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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김준의 섬 여행28] 이순신은 왜 고금도에 머물렀을까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
[김준의 섬 여행28] 이순신은 왜 고금도에 머물렀을까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도
  • 김준 작가
  • 승인 2012.11.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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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여행스케치=완도] 조선시대에 조운선이나 무역선은 고금도를 통해 진도 울돌목을 거쳐 서해로 올라갔다.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으로 통하는 뱃길이었다. 충무공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고하도에 주둔하고 있던 수군 8000명을 이끌고 고금도 덕동마을로 진을 옮긴 것도 필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찬 바람이 일자 충무사 앞바다에 매생이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꾼들이 겨울을 기다리는 것은 매생이에 굴을 넣고 끓인 술국 때문이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쌀과 소금, 그리고 전쟁

탐진강이 흐르는 도암만을 따라 마량으로 가는 길이다. 옹기장들이 오갔을 칠량천에 왜가리 두 마리와 백로 한 마리가 놀랐는지 날아올랐다. 마량에서 고금으로 이어진 다리 위에서 잠시 한눈을 팔았다. 햇살에 물비늘이 눈 부셔 바라볼 수 없다. 고기잡이배가 지나자 물비늘은 은하수 별빛처럼 부서졌다. 

고금대교를 건너 청룡리와 도남리를 지나 곧장 충무리로 향했다. 지금은 간척을 해 농지로 바뀌었지만 과거엔 그곳에 묘당도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바로 여기에 충무사가 있다. 사실 충무사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곳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을 처음으로 봉안했다는 월송대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가묘 유허’가 남아 있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신지도 너머로 지는 노을빛이 고금 앞바다의 양식장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강진현에 딸린 섬 고금도가 역사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수군 진을 고금도로 옮기면서였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충무공이 이듬해(1598년) 수군 8000명과 인근 지역에 있는 군민 1500호를 모집하여 고금도 덕병에 진을 구축했다. 임시 수군 진이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충무공은 홀로 구국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조실록>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금도는 호남 좌우도의 내외양(바다)을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 산봉우리가 중첩되어 있고 후망(帿望)이 잇대어져 있어 형세가 한산보다 배나 좋습니다. 남쪽에는 지도(현 신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가 있으며, 농장도 많고 한잡인(閑雜人)도 거의 1500여 호나 되기에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흥양(현 고흥)과 광양은 계사년부터 둔전을 하였던 곳으로 근민을 초집하여 경작할 생각입니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충무사가 있다.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충무공이 고하도에서 이곳으로 진을 옮긴 것은 적은 군사력으로 많은 적과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며, 농사를 지어 군졸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금면지>(1953)에는 “비록 도서이나 풍랑의 격심이 없는 고로 비단 연화부수격(蓮花浮水格)이요, 산세는 금수(錦繡)요, 토지는 옥야(沃野)라. 곡물이 많고, 어염시초(魚鹽柴草)의 부족함이 없으며, 육지와 교통은 강진 마량을 통하므로 임의대로 왕래할 수 있으니, 이 모두가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 했다. 고금도를 지나면 완도와 해남을 지나 진도로 이어지는 뱃길이다. 뱃길은 서해로 곧장 올라갈 수 있고, 육로는 해남에서 시작되는 삼남대로로 연결되는 요충지이다. 

또 이곳에는 몇 년 전까지 천일염전이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마을 노인들에게 옛날에 소금을 굽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예상이 적중했다. 이곳에서 소금을 구웠다고 했다.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끓여 만든 ‘자염(煮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전쟁에서 무기가 생명이라면 소금과 쌀은 목숨이다. 이 둘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곳이 고금도였다. 당시 자염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수군이었다. 고금면 노인회에서 매년 충무공 탄신일(음력 4월 28일)에 조촐한 음식을 마련해 제를 지내고 있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굴막에서는 조새를 이용해 바다에서 막 건져온 굴을 까느라 분주하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완도 사람 고금도 쌀 먹고 자랐다
고금도는 완도 본섬에서 제일 가깝고 큰 섬이다. 그리고 농사지을 땅이 많다. 쌀농사가 위기라지만 섬에서 쌀농사만큼 좋은 농사도 없다. 고금도는 ‘완도 출신치고 고금도 쌀을 먹지 않고 큰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예로부터 농사가 많았다. 본섬을 제외하고 완도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가 있는 것도 먹고살 것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대개포 간척으로 항동마을과 척찬리 사이에 있던 너른 갯벌까지 논으로 변했다. 


그러나 섬마을 사람들은 그 사이 나이가 들어 있는 논도 묵혀야 할 판이 되었다. 새로 조성한 간척 농지가 제대로 분양이나 될까 싶었다. 결국 외지인이 들어와 대규모로 농사를 짓게 될 게다. 갯벌로 남아 있었다면 칠순 팔순 노인들도 꼬막, 낙지, 바지락을 채취했을 것이다. 이곳 갯벌은 꼬막, 낙지, 바지락, 감태, 고둥 등 없는 것이 없는 황금 갯벌이었다. 특히 대개포 갯벌 낙지는 완도의 명품이었고 1년에 수백만 원의 소득도 거뜬했다. 아쉽게도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어버렸다.

간척을 위해 쌓은 제방 아래에서 팔순을 앞둔 할머니를 만났다. 뭍으로 시집간 딸이 모처럼 친정을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 반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나왔단다. 그냥 딸만 오면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사위에다 사돈 내외까지 동반한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돈은 어렵고 부담스럽다. 다행히 돌 틈에서 낙지 두 마리와 해삼, 그리고 바지락까지 꽤 많이 캤다. 여기에 지난번에 잡아서 말려둔 숭어 몇 마리  찌고 탕을 끓이면 서운함은 면할 듯싶다. 할머니는 짓던 농사도 그만두었다. 젊었을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김 양식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갯벌이 농지로 바뀌면서 농사를 잠깐 지었지만 힘들어 그만두었단다. 그래도 가끔씩 갯벌에 나와 바지락을 캔다. 힘은 들어도 소일거리와 용돈 벌이로 이만한 것이 없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척찬리 앞바다에서 잡은 졸복이 건장에 매달려 꾸덕꾸덕 마르고 있다.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갯벌은 막으면 넘의 것이제”
바지락 농사를 큰 규모로 하는 마을을 찾아갔다. 석치(돌고개)를 지나 회룡리고개를 넘자 아담한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갯벌이 좋은 상정리다. 어장이 좋아 굴과 바지락 양식이 잘되는 마을이다. 굴과 바지락은 식물플랑크톤과 유기물을 먹는 친환경 어업 자원이다. 바지락과 굴 양식을 한다고 사료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상정리 앞 갯벌에서 100여 명의 어머니들이 바지락을 파고 있다. 햇볕과 갯벌에서 올라오는 반사열로 어머니들의 얼굴이 새빨갛다. 사우나에 앉아 있는 듯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진다. 어머니들은 ‘몸빼 바지’에 헐렁한 셔츠를 입고 색이 바랜 수건을 머리에 썼다. 바지락 망에 있는 끈을 바지가 내려가지 않도록 허리춤에 질끈 묶었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상정리 앞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어머니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올여름엔 두 번 ‘개를 텄다’. 지난봄에도 두 차례 개를 열었다. 여름에 개를 여는 것은 고향으로 휴가 오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다. 추석에도 며칠 동안 개를 튼다. 명절을 쇠기 위해서다. ‘개’는 갯벌이나 바위(여) 등 해조류나 패류가 서식하는 마을 공동 어장을 말한다. 마을 주민들은 바다와 갯벌을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해 다양한 규칙을 만들었다. 법으로 정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주민들은 그에 따라 갯벌에 들어갔고 정한 양만 채취했다. 하루 작업을 하면 8만~10만원 정도 수입이 된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찬거리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마량으로 가져가 판다. 상정리 가구 수가 130호 정도라고 하니 일을 할 수 없는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다로 나온 셈이다. 

과거 고금도 주 소득은 김 양식이었다. 김 양식 시설이 섬을 에워쌌다. 그러나 김 양식이 너무 많아지자 소득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작목을 미역으로 바꾸었지만 이마저 대개포 간척사업으로 중단되었다. 물길이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정리, 척찬리, 항동리, 덕동리 등 고금도 남부 지역에서 굴 양식을 하고 있다. 봄과 여름철엔 농사를 짓고 찬 바람이 불면 굴 양식을 한다. 굴은 겨울철 알굴로 판매하고 있다. 포자를 얻기 위해 마을 앞 바닷가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굴 껍데기를 매달아놓는다. 이렇게 1년이 지나면 포자가 붙는데, 이 껍질을 굴비처럼 엮어서 바다로 옮긴다. 이것이 수하식 굴 양식이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가을이면 굴 종패를 얻기 위해 가리비나 굴 껍데기를 엮어서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가에 매달아놓는다. 2012년 12월 사진 / 김준 작가

간척 논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정에 네댓 명의 남자들이 모여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시장기도 면하기 안성맞춤이다. 넉살 좋게 인사를 하고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술이 한 순배 돌자 황금 갯벌에 대한 기억이 끝없이 풀려 나온다. 배곯던 시절에 황금 들녘을 꿈꾸며 갯벌을 내주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에게 남은 것은 어족 자원이 풍성했던 갯벌에 대한 아쉬움뿐이다. “갯벌은 우리 것이었지만 막아버리는 순간 넘의 것이제.” 마을개발위원장의 말이 돌아오는 내내 귓전에 맴돈다.

INFO. 가는 길 
영암순천고속국도 서영암IC로 나와 강진무위사IC를 지나 강진군 마량과 고금도를 잇는 연륙교 고금대교를 건너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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