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4월호
울창한 원시림을 걷다 만난 생명의 못, 동백동산
울창한 원시림을 걷다 만난 생명의 못, 동백동산
  • 정은주 여행작가
  • 승인 2021.08.12 0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오름과 숲] 동백동산
동백동산에 숨은 보석인 먼물깍.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동백동산에 숨은 보석인 먼물깍.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여행스케치=제주] 선흘리 곶자왈 지대에 펼쳐진 동백동산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숲 가운데 하나다. 언제 찾아도 사철 푸른 이곳엔 오랜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숲속 깊은 곳까지 발길이 닿으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생명의 못을 만나게 된다.

동백동산은 오래 전부터 선흘리 마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되어온 곳이다. 곶자왈 지대에 있어 화전조차 일구기 어려운 숲이지만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나무를 구워 숯을 만들고 썩은 고목에 버섯을 재배하며 희망적인 삶을 꾸려 왔다. 지금은 모두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진 모습들이지만 숲 안쪽에는 숯 가마터와 같은 옛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숲에서 얻은 것들을 토대로 아이들을 키우고 마을을 지켜온 사람들은 이제 동백동산을 보호하는 지킴이가 되어 숲을 가꾸고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낙엽과 푸른 상록수가 어우러진 탐방길.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낙엽과 푸른 상록수가 어우러진 탐방길.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곶자왈 지대의 특성을 보여주는 풍경.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곶자왈 지대의 특성을 보여주는 풍경.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제주도 네 번째 람사르 습지 
숲 곳곳에는 크고 작은 습지들이 형성되어 있다. 동백동산이 생명의 숲이라 불리는 이유들이다.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수도꼭지만 열면 물이 펑펑 쏟아지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제주도는 물이 무척 귀했었다. 물 한 모금이 소중한 시절, 사람들은 숲속 습지를 찾아 말과 소들에게 물을 먹이고 집집마다 생활에 필요한 물을 매일같이 길어다 썼다. 울퉁불퉁한 숲길을 무거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오가야 했을 만큼 마을 사람들에게 습지는 귀한 생명수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동백동산의 습지는 생태학적인 면에서도 세계적인 보전 가치가 있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덕분에 이곳은 2011년 제주도에서 4번째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다. 제주에는 현재 물영아리오름과 물장오리오름, 1100고지 습지를 비롯해 동백동산, 숨은물벵뒤 습지까지 총 5곳이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람사르 습지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어도 동백동산은 꼭 한 번은 가보기를 추천하는 곳이다. 더구나 울창한 숲속을 누비는 트레킹 매니아에게 이곳은 빼놓지 말아야 할 제주도 여행 버킷리스트이다.

탐방의 출발점인 동백동산습지센터.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탐방의 출발점인 동백동산습지센터.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이끼와 고목들이 우거진 상돌언덕.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이끼와 고목들이 우거진 상돌언덕.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일 년 내내 푸르른 비밀의 공간 
숲길 탐방은 동백동산 습지센터에서 출발한다. 주차 시설이 잘 되어 있으며 습지센터에는 동백동산에 관한 자세한 설명과 안내 자료들이 비치되어 먼저 들러보면 탐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탐방로 전체 길이는 5km 남짓하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형 코스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걷는 다면 2시간 안팎 소요된다. 

동백동산 입구는 마치 비밀의 숲으로 통하는 문처럼 보인다. 그 문턱을 넘으면 순식간에 깊은 숲 속에 빠져든다. 이곳에서는 계절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사계절 내내 잎을 피워내는 상록수들이 온종일 푸름을 뽐낸다. 심지어 한겨울에도 동백동산은 푸릇푸릇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한발씩 내딛을 때마다 동백동산 앞에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평지에 펼쳐진 난대상록수림’이란 문구가 괜히 붙은 게 아니란 생각이 절로 든다.

동백동산은 곶자왈 지대에 형성된 상록수림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숲이다. 그중 하나가 봄부터 가을까지 겨울을 제외하고는 어느 계절이든 낙엽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닥에 깔린 낙엽을 볼 때는 지금이 가을인가 싶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해 도저히 계절을 헤아릴 수 없다. 동백동산이 품은 신비한 풍경 가운데 하나다. 

알쏭달쏭한 자연의 신비는 이렇다. 보통 나무들은 온도가 낮아지는 가을이 되면 헌 잎을 떨구고 겨울을 지나 봄에 새 잎을 틔우게 마련이지만 곶자왈 특성상 사계절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다 보니 겨울에도 잎사귀들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결국 봄이 되어 새 잎이 헌 잎을 밀어내게 되고, 그제야 떨궈진 잎들이 낙엽처럼 바닥에 깔려 마치 계절이 뒤섞인 듯한 오묘한 풍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봄에 떨어진 낙엽 사이를 지나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어느 계절을 걷고 있는 것일까.

제주4.3의 아픔을 품고 있는 도틀굴.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제주4.3의 아픔을 품고 있는 도틀굴.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멍을 즐기는 탐방객.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숲멍을 즐기는 탐방객.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해온 숲
숲길을 얼마 걷지 않았는데 도틀굴이란 이정표가 나타난다. 제주4.3이라는 섬을 할퀴고 간 깊은 상처가 동백동산에까지 미친 흔적이다. 제주4.3사건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이곳 도틀굴까지 숨어들었다. 지금은 굴 입구가 막혀 있지만 언뜻 보기에도 좁고 캄캄해 도저히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도틀굴은 토벌대에게 발각되었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잠시 눈을 감고 묵념을 올린다. 그 순간에도 마을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해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좁은 오솔길은 어느새 둘 셋이 함께 걸어도 넉넉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탐방로 양쪽으로 키 큰 상록수와 낮은 관목들이 서로 경쟁하듯 자라고 그 주위로는 고사리와 같은 양치류가 두터운 융단처럼 깔려 있다. 여전히 하늘은 초록빛이고 푸른 이끼가 가득한 바위틈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보면 볼수록 감탄하게 되는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이다.

독특하게 생긴 버섯.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독특하게 생긴 버섯.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상돌언덕은 동백동산 곳곳에 형성된 용암언덕 중 가장 큰 곳이다. 언덕을 오르는 계단 주변에 이리저리 뒤엉킨 덩굴들과 오래된 이끼들이 마치 태곳적 신들을 모시던 제단을 연상시킨다. 괜히 마음이 엄숙하고 경건해진다. 예전엔 언덕에 오르면 멀리 함덕 바다까지 보였다지만 워낙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란 바람에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푸른 숲의 바다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숯 가마터란 이정표에 잠시 샛길로 접어든다. 검은 현무암 무더기가 잔뜩 널려 있는 곳에서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쳐본다. 저곳에 있는 나무를 벌채해 이곳 가마터에서 숯을 굽고, 조금 떨어진 터에서 움막을 짓고 며칠을 기다렸다 마을로 갔을까. 참으로 고된 생활상이다. 옛 사람들의 흔적을 되짚고 나니 지금 우리는 얼마나 풍족하고 편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새삼 감사한 마음이 된다.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동ㅇ백동산의 먼물깍.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람사르습지로 등록된 동백동산의 먼물깍.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또 다른 습지 지대인 선흘반못.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또 다른 습지 지대인 선흘반못.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또 다른 습지 지대인 흐린내생태공원.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또 다른 습지 지대인 흐린내생태공원.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동백동산의 하이라이트, 먼물깍
숲의 정취에 취해 한참을 걷다 보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또 다른 풍경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동백동산이 숨겨 놓은 반짝이는 보석, 먼물깍에 닿은 것이다. 동백동산에 크고 작은 습지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못이다. 

잔잔한 연못처럼 보이는 먼물깍은 땅 속이나 바위 틈에서 샘솟는 용천수가 아닌 하늘에서 내린 비를 담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이곳 지형이 점성이 낮은 파호이호이 용암(pahoehoe lava) 지대이기 때문이다. 움푹 팬 용암 지대에 물이 빠지지 않고 고여 있으면서 동백동산에 수많은 습지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비가 오면 땅 속으로 모두 물이 스며들어 버리는 제주에서는 참으로 진귀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 마음도 차분해진다. 적막을 깨고 개구리 한 마리가 풀쩍 뛰어오른다. 먼물깍에는 비바리뱀과 물장군, 긴꼬리딱새와 같은 멸종 위기의 생물들이 산다는데 워낙 희귀해 직접 보기는 어렵다. 아무쪼록 이들이 오래오래 평화를 유지하게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마음 속 깊이 빌어본다.  
먼물깍에서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탐방 코스를 따라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다. 숲길마다 조금씩 다른 풍경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선흘리 곶자왈 지대에 형성된 또 다른 습지 지대인 흐린내 생태공원도 함께 둘러보기를 권한다. 울창한 숲인 동백동산과는 색다른 분위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곳 습지에는 연꽃이 가득하며 탐방길마다 억새가 가득해 가을 정취에 물씬 젖어들 수 있다. 
 

또 다른 습지 지대인 선흘반못.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동백동산습지센터. 사진 / 김도형 사진작가

INFO 동백동산습지센터
주소 제주 제주시 동백로 77
문의 064-784-9445(탐방안내소) http://ramsar.co.kr 

TIP
동백동산은 몇 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홀로 걷는 호젓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점점 유명세가 더해지면서 방문객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나 홀로 걷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면 평일 오전 시간을 추천한다. 해설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더욱 유익한 탐방이 된다. 동백동산과 관련한 인문, 역사, 생태학적인 이야기들이 흥미를 끈다. 동백동산 습지센터를 통해 사전 예약하면 된다. 탐방할 때는 안전을 위해 운동화나 트레킹화를 착용해야 하며 구두나 샌들은 입장이 제한될 수 있다. 숲 지대가 완만하고 평지여서 아이들과 탐방도 가능하지만 울퉁불퉁한 돌길이 많고 나무뿌리가 돌출되어 있는 곳들이 많아 탐방 시 주의 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