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원]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정사 청송 방호정 보면 볼수록 애매모호한 정자

2006-11-13     김진용 기자
[편집자주] 지난 2016년 7월 홈페이지를 개편한 <여행스케치>가 창간 16년을 맞이해 월간 <여행스케치> 창간호부터 최근까지 책자에 소개되었던 여행정보 기사를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나간 여행지의 소식을 게재하는 이유는 10년 전의 여행지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16년 전의 여행은 어떤 것에 관점을 두고 있었는지 등을 통해 소중한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사 아래에 해당 기사가 게재되었던 발행년도와 월을 첨부해 두었습니다. 
2006년

[여행스케치=청송] 묘하다. 방호정 절경에 넋을 놓고 있다 문득 정자 자체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건물 지붕이 그 첫 번째다. 왼쪽은 화려한 팔작지붕이로되, 오른쪽 정면으론 소박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깎아지른 절벽에 우뚝 서 날아갈 듯 호방해 보이다가도 또 한편 수줍은 듯 단풍숲에 숨어 있다. 이것인 듯도 저것인 듯도 한 이 조화로운 부조화, 왜일까?

<청송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청송이 보호감호소로 유명(?)하던 시절, 오지를 찾아가는 길의 대명사로 쓰였던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무공해 지역으로 가는, 힘들지만 청정한 길을 뜻하는 말이 되지 않았을까.

청송 신성천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안동 길안천으로 합쳐지면서 빚는 신성계곡과 길안천계곡은 주왕산과 주산지에 못지않은 굽이굽이 비경이다. 그 들머리 안덕면 신성리에 방호정(方壺亭)이 있다. 신성리 뒷산의 거대한 바위줄기가 뻗어내려 물길에 안기기 직전 빚어놓은 절벽에 ㄱ자형으로 그림처럼 서서, 산수정원을 빚고 있다.

방호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성격이 다른 팔작과 맞배 두 지붕이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기와 기술의 절정이라고도 할 팔작지붕은 알다시피 날개짓하는 듯한 장쾌함과 웅장함이 특징이라, 풍류를 즐기는 화려한 정자에 자주 사용된다 할 수 있다. 반면 맞배지붕은 소박함과 절제된 멋을 느낄 수 있어 깊은 숲속의 사색 장소나 학문 강론장에 어울릴 법한 지붕이다.

2006년

물과 숲과 절벽에 어울린 방호정의 전체적인 느낌 역시 이중적이다. 물길을 굽어보며 바위에 우뚝 올라선 모습은 자신의 풍류를 과시하려는 듯 호방하다. 하지만 몇 걸음만 옮겨 바라보면 행여나 제 모습이 눈에 띌까 단풍나무숲 사이로 숨어든 형국이다. 

ㄱ자 형태의 방호정 건물과 유사한 형태의 정자야 수없이 많을 것이다. 창덕궁의 제월광풍관이 그렇고,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이 그렇고, 멀리로는 영천의 조용준 가옥의 별당 연정이 또한 ㄱ자형이다. 그런데 활래정은 팔작지붕채가 누각 형태로 공중에 떠 있고 그 아래로 연못을 흘려보내면서 풍류를 자랑하고 있다. 제월광풍관은 연못으로 바로 이어지진 않지만 역시 양쪽 다 팔작으로 화려함을 한껏 뽐낸다. 이 정자들이 화려함이나 소박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한 반면, 방호정은 그 둘 다를 취한 점이 참 재밌다.

왜 그 건물을 지었는지를 알고 나면 그때 보이는 구조는 전과 같지 않다. 방호정은 특이하게도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건물이다. 방호 조준도(趙遵道, 1576~1665) 선생이 생모 권씨가 작고한 후 그 묘가 있는 산줄기 끝에 건립한 것이다. 방호정의 이중성은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상상의 나래가 펴진다. 

2006년
2006년

작고하신 어머니를 바라보며 지은 건물에서 어찌 함부로 노래와 술, 그리고 뱃놀이로 대표되는 풍류만을 자랑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이 천하절경의 풍취를 취하려 하면서 어찌 소박하기만 한 정자에 만족할 수 있었을까? 이 고민이 혹 방호정이 정(亭)의 모습과 정사(精舍)의 모습을 두루 갖춘, 갖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정(亭)은 “놀거나 쉬기 위하여, 주로 경치나 전망이 좋은 곳에 지은 정자”라 되어 있다. 정사(精舍)는 “학문을 가르치려고 지은 집, 혹은 정신을 수양하는 곳, 혹은 스님이 불도를 닦는 곳”이다. 선비가 모여 제자와 함께 학문을 강론하고 선현의 가르침을 되새기던 곳이다.

방호정은 ‘방호정’(方壺亭)이 아니라, ‘방호정사’(方壺精舍)로 불려야 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우선 마루방 2칸과 온돌방 한 칸을 갖추고 있고, 뒤쪽에 부엌과 한 칸짜리 온돌방도 더해져 있다. 잠시 놀다 가는 곳이 아니라 숙식을 겸한 기숙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주춧돌 역시 원이나 육각 모양으로 세련되게 다듬어 치장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절경의 언덕에 들어선 정자임에도, 엄숙하고 절제된 멋을 지켜야 할 강당의 요소를 빠뜨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호정 옆 건물의 이름이 방호강당(方壺講堂)이다.

2006년
2006년

방호정의 옛 이름이 ‘풍수당’(風樹堂)인 것 또한 그렇다. 얼핏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려는 이름처럼 보이나, 실은 풍수지탄(風樹之嘆, 어버이가 돌아가시어 효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슬픔)의 의미다. 방호정 옆 판각고엔 방호문집의 판각도 보관되어 있다.

방호정처럼 흔히 정자(亭子)라는 이름이 너무 쉽게 붙어 자칫 풍류만을 즐기던 곳으로 간주되는 정사(精舍)를 가끔 보게 된다. ‘초간정’(草澗亭) 대신 굳이 ‘초간정사’(草澗亭舍)라는 이름을 강조하려는 경북 예천 권씨 가문의 뜻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듯싶다.

광해군의 폭정을 피해 벼슬길을 마다하고 산중처사로 학문에 열중했다는 방호 선생. 선생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버이의 뜻을 이어받고자 정사를 지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외지고 외진 청송의 골짜기 절경에 풍류를 실현할 절경의 정자를 짓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