상을 입체적으로 전시, 한눈에 소설 내용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박경리 선생은 생명을 사랑했고, 흙을 사랑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토지> 후반부의 중심 ‘용두레벌’
‘홍이동산’은 평사리 뒷동산을 형상화한 공간으로 <토지> 속 ‘홍이’가 놀던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큼직한 바위와 오솔길, 계단 등을 배치해 견학 온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 놀 수 있도록 했다. 

홍이동산에서 언덕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무 전봇대가 줄지어 늘어선 ‘용두레벌’과 만나게 된다. 용두레벌은 평사리를 떠난 서희가 가문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펼쳐나간 곳이다. <토지> 후반부의 주요 배경지로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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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품으로 남겨진 반짇고리에서 선생의 검소한 일면을 볼 수 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간도 용정 용두레벌에는 ‘용두레 우물’이 있다. 용두레 우물은 용정(龍井, 룽징)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곳으로 전해진다. 표지석에 보면 “원시적 형태의 마른 우물은 황야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심정을 나타”낸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물이 솟는 우물이 아니라 간구의 의미로 판 마른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곡 ‘선구자’에도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라는 가사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독립을 염원하는 심정을 용두레 우물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옮겨 담았다. 용두레 우물 건너편에는 ‘일송정’ 한 그루가 간도 용정 해란강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우뚝 서 있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용두레벌 '용두레 우물'은 '용정'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곳으로 전해진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선생이 말년을 보낸 매지리 가옥
소설 속 화자는 룸살롱 ‘토지’에 대한 상호명을 승인 받기 위해 “서원대로라고 불리는 단계동에서 단구동에 이어진 산업도로를” 시적시적 걸어 선생을 찾아간다. 그의 수중에는 차비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박경리 선생 집 앞에 도착하기는 했다. 용구의 룸살롱을 출발한 지 거의 다섯 시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밤, 박경리 선생을 만나진 못했다. 이것 역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선생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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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지리 토지문화관에 마련된 창작실. 선생이 문인들을 위해 지은 곳이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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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매지리 집에서도 손수 밭을 일구고 직접 장을 담갔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선생이 단구동을 떠나 새로 정착한 곳은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이다. 매지리 가옥은 1999년 완공 시점부터 ‘토지문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선생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문학관’으로 오해하지만 이건 문화관이다. ‘사람 사는 문제 전반에 관련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매지리 가옥은 1999년 완공 시점부터 '토지문화관'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선생을 기리는 헌판. 사진 / 임요희 여행작가

토지문화관은 지역주민이 참여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문인들에게 창작실을 지원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세미나실, 숙소, 야외무대, 식당, 휴게실, 전망대, 도서실 외에 선생이 가꾸던 텃밭과 만날 수 있다. 

소설 <원주통신>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삶 전체로서 귀감이 된 박경리 선생을 기리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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