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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남해바래길 걷기여행 ⑪] 백성이 지킨 남해의 산성길 따라
[남해바래길 걷기여행 ⑪] 백성이 지킨 남해의 산성길 따라
  • 황소영 객원기자
  • 승인 2021.10.1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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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코스 임진성길
구간 시작점인 평촌마을. 바다가 있는 항구에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도로까지 올라와야 한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구간 시작점인 평촌마을. 바다가 있는 항구에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도로까지 올라와야 한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여행스케치=남해] 섬의 둘레길이라고 편히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남해읍에서 출발한 1코스와 2코스를 제하면 본선 16개 구간 중 쉬운 곳은 하나도 없다. 길은 바다와 마을과 도로를 지나지만 때로는 두어 개씩 산을 넘기도 한다. 여름이 떠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추위보다 힘든 건 더위였다.

이번 구간은 평산마을(바래길작은미술관)~오리마을~임진성~남구마을~천황산(394.9m) 임도~장항해변~서상항 13.9km의 길로 휴식 포함 5시간쯤 걸린다. 구간 마지막에 장항해변을 지나지만 전체적으로 산중 임도와 논밭이 많은 길이다. 특히 고실치를 넘는 4.5km의 임도엔 중간 탈출로가 없으므로 해가 질 무렵엔 넘지 않는 게 좋다. 장항해변은 ‘오션뷰’ 명소들이 많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임진성길은 남파랑길 제44코스이기도 하다.

11코스 다랭이지겟길의 종점이자 12코스 임진성길의 출발점. 이 앞에 바래길작은미술관이 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11코스 다랭이지겟길의 종점이자 12코스 임진성길의 출발점. 이 앞에 바래길작은미술관이 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남해스포츠파크에 있는 구본주 작가의 '성공시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남해스포츠파크에 있는 구본주 작가의 '성공시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남구마을과 장항마을 사이의 천황산 임도. 약 4.5km로 해 질 무렵엔 넘지 않는 게 좋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남구마을과 장항마을 사이의 천황산 임도. 약 4.5km로 해 질 무렵엔 넘지 않는 게 좋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평산항에서 오리마을까지
버스는 지난달과 똑같은 시간에 남해로 떠났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 달 전과 달라져 있었다. 남쪽의 가을은 북쪽보다 늦다. 그 더딘 속도 속에서도 계절은 어김없이 한껏 물오른 색으로 농익어 있었다. 11코스(다랭이지겟길) 종점인 평산마을에서 12코스가 시작된다. 

거리와 속도는 11코스와 거의 같지만 난이도의 빨간별은 이번 코스에 한 개가 더 붙었다. 더위가 꺾여서일까. 오히려 흠뻑 땀을 쏟았던 지난달과는 달리 임진성길 걷기여행은 별 네 개가 무색하게 가벼웠다. 어쩌면 함께 걸어줄 동행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두 달만에 홀로 걷기에서 탈피한 길이기도 했다.

바래길작은미술관은 문이 닫혔다. 하필이면 휴무인 월요일이었고, 월요일이 아니어도 이른 시간엔 문을 열지 않는다. 한 달 전 길을 끝낸 골목을 등진다. 바다 옆 마을에서 도로까진 가파른 오르막이다. 등산도 아닌데 숨이 가쁘다. 

무엇을 심고 있을까? 어쩌면 마늘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무엇을 심고 있을까? 어쩌면 마늘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4.5km의 임도구간으로 1시간 30분쯤 걸린다. 해가 질 무렵이라면 마을로 돌아가는 게 낫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4.5km의 임도구간으로 1시간 30분쯤 걸린다. 해가 질 무렵이라면 마을로 돌아가는 게 낫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이 길을 매일 오갈 아낙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아니 운동으로 단련이 되었을까. 하루 종일 흐릴 것이라는 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조금씩 개고 있었다. 발아래 바다를 놓아두고 도로를 건넌다. 좁은 포장 임도에 핀 파랑 달개비와 보라색 물봉선은 마지막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임도 끝에 경남도기념물 제155호 ‘전 백이정의 묘’가 있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나보다 싶었는데, 앞 전(前)자가 아니라 전할 전(傳), 그러니까 백이정(1247∼1323)의 묘로 전해지는 곳이다. 백이정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확립한 고려시대 유학자다. 남해엔 백이정 등을 모신 사당 난곡사도 있다. 가볼까, 하다가 관둔다. 

바래길만도 약 14km, 묘까지 왕복 2km를 더할 시간도 체력도 없다. 길은 도로를 건너 오리마을로 이어지다 2차선 도로로 들어선다. 왼쪽으로 ‘아난티CC’가 보인다. 낮은 산에서 흘러온 민물은 대규모 골프단지를 반으로 가른 짠물과 합류해 멀리 사라졌다.

한반도바래길은 임진성 맞은편 귀비산에도 있다. 바래길과 남파랑길에 비해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한반도바래길은 임진성 맞은편 귀비산에도 있다. 바래길과 남파랑길에 비해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이번 구간 이름인 ‘임진성길’은 이 산성에서 유래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이번 구간 이름인 ‘임진성길’은 이 산성에서 유래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임진성, 백성이 만들고 지킨 성
도로는 편의점에서 끝났다. 편의점을 기점으로 오르막이 시작되고, 오르막은 기림산(110m) 정상의 임진성(경남도기념물 제20호)으로 가 닿았다. 임진성 앞엔 ‘한반도바래길-임진성 코스’라고 쓰인 안내판이 있다. 맞은편 귀비산에도 한반도바래길 이정표가 있지만 별다른 홍보가 없어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임진성은 이름 그대로 임진왜란 당시 민관군이 힘을 합쳐 쌓은 민보성인데, 최초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성내 집수지와 채집된 토기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 이전에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 둘레가 약 300m인 내성은 돌로, 외성은 흙으로 쌓았지만 지금은 흔적만 조금 남았다. 지난달 봤던 설흘산 봉수대와 함께 조선시대 왜적 방어의 주요 기지였단다.

박진욱이 쓴 <남해유배지답사기>에는 “남해 사람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남해의 산성은 왜구와의 끈질긴 투쟁 가운데서 생겨났다”라고 기록돼 있다. 성은 이제 그 기능을 잃었다. 설령 적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고성능 무기를 이 석축으로 막아낼 순 없다. 까맣게 입을 벌린 좁은 성벽은 뱀들의 터전이 됐다. 꺅! 사진을 찍느라 바닥을 내려볼 틈이 없었는데 굵직한 유혈목이 한 마리가 재빨리 돌 속으로 사라진다. 놀란 가슴 진정하라고 성밖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춤을 춘다.

산성을 벗어난 길은 남구마을 큰 도로로 연결된다. 벼는 꽉 찬 노란색이었다. 이미 몇몇 농가는 벼 베기를 끝냈고 ‘아세아결속기’라고 적힌 초록색 차는 논바닥에 깔린 짚을 모아 타원형 뭉치로 만들었다. 털털털, 원형결속기가 뿌연 먼지 속을 달렸다. 하얀 교회 건물 아래서 배낭에 넣어온 간식을 먹는다. 이제 고실치를 넘는 4.5km, 마을과 마을로 치면 그보다 더 먼 거리인 천황산 임도를 넘어야 한다.

섬이지만 논농사도 제법 크게 짓는 남해. 가을 들녘을 지나 남구마을로 길이 이어진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섬이지만 논농사도 제법 크게 짓는 남해. 가을 들녘을 지나 남구마을로 길이 이어진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옹벽으로 나뉜 장항해변. 평산항을 제하곤 유일하게 바다 곁을 걷는 길이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옹벽으로 나뉜 장항해변. 평산항을 제하곤 유일하게 바다 곁을 걷는 길이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임진왜란 때 민관군이 힘을 합쳐 쌓은 임진성. 경남도기념물 제20호이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임진왜란 때 민관군이 힘을 합쳐 쌓은 임진성. 경남도기념물 제20호이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장항해변, 산에서 바다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기다란 안내 리본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제멋대로 흔들렸다. 공기는 선선했지만 한낮 볕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이 금세 벌겋게 익었다. 여름에 이 구간을 걷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긴 거리에 비해 그늘은 귀했다. 그러고 보니 남해바래길은 은근히 힘들다. 열두 구간을 걸어오는 동안 산길을 걷지 않았던 적이 별로 없다. 혹시 또 뱀을 만날까 싶어 기다란 막대기를 주워 쥔다. 뱀은 나타나지 않았다. 녀석에겐 오히려 인간이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고실치 1.1km(22분) 이정표는 있지만 정작 그 고개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이정표는 없다. 아마 벤치가 있는 임도 정상이 고실치인 모양이다. 길은 내리막으로 치닫다 살짝 올라선 후에 줄곧 산 아래를 향해 내리꽂힌다. 너덜지대 곁엔 새로 지은 기와지붕 정자가 있다. 차량 통행이 쉽지 않으니 오로지 이 길을 걷거나 달리는 이들의 휴식처다. 배낭을 내리고 한숨 누워 자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장항마을로 향한다.

남해스포츠파크와 서상항을 잇는 이 다리를 건너면 12코스도 끝을 맺는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남해스포츠파크와 서상항을 잇는 이 다리를 건너면 12코스도 끝을 맺는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장항해변의 방풍림. 이른바 '핫플'이 많아 평일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장항해변의 방풍림. 이른바 '핫플'이 많아 평일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하늘하늘 코스모스가 가을 걷기여행의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하늘하늘 코스모스가 가을 걷기여행의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구간 종점인 스포츠파크 가는 길. 나뭇잎에 어여쁜 물이 들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구간 종점인 스포츠파크 가는 길. 나뭇잎에 어여쁜 물이 들었다.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내내 마을과 도로와 임도를 따르느라 정작 섬이란 걸 잊고 있었는데, 구간 막판에 만난 장항해변은 걸어온 길을 보답이라도 하듯 예쁘게 펼쳐졌다. 옹벽을 기준으로 왼쪽엔 바다, 오른쪽엔 방풍림 같은 숲! 평일 오후인데도 숲속 테이블은 사람들로 붐볐다. 카페와 수제버거 전문점 등이 이곳에 자리한 까닭이다. 줄을 설 만큼 인기가 좋은 ‘오션뷰 맛집’들을 뒤로 하고 숲을 벗어난다.

바다만큼 활기찬 스포츠파크를 지나 빨간 구름다리를 건넌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은 망운산과 괴음산으로부터 흘러왔다. 아, 벼 수확이 한창인 남구마을 너머로 망운산이 보였었다. 다음 달에 걷게 될 13코스(바다노을길)는 망운산과 더 가깝다. 금산, 호구산, 설흘산…. 섬에는 좋은 산도 많다. 길은 다음 달 출발지인 서상항에서 끝난다.

 

바래길작은미술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바래길작은미술관.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INFO 바래길작은미술관
구간 종점인 평산마을에 있는 문화공간이다. 폐쇄된 보건소를 개조한 것으로 2015년 10월에 문을 열었다. 무료관람이 가능하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11월 7일까지 김희곤 작가의 ‘웨이브 온 웨이브(wave on wave)’ 전이 열린다.
주소 경남 남해군 남면 남면로1739번길 46-1 

임진성.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임진성.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INFO 임진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20호로 총 크기는 1만 6460㎡이다. 내성은 주위가 300m인 석축성이고 외성은 토성으로 흔적만 남아 있다. 성벽은 임진왜란 때 민관군이 힘을 합해 축성한 것으로 민보산성이라고도 한다. 부근에 고인돌과 조개무지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초의 축성연대는 정확히 추정하기 어렵다.
주소 경남 남해군 남면 상가리 산291

헐스밴드.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헐스밴드. 사진 / 황소영 객원기자

INFO 헐스밴드
바래길 바로 옆, 장항해변에 있다. 아메리카노 4000원, 페페로니화덕피자 1만6000원, 고르곤졸라화덕피자 1만7000원이다. 매장 앞에 너른 숲과 바다를 볼 수 있는 야외 테이블이 있어 인기가 좋다. 헐스밴드 직전에 카페 ‘보통날’이 있다. 남해 특산물인 수제유자차 5000원, 단호박라떼 6000원이다. 두 곳 다 수요일엔 문을 닫는다. 수제버거 전문점 ‘더풀’도 줄을 설 만큼 찾는 이가 많다. 화요일 휴무.
주소 경남 남해군 서면 남서대로1517번길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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