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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호남의 금강산'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 순창 강천사
'호남의 금강산'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 순창 강천사
  • 박상대 기자
  • 승인 2016.11.10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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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산에 있는 현수교. 강천산의 아름다운 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사진 제공 / 순창군청
2003년에 인공으로 조성된 병풍 폭포는 높이 40m의 자연 형상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연미와 웅장함이 살아 있다. 사진 제공 / 순창군청

[여행스케치=전북]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강천산, 그리고 음양오행과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가 절을 세우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기 전 머물다 갔다는 강천사. 전북에서 가장 아름다움 현수교가 있다는 강천산 계곡에도 가을이 무르익었다.

보물 같은 비포장 웰빙산책로
 

2005년에 조성된 2.5㎞의 웰빙 산책로는 맨발로 걸어다닐 수 있다. 사진 제공 / 순창군청

순창에 있는 강천산(剛泉山)의 본명은 광덕산(光德山)이다. 전남과 전북을 아우르고 있는 이 산은 멀리서 보면 크고 산에 올라서 보면 넉넉하다.

주봉은 왕자봉이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산성산(603m)이다.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르고, 계곡이 깊고, 바위절벽과 폭포가 있는 멋진 산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강천산을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렀고, 1981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순창읍내에서 북쪽으로 10분 남짓 자동차를 달려가면 강천산호수가 나타난다. 강천산호수를 끼고 좌회전하면 강천산 입구에 다다른다.

강천산은 초입부터 계곡을 따라 걷을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요즘 전국의 산이나 사찰에 가보면 많은 진입로가 아스콘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런데 강천산은 아직 비포장길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마주할 수 있다. 이 길을 포장하자는 목소리가 왜 없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포장문제를 놓고 만지작거렸을 게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천사에 거주하는 스님들과 순창군에서는 포장 대신 맨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웰빙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참 좋네요. 강천산의 보물이에요. 이 숲길을 걷는 재미로 이 산에 다닙니다. 콘크리트나 아스콘 포장길에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광주에서 왔다는 최영소 씨는 손을 흔들며 휙 지나간다.

강천산 입구에서 시작하는 웰빙산책로는 황토와 마사토를 깔아놓은 부드러운 흙길이라 발마사지를 겸한 맨발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강천산 현수교 위에서 촬영한 가을 풍경. 사진 제공 / 순창군청
강천사 대웅전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근래에 중건하였다. 사진 제공 / 순창군청
전쟁의 상처를 견디면서 강천사에서 자리를 지켜온 5층석탑. 사진 제공 / 순창군청

산중턱 현수교와 계곡이 아름다운 강천산
가을이라 많은 물이 흐르지 않지만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큼지막한 소(沼)에서는 물고기를 낚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상습적인 낚시꾼은 아니고 아이들과 재미로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라 아름다워 보인다. 40m 절벽에서는 폭포가 쏟아지고 여행객들은 저마다 폭포 앞에서 멋진 포즈를 잡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강천산도 사계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봄에는 진달래와 벚꽃,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폭포와 계곡과 숲길, 가을에는 수많은 활엽수들이 새 옷을 갈아입는 단풍, 겨울에는 잔설로 뒤덮인다.

강천사를 지나 산을 오르면 깎아지른 계곡에 만들어진, 길이 76m에 달한 현수교가 있다. 산중턱에 설치된 현수교는 호남 제일을 자랑하는 구름다리라고 순창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현수교를 건너다가 좌우를 살피면 멋진 폭포를 구경할 수 있고, 기암괴석들로 꾸며진 산세를 감상할 수 있다. 왜 강천산을 호남의 금강산이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국사가 터를 잡은 강천사
강천산에는 천년고찰 강천사가 있다. 대여섯 가람 가운데 천 년 전 건축물은 없다. 그러나 887년, 신라 때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터를 잡았다고 하여 천년고찰이라 말한다.

도선은 전국을 유람하면서 수많은 절터를 잡아 주었는데 강천사도 그 중 하나다. 강천사는 그동안 수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지만 다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선이 수차례 전쟁을 겪을 것을 예상했는지, 폐허가 된 후에 다시 누군가가 나타나 재건할 것을 예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찰의 이름도 처음 도선국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복천사(福泉寺)라 하였다. 도선은 강천산에 들렀다가 산세가 마치 풍수지리상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하는 형상이라서 용천산(龍天山)으로 불렀고, 절 이름은 용천사(龍泉寺)라 지었다. 짐작컨대 계곡 물이 맑고, 마실 물이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당시 신라에는 불교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강천사도 국가적인 호국사상과 개인적인 기복신앙을 퍼뜨린 주요 사찰이었다. 강천사는 나날이 발전하여 소속된 암자가 명적암ㆍ연대암ㆍ용대암ㆍ왕주암ㆍ지적암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암자가 왕주암이다. 왕주암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후백제의 요충지인 금성(나주)을 점령한 후 이곳에서 잠시 머물렀다 돌아갔다. 그리하여 암자 이름을 왕주사(王住寺)라 명명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절에는 비구승보다 비구니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창건자 도선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부찰(富刹)이 되고, 도량이 정화된다”고 한 예언에 따른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비구승이 거처하고 있다. 강천사는 지금 부찰이나 빈찰 소리를 듣지 않고 조용한 산사일 뿐이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에 있는 오층석탑과 금강문, 삼인대 등이 있다. 이들 중 5층석탑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찰이 모두 불에 탔으나 홀로 이 터를 지켜왔다. 여기저기 청탄을 맞은 흔적과 돌멩이에 부딪쳐 망가진 흔적이 남아 있으나 가장 오래된 강천사의 유물인 것은 분명하다.

Info
강천사 터를 잡은 도선(道詵, 827~898)국사는 영암에서 태어난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지리설의 대가이다. 속성(俗姓)은 금씨이다. 도선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은 고려조선왕조에 지대한 영향을 준 학설이다.

일찍이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탄생과 고려의 건설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실제 왕건의 아버지에게 집터를 정해주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수많은 정치인과 고관, 재벌들이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을 추종하고 있으니 도선의 영향력이 천년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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