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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친일파의 세컨드하우스에서 임정 청사로… 김구의 사저, 경교장
친일파의 세컨드하우스에서 임정 청사로… 김구의 사저, 경교장
  • 임요희 여행작가
  • 승인 2022.09.15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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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은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다.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서울] 서울은 아름답다. 드문드문 보이는 근대 건축물이 첨단의 고층빌딩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고풍스럽고 멋있지만 시대자체가 고통이었기에 근대 건축에는 아픈 기억이 스며 있다.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을 다녀왔다.

“서울은 그 자체로 거대한 박물관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잠들어 있고, 짧았지만 뜨거웠던 근대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으리으리한 벽난로를 들이고, 다다미를 깔았지만 온돌 문화에 익숙한 최창학에게 서구식 저택은 결코 편한 집이 아니었다.” 아픈 기억도 기억이다. 아픈 역사일수록 두고두고 곱씹어야 다시는 같은 아픔을 겪지 않는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다. 김구 선생이 서거했을 때 경교장 마당은 사흘 밤 사흘 낮 통곡의 바다를 이루었다. 한국사의 아픔이 서린 경교장.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되살린 것은 시민들이었다.

강북삼성병원 부지 내에 자리 잡은 경교장.
강북삼성병원 부지 내에 자리 잡은 경교장.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동대문에는 이화장, 서대문에는 경교장

종로구 평동에 ‘경교장’이 있었다면, 종로구 이화동에는 ‘이화장’이 있었다. 이화장은 이승만의 사저였다. ‘경교장’과 ‘이화장’은 우익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마치 ‘상도동’과 ‘동교동’이 진보 계열의 라이벌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경교장의 원래 소유주는 평안남도에서 금광업으로 떼부자가 된 최창학이었다.

당시 부자라면 서양식 저택을 한 채쯤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경성고공 출신의 건축가 김세연(1897~1975)에게 설계를 의뢰했고, 1938년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대저택이 완공되었다. 최창학은 처음에 이 집을 죽첨장(竹添莊)이라고 명명했다. 한자로는 ‘대나무를 보탠다’는 뜻이지만 갑신정변 때 일본 공사를 지낸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이름을 빌린 것뿐이었다. ‘죽첨’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다케조에’가 되는데 친일파였던 최창학이 일본에 아부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었다.

최창학이 과시용으로 설치한 벽난로.
최창학이 과시용으로 설치한 벽난로.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사실 최창학은 이곳에서 살지 않았다. 응접실에는 서구식 벽난로를 들이고, 침실은 다다미방으로 꾸몄지만 온돌 문화에 익숙한 그에게 죽첨장은 결코 편한 집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뒤편의 한옥에 머물렀고 죽첨장은 그저 손님이 오면 차를 대접하는 용도로 활용했다.

평양행을 위한 경교장 탈출극 ‘죽첨장’이 ‘경교장’이 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가 해방을 맞아 상하이에서 귀국했다. 최창학은 임정 요원들이 지낼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을 알고 재빨리 이 집을 제공했다. 김구 선생은 이 집에 경교장(京橋莊)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경교는 서대문 근처에 있었던 작은 다리였다.

라이프지에 실렸던 경교장 앞 신탁통치 반대시위.
라이프지에 실렸던 경교장 앞 신탁통치 반대시위.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경교장에서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가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집을 막 나설 때였다. 선생이 평양에 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며 시민들이 경교장 마당에 드러누웠다. “가시려거든 저희를 밟고 가십시오.” 김구는 하는 수 없이 지하 보일러실 북측의 작은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고 그 길로 차를 몰아 시간 안에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장소지만 경교장에 잇대어 병원 건물을 짓느라 안타깝게도 이 문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경교장 홀의 김구 흉상.
경교장 홀의 김구 흉상.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철거 위기를 벗어나 서울역사박물관이 되다

1949년 김구가 2층 창가에 앉아 서예를 하던 중 안두희에게 타살되었다. 통일 정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최창학은 가장을 잃은 유족들에게 집세를 요구했다. 유족은 경교장을 반납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천하를 호령하던 최창학도 가세가 기울어 결국 경교장을 처분해야 했다. 경교장은 중화민국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삼성 그룹에서 인수했다. 경교장은 오랫동안 강북삼성병원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는데 1996년 병원 증축 과정에서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시민들의 보존 요구가 이어지면서 경교장은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2005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2010년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창가에서 서예를 하다 서거했다. 안내판이 세워진 곳이 안두희가 총을 쏜 자리.
선생은 창가에서 서예를 하다 서거했다. 안내판이 세워진 곳이 안두희가 총을 쏜 자리.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안두희가 쏭을 쏜 자리의 안내판.
안두희가 쏭을 쏜 자리의 안내판.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김구선생 서거 당시 유리창에 남은 총알자국.
김구선생 서거 당시 유리창에 남은 총알자국.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복원 팀은 건축 당시의 설계도면과 임시정부 때의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응접실의 벽난로, 의자, 커튼은 물론 침실의 다다미와 욕실 타일까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심지어 김구의 서거 때 생긴 유리창 총탄 자국까지 고스란히 복원했다.

2013년 3월, 경교장은 서울역사박물관의 일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을 총망라한 전시공간으로 시민에게 무료 개방되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이 부자이기보다 문화강국이 되길 바랐다. 선생이 생을 마감한 지 100년도 되지 않아 한국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강국이 되었다. 주말 하루 경교장을 둘러보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되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복원 전 타일과 복원 후 재현한 타일.
복원 전 타일과 복원 후 재현한 타일. 사진/ 임요희 객원기자

 

INFO 경교장

운영시간 10:00~18:00, 월요일 휴무

주소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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