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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 '도화지인 고무신에 100년의 역사를 입히다', 강연숙 연아뜰리에 대표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 '도화지인 고무신에 100년의 역사를 입히다', 강연숙 연아뜰리에 대표
  • 조용식 기자
  • 승인 2020.08.17 2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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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신에 실로 그림을 그려넣은 고무신 작가, 강연숙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고무신 체험, 기억도 함께 말하다
강연숙 연아뜰리에 대표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무신을 알게 된 후로 고무신작가로의 다짐이 새로워졌다"고 말한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여행스케치=전주] “2012년 당시 저에게 고무신은 도화지였고, 제가 배운 포크아트를 입혀 새로운 장르로 개발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체육계 어르신을 만나면서 고무신에 대한 역사를 알게 됐죠. 무려 100년의 전통이 있는 고무신의 역사를 말이요.”

전주한옥마을 공예명품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끝자락에 자리한 연아뜰리에. 그곳에서 고무신에 실로 그림을 그리고, 물감으로 꽃을 피우며 고무신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강연숙(50) 대표를 만났다.

고무신과의 첫 인연, “도화지로 보였다.”
37살, 그가 학창 시절부터 꿈꿔온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한 나이다. 가구, 소품 등에 그림을 그리는 포크아트를 배우면서 제일 필요했던 것은 작업복이었다. 절에서 파는 한복을 리폼해서 입고, 예쁜 단화를 신었다. 

전주한옥마을 공예명품길 끝자락에 위치한 연아뜰리에의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금장을 입혀 더 빛나는 검정고무신. 사진 / 조용식 기자

여러 소품을 마주하다 뜬금없이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흰 고무신은 마치 도화지 같았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물감을 사용하면 독특한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고무신에는 어떠한 물감이라도 가차 없이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틀을 깨는 작업에 들어갔다. 물감이 아닌 실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한 것이다. 한 방송국 피디가 준 책에서 본 홍매화 그림이 그녀의 첫 꽃 그림이 된다. 색다른 것을 하니, 체험하자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느새 주문을 받게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맞는 스토리텔링을 입혀 그들만의 고무신을 만드는 일에 재미를 느낄 때였다.

어느 날 체육계에서 이름 있는 어르신을 만나게 되는데, “고무신에 대한 역사를 아느냐?”는 질문에 뒤통수를 맞은 듯 아파져 왔다. 스토리텔링만을 만들어 왔던 그에게 고무신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 인문학적 내용을 더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100년의 역사 고무신, 아프고 쓰린 역사도 함께
고무신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서울 원효로의 대륙고무공업사였으며, 이후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고무신 공장이 속속 들어서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고무 신발은 남자 구두, 장화 형식이었다. 그러나 습기가 많은 우리나라에는 구두나 장화는 실용성이 없었다.

시조시인이기도 한 강연숙 연아뜰리에 대표. 사진 / 조용식 기자

강연숙 대표는 “짚신(남자용)과 마른신(여자용) 형태에 착안해서 고무신을 만들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고무신을 신은 인물은 조선 순종”이라고 말한다. 당시 대륙고무의 창업주인 대한제국 외무대신(친일매국노) 이하영이 순종에게 첫 제품을 진상했다는 말이다.

고무신의 첫 생산 시기는 1922년 대륙고무공업사에서 첫 고무신 상표 ‘대장군’을 내놓았으며, 그해 동아일보 9월 21일 신문광고에 ‘대륙고무 고무신을 출매함에 있어 이왕(순종)께서 이용하심에’라는 구절이 소개되기도 했다.   

평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을밀대 지붕에서 “내 한 몸뚱이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대중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일은 명예스러운 일이란 것이 내가 배운 가장 큰 지식입니다”라며 외치던 한국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가 강주룡(1901~1932.8.13.)은 령원 고무공장의 여공이었다.

130도 가마솥 옆에서 하루 15시간을 일하면서도 고무신 한 켤레 값보다 못한 하루 임금 ‘30전’을 받았으며,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고무업계에도 밀려와 임금 17% 삭감과 정리해고가 이루어지자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그가 지붕에 오른 지 10일 후 평원 고무공장은 임금삭감을 철회했다는 기록이 있다.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 ‘이요원, 강주룡을 기억하며 기록하다’ 참고)

근대사로 넘어오면 막걸리와 고무신이 노임으로 사용된 적이 있으며, ‘왕자표’ 고무신으로 성공 신화를 이룩한 국제그룹의 몰락도 고무신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된다.

흰 고무신, 뉴트로 스타일로 변신하다
“흰 고무신에 편하게 구멍을 내세요. 땀이 배출되어야 더 신기 편하거든요.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세요. 꽃도 좋고, 글씨도 좋아요. 모바일에서 멋진 디자인을 검색해서 그려 넣어도 좋아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무신이 될 테니까요.”

2017년부터 고무신을 알리기 위해 유럽은 물론 전국을 다니면서 한복과 함께 신었던 강연숙 대표의 검정고무신. 그가 제일 아끼는 검정고무신이다. 3년의 세월동안 밑창을 세 차례나 갈아야 했다고 한다. 코사지와 실로 꽃 그림을 그리고, 뒤꿈치에 색동저고리를 씌워 패션과 함께 발 보호도 신경썼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전주한옥마을 공예명품길 지도. 사진 / 조용식 기자
연아뜰리에 매장의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100년 된 고무신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체험을 하다 보면, 중장년들은 과거의 고무신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대학 시절, 흰 고무신에 브랜드 로고를 그렸던 기억, 장날 고무신을 사러 갔던 어릴 적 이야기, 구멍 난 고무신이 부끄러워 밖을 나다니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추억이 소환된다. 그렇게 고무신은 뉴트로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친구가 되어 소중하게 간직하게 된다.

아이들도 마냥 신기해하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낸다. 전주한옥마을을 찾는 연인들은 고무신에 글을 담고, 외국인들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고무신 체험을 통해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알 수 있어 새로웠다는 말도 남긴다.

비록 일본에서 넘어온 고무신이지만, 이제는 100년 역사를 간직한 한국의 고무신으로 번안된 것이다. 또한,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무신은 오직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만 만들어진다. 

강연숙 대표가 운영하는 연아뜰리에 입구에는 조그만 간판이 걸려있다. 간판에는 고무신(古無新)이라는 제목과 함께 ‘옛것이 없어지지만 새롭게 만드는 가치가 있다’라는 뜻풀이가 적혀있다. 

고무신이 한국을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를 바라는 그는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에 뭔가 있어’라는 말을 하잖아요. 고무신을 보면 한국이 떠오르고, 좋은 이미지의 한국을 기억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INFO 연아뜰리에

전주한옥마을 공예명품길에 자리한 연아뜰리에 간판. 사진 / 조용식 기자

고무신 체험에 사용되는 물감은 수성 아크릴 물감이라서 드라이기나 자연 건조를 하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고무신 체험 이외에도 마니아를 위한 고무신도 소량이지만 제작하며, 원데이 특강을 통해 전문적인 고무신 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길도 열어놓고 있다.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12-8(전주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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