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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만경교를 기억합니다”… 익산 만경강 시간여행
“만경교를 기억합니다”… 익산 만경강 시간여행
  • 박정웅 기자
  • 승인 2021.07.28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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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미곡 수탈사 담은 옛 만경교
한국전쟁의 비극도… 역사·문화적 가치 되새기는 유산
익산 쪽 옛 만경교 전망대의 시각 디자인물. 난간을 나타내는 시각물의 소실점 끝인 맞은편 김제 쪽에도 같은 전망대가 있다. 사진 / 박정웅 기자
남은 교량에 나무 데크길과 전망대가 조성돼 있는 옛 만경교. 사진 / 박정웅 기자
남은 교량에 나무 데크길과 전망대가 조성돼 있는 옛 만경교. 사진 / 박정웅 기자

[여행스케치=익산(전북)]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에는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옛 다리가 있다. 전북 익산과 김제를 이었던 (구)만경교(1928.2~2015.6)다. 지역에서는 만경강의 한 포구인 목천포 이름을 따 목천포다리로 불렀다. 

옛 만경교는 길이 550m 폭 12.5m 규모였다. 일제강점기, 만경강과 호남평야 일대의 곡물을 수탈하려는 일제의 계략에 1928년 2월 준공됐다. 전주-군산을 잇는 신작로(전군도로)의 주요 기점이었다. 철로에, 신작로에 일제의 쌀 수탈은 가속화했는데 옛 만경교가 그 중심에 섰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창설된 우리나라 해병대의 첫 작전지로 알려져 있다. 

만경교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 설치물. 사진 / 박정웅 기자  
옛 만경교 난간 사이로 호남선 만경강철교가 보인다. 사진 / 박정웅 기자

이 다리는 익산의 목천동과 김제의 백구면을 오가는 유일한 다리였다. 62년 동안 호남평야의 한 복판에서 사람과 농산물의 발을 연결해줬다. 그러던 다리가 1990년 바로 옆에 놓인 새 만경교(만경강2교)에 그 역할을 넘겼다. 

옛 만경교는 1988년 철거 대상 교량으로 분류됐다. 노후화에 따른 안전 문제와 물 흐름 방해 등의 이유였다. 그렇지만 주민의 이동통로와 벚꽃축제 현장으로 생명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2014년 철거 계획이 수립됐다. 이 과정에서 옛 만경교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보존하자는 여론이 일었다. 철거와 존치의 기로에서 교량 일부 보존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강 복판 방향의 교량은 철거하면서 익산과 김제 쪽 시작점 일부를 각각 남겨두기로 한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경교를 기억합니다’ 콘셉트였다.

김제 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사진 / 박정웅 기자

현재 남은 교량에는 목재 데크길이 덧대져 있다. 끝 부분에 조성된 각 전망대의 시각 디자인물은 옛 만경교가 익산과 김제를 이었다는 사실을 안내한다. 

난간 사이에 큰금계국꽃이 피어 있다. 사진 / 박정웅 기자
남은 교량에는 큰금계국꽃이 피어 있다. 사진 / 박정웅 기자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 내리다 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교각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윤흥길 <기억 속의 들꽃>(1979)

옛 만경교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다룬 윤흥길의 소설에 등장한다. 익산에서 줄곧 자란 소설가의 기억과 상상력이 이 다리에 머문 것. 윤흥길은 익산 춘포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소설에서 화자(나)는 이름 모를 들꽃을 ‘쥐바라숭꽃’으로 둘러댔다. 쥐바라숭꽃의 실체는 막연하다. 다만 현재 남은 교량 구석에는 큰금계국 등 다른 들꽃이 피어 있다.  

박정웅 기자 sutr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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