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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권다현의 아날로그 기차 여행] 세월을 쓸고 닦는 간이역, 보령 청소역
[권다현의 아날로그 기차 여행] 세월을 쓸고 닦는 간이역, 보령 청소역
  • 권다현 여행작가
  • 승인 2020.12.23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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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중인 청소역
청소 중인 청소역.

[여행스케치=보령]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이름의 기차역이 있다. 백원역, 천원역, 고모역, 다시역, 미로역. 한자이름들이라 음은 같지만 다른 뜻을 떠올리는 재미가 있다. 보령 청소역도 그렇다.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하는 청소(淸掃)를 연상시킨다. SNS에 빗자루나 대걸레를 들고 찍은 유쾌한 사진들이 넘쳐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인 청소역.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인 청소역.

보령시 청소면에 자리한 청소역은 푸르름을 간직한 곳이란 지역명에서 유래한다. 1929년 처음 영업을 시작했고 지금의 역사는 1961년에 새롭게 지었다.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으로 기와를 얹은 삼각지붕과 벽돌로 쌓아올린 흰색 외벽이 소박하고 예스런 인상을 풍긴다. 광복 이후 간이역의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2017년 천만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새삼 유명해졌다. 마치 세트장처럼 보였던 거리 풍경이 지금껏 그대로다.

청소역 앞에 택시들이 대기 중이다.
청소역 앞에 택시들이 대기 중이다.
바닥에 장항선의 기차역들이 새겨져 있다.
바닥에 장항선의 기차역들이 새겨져 있다.

청소역, 푸르름을 간직한 곳

청소역은 보령시 청소면에 자리한다. 푸를 청()에 곳 소(), 그러니까 푸르름을 간직한 곳이란 의미다. 흔히 떠올리는 청소와는 거리가 멀다. 예부터 천수만을 오가는 배들에게 등대 역할을 했다는 서해안 최고봉 오서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맑은 날엔 청소역에서도 오서산 자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묘소도 자리해 충절의 고장을 내세운다. 현대에 들어선 서해안고속도로와 국도21호선, 경부선 천안역과 호남선 익산역을 연결하는 장항선이 지나며 보령의 관문으로 통한다.

그러나 이웃한 대천역과 달리 청소역 주변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서울 용산역에서 오전 1025분에 출발한 무궁화호가 정오를 지난 1249분쯤 청소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내린 승객이라곤 카메라를 둘러멘 나뿐인 것을 확인하자 열차 시간에 맞춰 기다리던 택시운전사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마침 대걸레로 바닥을 닦던 아주머니에게 청소역을 청소하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더니 어슬렁어슬렁 기차역을 빠져 나간다.

 

INFO 청소역

주소 충남 보령시 청소면 청소큰길 176

승차권 발매가 중단된 청소역의 창구.
승차권 발매가 중단된 청소역의 창구.
청소역 대합실 풍경.
청소역 대합실 풍경.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

청소를 마친 청소역은 기와를 얹은 삼각지붕과 벽돌로 쌓아올린 흰색 외벽이 소박하고 예스런 인상을 풍긴다. 지금의 역사는 1961년에 새롭게 지은 건물이지만 처음 영업을 시작한 건 1929년이다. 청소면 진죽리에 자리해 원래 이름은 진죽역이었다. 이용객이 많아 1958년 보통역으로 승격됐고 1988년 청소역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때 기차역을 나서면 빼곡한 상점들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오서산이 은빛 억새로 물드는 가을이면 등산객들도 제법 찾아왔다. 그러나 찻길이 발달하면서 이제 청소역을 드나드는 승객은 하루 서른명 남짓. 그마저도 자꾸 줄고 있다. 결국 1995년 화물취급이 중단됐고 2013년부터는 승차권을 발매하는 창구도 사라졌다. 현재 청소역에서 기차를 타려면 열차에 먼저 오른 후 승무원에게 승차권을 구입해야 한다. 역무원은 배치되어 있으나 운전취급은 대천역에서 관할하는 이른바 운전간이역이다.

골목 사이로 보이는 철로.
골목 사이로 보이는 철로.
장항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포토존을 설치해 놓았다.
장항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포토존을 설치해 놓았다.

청소역이 속한 장항선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휴양지로 꼽히던 온양온천 개발을 위해 부설된 노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설 철도회사인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가 1922년 천안에서 온양온천 구간을 먼저 개통하고 1931년 장항선 전 구간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회사가 1927년 온양온천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이때부터 온양온천은 조선의 다카라즈카(일본 효고현의 유명 온천도시)로 불리며 동양 제일의 온천장으로 급성장했다. 본래 충남선으로 불리던 이 노선은 해방 후 장항선으로 개칭됐고, 2008년 군산선 일부를 흡수하면서 종착역이 장항역에서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장항선은 전 구간 단선 비전철로 소요시간이 길고 자주 지연되기로 유명했다. 직선화 공사를 통해 이런 불편을 상당부분 개선했지만 그 결과로 무려 14개의 기차역이 폐역되었다.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으로 꼽히는 청소역도 2단계 개량이 완료되면 폐역될 예정이다. 언제 기차가 멈출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운명 때문일까, 등록문화재 제305호로 지정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임을 알리는 팻말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진다.

영화 '택시운전사' 포토존.
영화 '택시운전사' 포토존.
영화 '택시운전사'의 메인 퐆스터에 등장하는 거리 풍경.
영화 '택시운전사'의 메인 포스터에 등장하는 거리 풍경.
청소역은 '택시운전사' 촬영지로 알려지며 유명해졌다.
청소역은 '택시운전사' 촬영지로 알려지며 유명해졌다.

영화 <택시운전사> 속 풍경이 그대로

청소역에 내리자마자 택시운전사를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까. 청소역 일대는 2017년 천만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촬영지로 새삼 유명해졌다.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 분)가 광주에서 대학생 재식(류준열 분)을 만나 시위대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장면과 주인공 만섭(송강호 분)이 활짝 웃고 있는 메인 포스터의 배경이 모두 청소마을이다. 1980년대 거리 풍경을 그대로 재현해 마치 세트장처럼 보이지만 지금도 이 거리는 촬영 당시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몇몇 가게가 바뀌거나 간판을 새로 달았지만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낮은 건물과 촌스런 무늬의 타일, 끝이 쩍쩍 갈라진 나무문은 금세 영화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당장이라도 거리 저 끝에서 뿌연 최루가스와 함께 재식을 태운 트럭이 나타날 것 같다.

영화의 인기 덕분에 폐역의 운명을 기다리던 청소역 풍경도 조금 바뀌었다. 기차역 왼쪽에 <택시운전사> 촬영지를 알리는 포토존과 함께 장항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바닥엔 장항선에 속한 모든 역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혹여 택시를 탈까 싶어 내 눈치를 살피던 택시운전사는 슬쩍 곁으로 다가와 주말엔 젊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러 제법 찾아온다영화 제목이 <택시운전사>라 덩달아 우리까지 인기라고 짐짓 귀찮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 순박한 충청도식 화법에 피식 웃음이 났다. 청소역이란 이름만큼이나 이 동네, 참 맑고 꾸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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