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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자전거 세우고 한참을… 여주 이포보, 경관·역사의 물비늘
자전거 세우고 한참을… 여주 이포보, 경관·역사의 물비늘
  • 박정웅 기자
  • 승인 2021.09.14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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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두바퀴 여행 ⑥ 남한강자전거길 이포보 일대
이포보·이포나루·파사성, 둘러볼 데 많은 천서리
파사산 자락에 자신을 묻은 윤기현 동화작가
남한강자전거길에서 본 여주 이포보. 사진 / 박정웅 기자
경기 여주시 파사성과 남한강 일대 조망. 사진 / 박정웅 기자
당남리섬 인근의 남한강자전거길을 달리는 라이더들. 사진 / 박정웅 기자
당남리섬 인근의 남한강자전거길을 달리는 라이더들. 사진 / 박정웅 기자

[여행스케치=여주(경기)] 남한강자전거길은 수도권 자전거 여행 명소로 꼽힌다. 남한강의 수려한 자연경관에 경의중앙선(팔당역-양평역)으로 이어지는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은 까닭이다. 자전거 전철 휴대승차가 가능한 주말이면 남한강자전거길이 붐비는 이유이다.

팔당대교에서 충주호까지 이어지는 남한강자전거길의 한복판인 여주 이포보를 찾았다. 특히 이곳 구간은 자전거길이 워낙 잘 닦여 있어 질주 본능을 자극한다. 다만 여행 목적지로 여정을 계획한다면 차분하게 둘러볼 데가 많다. 자전거길과 맞닿은 이포보, 당남리섬, 이포나루를 비롯해 역사와 경관을 두루 갖춘 파사성이 있어서다. 남한강자전거길에서 팔당의 초계국수와 쌍벽을 이루는 천서리의 막국수는 자전거 여행객에게 별미다.  

이포대교에서 바라본 이포보 전경. 사진 / 박정웅 기자
이포대교에서 바라본 이포보 전경. 보 상단의 둥근 모양은 백로의 알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진 / 박정웅 기자

백로 날아드는 이포보, 이포나루의 추억
양평에서 여주 권역으로 들어오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이포보다. 여주의 상징 새인 백로의 날개 위에 알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어떤 이는 이 알을 쌀로 여긴다. 그만큼 유명한 여주의 쌀에서 비롯한 듯하다. ‘해몽’이야 각자의 몫이기 마련. 이포보는 4대강 사업으로 생긴 16개 보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남리섬 경관농업단지는 가족 여행객에게 좋은 나들이 장소다. 사진 / 박정웅 기자
당남리섬 경관농업단지는 가족 여행객에게 좋은 나들이 장소다. 사진 / 박정웅 기자

이포보는 당남리섬으로 이어진다. 하중도에는 그린광장, 야생초화원, 자전거길,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다. 걷거나 자전거만 들어갈 수 있어 가족 나들이 장소로 좋다. 라벤더 등이 식재된 경관농업단지를 두루 걸음해볼 만하다.   

당남리섬 맞은편은 이포(利浦) 나루다. 번성했던 나루의 흔적은 터로 남았다. 이포나루터를 찾는 이는 많지 않다. 강 건너편에 있는 탓이다. 1991년 이포대교 개통으로 도선 운행이 중단되면서 나루는 추억으로 남았다. 이포대교와 이포보의 명칭 모두 나루인 이포에서 따 온 것이다.  

당남리섬에서 강 건너 이포나루가 있던 곳이 보인다. 사진 / 박정웅 기자
당남리섬에서 강 건너 이포나루가 있던 곳이 보인다. 사진 / 박정웅 기자
번성했던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이포나루비. 사진 / 박정웅 기자
번성했던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이포나루비. 사진 / 박정웅 기자
이포나루터가 있던 곳의 안내석 뒤로 이포보와 오른쪽 파사산이 보인다. 사진 / 박정웅 기자

이포나루는 서울의 마포나루·광나루, 여주의 조포나루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였다.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던 중요한 나루터로, 한때는 조창의 기능을 했다. 남한강을 따라 강원도에서 서울을 잇는 물길의 중심지로서 내륙을 오가는 행인과 산물의 교통로였다. 또 뗏목 수송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머물며 이 일대에 상권이 형성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인근 상호리의 큰 금광 덕에 번성했다.

이포나루는 비운의 역사를 함께한다. 조선시대 단종이 숙부인 세조로 말미암아 영월로 유배를 가면서 한양을 그리워하며 통곡했다는 곳이다. 고종19년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에서 사흘을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전쟁 때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파사성과 남한강 이포대교 일대 조망.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성과 남한강 이포대교 일대 조망. 사진 / 박정웅 기자

남한강 조망이 한눈에… 파사성 여행
이포보 자전거 여행의 쉼표가 있다. 수상로와 육상로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한 파사성(사적 251호)이 그곳이다. 이포보 인증센터 옆 현수교(파사성 보도현수교)를 건너면 파사성 여행이 시작된다. 현수교는 파사성 성문의 형상을 주탑 디자인으로 차용한 경관 교량이다. 

파사성의 남문. 바로 위에는 유물발굴이 한창이다.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성은 남한강 동쪽에 있는 파사산(230m)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곳은 한강의 수상 교통과 중부 내륙의 육상 교통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다. 성에 오르면 주변의 넓은 한강 유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성은 둘레 1800m에 최대 높이 6.5m로 규모가 큰 편이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일부 구간은 최근 복원됐다.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주요 지점에는 치(곡성)와 포루 터가 있다. 동문과 남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남문 터에서는 문루의 팔각 주춧돌과 불에 탄 성문의 흔적이 발견됐다. 성 안에서는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 여러 시기의 건물터가 확인돼 파사성이 오랜 기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성 성벽 위의 연인 소나무. 이 길은 남한강 걷기여행길인 여강길에 속한다.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80~112년 재위)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지역은 백제 영역에 속했다. 발굴 조사 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성벽의 쌓기 방식, 성문의 형태 등으로 볼 때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사성은 임진왜란 때 다시 만들어졌다.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승군이 3년에 걸쳐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전체적인 성으로 다시 쌓은 것. 남아 있는 성벽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다시 축조했다. 파사성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매우 아름다워 고려의 이색과 조선의 유성룡이 시로 남기기도 했다.

파사성에서 바라본 당남리섬 전경.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성에서 바라본 당남리섬 전경.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산의 마애여래입상.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산의 마애여래입상.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성은 남한강 걷기여행길인 여강길 8코스(파사성길)에 속한다. 당남리섬 입구-현수교-파사성 정상-수호사-신내천-느네마을 순환코스(약 5.4km)다. 다만 파사성 정상에서 수호사로 향하는 구간은 파사성 동문지 보수공사 때문에 폐쇄됐다. 

천서리막국수촌의 막국수는 자전거 여행객에게 별미로 통한다. 사진 / 박정웅 기자
천서리막국수촌의 막국수는 자전거 여행객에게 별미로 통한다. 사진 / 박정웅 기자

파사산 정상에서 숲길로 내려가면 마애불(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이 있다. 커다란 불상은 바위의 앞면을 깎아서 선으로 새겨 조각했다. 여러 형태에서 고려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애불 오른편 바위 사이에는 석간수가 흐른다. 현수교부터 파사성, 마애불까지 파사성 여행은 2시간이면 넉넉하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날쏜가. 파사산을 내려온 발걸음은 천서리 막국수촌으로 이어진다. 

‘개똥벌레’ 그 소년, 다시 ‘세상의 빛’으로
자전거길에서 만난 사람 ② 윤기현 동화작가

얼쑤마을 농막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윤기현 동화작가. 그의 손에는 자신이 직접 기른 찰진 토마토가 담겨 있다. 사진 / 박정웅 기자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왜랄 것도 없었다. 노인은 눈을 감고는 동요 <과꽃>을 불렀다. 고운 노랫소리가 농막에 지긋이 울려 퍼졌다. 들녘 풀벌레들은 숨을 죽였다. 한 소절로 족했다. 잠시 흐르던 정적은 풀벌레들이 깼다. 노인은 생기 가득한 소년이었다.

파사산 자락, 얼쑤마을(얼쑤농장)에서 윤기현 동화작가(72)를 만났다. 1976년 <사랑의 빛>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로 간 허수아비> <보리타작 하는 날> 등 다수의 동화집을 펴냈다. 윤 선생의 시는 교과서에 실렸다. 등단작 <사랑의 빛>은 신형원의 <개똥벌레> 가사가 됐다. 또 김민기의 노래극 <개똥이>로 이어졌다. 

윤 선생은 한국 아동문학에 큰 획을 그었다. 그의 작품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동화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꼬집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나고 자란 배경이 작품에 반영됐다. 그런 그는 아동문학에 머물지 않았다. 5·18에서 전남도청을 지켰고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역동적인 삶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했다. 그럼에도 아동문학을 향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서울시민대학에서 수많은 동화작가를 길러냈다. 무등산숲동화학교의 교장으로서 지역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현재 어린이문학(계간)과 우리말우리얼(격월간) 주간을 맡고 있다.  

세상에 나선 소년은 노인이 됐다. 2019년 4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 암은 온몸으로 퍼져나간 상태였다. 그를 받아줄 곳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윤 선생은 지난해 병 깊은 노구를 파사산 자락에 묻었다. 암 덩어리는 기도를 짓눌렀다. 목소리마저 거의 잃었다. 회생을 위한 몸부림이 이어졌다. 신약 임상과 자신이 터득한 비법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목이 다시 열린 윤 선생은 이날 <과꽃>을 불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곱던지 하마터면 <개똥벌레>까지 불러달라고 할 뻔했다. 

윤 선생은 얼쑤마을에서 자신을 돌본다. 그는 “얼쑤마을에서 함께 땀 흘려 일한다. 기운이 생기고 입맛이 돈다. 몸이 좋아지는 선순환 구조가 이어진다”고 귀띔했다. 직접 기른 농산물로 몸을 채우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면서 마음을 살찌운다는 것. 그러면서 윤 선생은 “요즘 소외라는 걸 생각한다. 병 든 노인으로서 내 자신이 그렇다. 차이를 떠나 사회에서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곧 병이 된다”며 “이러한 사람들이 어울려 다시 신명을 찾는 얼쑤마을은 누구든 환영한다”고 말했다.

치유와 함께 윤 선생은 새로운 여정에 오를 예정이다. 5·18과 농민운동에 대한 정리, 노래극 공연, 동화 창작 등이 그것이다. 이중 그의 동화 창작에 관심이 끌린다. 윤 선생은 “과거엔 국가폭력에 억압된 자유와 대물림되는 가난에서 해방되는 세상을 꿈꿨다”면서 “이번에는 소외나 생존경쟁에서 말미암은 배움의 강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학이 메마른 시대, 동화작가로서 그가 어떤 이야기로 돌아올지 기대된다.

박정웅 기자 sutr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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