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마을 지나 미술관 옆 바래길

[남해바래길 걷기여행 ⑥] 제7코스 화전별곡길

2021-05-18     황소영 객원기자

[여행스케치=남해] “하늘의 끝, 땅의 변두리, 한 점 신선이 사는 섬. 왼쪽은 망운산이고, 오른쪽은 금산, 봉내와 고내 흐르고, 산천이 기묘하게 뛰어나 호걸과 준사들이 모였나니, 인물이 번성했네. 아, 하늘 남쪽 경치 아름다운 곳의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 제1장 중에서 

남해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지난달 걸었던 전도마을과 둔촌마을을 지나 삼동면 일대로 내달렸다. 곧 7코스 ‘화전별곡길’의 출발점이니 엉덩이가 들썩들썩 긴장을 한다. 버스는 이번에 내릴 정류장과 다음에 내릴 정류장을 미리 알려주었지만 혹여 내릴 곳을 놓칠까, 기사님께 한 번 더 확인을 한다. “여기서 내리면 되나요?” 물건리와 독일마을 사이의 정류장에서 내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남해 대표 관광지, 독일마을
월요일이라 그런가 싶지만 사실 버스를 갈아 타가며 여행에 나선 이들은 많지 않다. 한가한 정류장과는 달리 독일마을 안쪽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번 구간의 총 거리는 17km, 독일마을~화천제방~내산저수지~바람흔적미술관~휴양림 임도~천하마을로 이어지며 쉬엄쉬엄 6시간쯤 걸리는, 결코 만만치 않은 코스다. 

독일마을에 도착했을 땐 벌써 낮 12시. 도로 옆 식당에 들러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시 길 위에 섰을 땐 이미 1시가 되어 있었다. 4월에도 한파주의보가 내려질 만큼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던 봄볕은 이번엔 한여름처럼 뜨겁게 이글거렸다.

독일마을은 2006년 방영한 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배경이 되면서 남해의 대표적 관광지로 급부상했지만 파독전시관이 생기면서 근래엔 마을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가족과 나라를 위해 독일로 떠났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간호사들, 현지인들이 꺼렸던 탄광에서 묵묵히 일했던 광부들. 

그리고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70여 명의 아까운 청춘들…. 노년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이 하나둘 모여 정착한 곳이 독일마을이지만 지금은 남해 여행자들이 한 번쯤 거쳐 가는 명소가 되었다. 독일마을 옆엔 예쁜 정원과 카페 등으로 꾸며진 원예예술촌이 있다.

독일마을 꼭대기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선 길은 화암교 앞에서 왼쪽으로 꺾이며 제방으로 이어진다. 여행자들의 달뜬 흥겨움도 활력에 넘쳐 좋았지만 차들의 소음에서 막 벗어난 건 더 좋았다. 제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세상은 음소거 상태가 된다. 화천 물줄기 소리만 시원하게 들렸다. 대신 그늘이 없는 건 흠이었다. 나무는 많지만 아직 그늘이 되어줄 만큼 크진 않았다. 

한숨 돌리기 위해 벤치에 앉았는데 자리 끝에 범상치 않은 게 있다. ‘TANK SOLAR’라고 적혔는데 일반 벤치와는 뭔가 다르다. 의자 끝 검은색 바탕은 꼭 무선충전기처럼 생겼다. 혹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올려놓으니 거짓말처럼 충전이 된다. 오호, 주인이 간식을 먹는 동안 폰도 제 배를 채울 수 있는 의자다.

INFO 쿤스트라운지
구간 초입인 독일마을에는 식사를 해결할 곳이 많다. 어디든 맛과 가격은 비슷하다. 쿤스트라운지에선 소시지와 독일맥주를 맛볼 수 있다. 연중무휴이며 남은 음식은 포장도 가능하다.
주소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34
문의 070-4111-4058

꽃이 흐르는 개울, 화천을 따라
온통 신록으로 물이 든 세상 속에서 계절에 상관없이 붉은 잎을 단 단풍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1시간 동안 남해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렸던 지난달, 정류장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이 단풍나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다 외국이냐고 묻더라고요.” 

아주머니는 휴대폰에서 단풍나무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가을에 훨씬 예쁘니 꼭 가을에도 오세요.” 사진을 볼 땐 잘 몰랐는데, 막상 걸어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다. 바래길 옆 나무는 아직 작았지만 빛깔은 영락없는 가을이었다.

길 중간에 ‘고향의 강’ 공원이 있다. 6년 전쯤에도 이 구간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땐 여기저기 파헤쳐져 길이 없었는데, 어쩌면 이 공원을 만들기 위한 공사였는지도 모르겠다. 공원 입구엔 “예로부터 화천은 봄이 되면 피었던 꽃이 물에 떨어져 흘렀다 하여 꽃내”라고 불렸단 안내판이 있다. 

개울 너머에선 여전히 공사 소음이 들렸지만 공원 한쪽엔 타프를 치고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화장실도 있고 쉬어갈 공간도 있지만 식수나 간식은 넉넉히 챙기는 게 좋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마실 물의 양도 늘어난다.

독일마을에서 7km 가량은 도로와 제방의 연속이다. 왼쪽으론 화천이 흘렀고, 오른쪽에는 밭이 있었다. 밭 너머 위쪽은 2차선 아스팔트 도로인데, 도로 위로 빨간색 세모 지붕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보였다. 카페다. 너무 더워서 들어가 시원한 음료라도 마실까, 싶은데 밭두렁을 지나 도로까지 갔다 돌아올 걸 생각하니 내키지가 않는다. 물론 제방과 도로는 어차피 만난다. 카페에 들렀다 도로를 따라 바래길에 합류해도 상관은 없었다. 이 도로는 내산저수지를 지나 바람흔적미술관으로 이어진다.

INFO 남파랑길 40코스
남해바래길 3코스부터 7코스까지는 남파랑길과 길이 겹친다. 3코스 동대만길이 남파랑길 제36코스여서 이번 7코스는 40코스가 된다. 남해버스터미널에서 독일마을로 가는 버스는 아침 6시 35분 첫차부터 저녁 8시 10분까지 하루 13회 운행하며 요금은 3300원이다. 도로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50분쯤 걸린다.

무료로 만나는 예술작품, 바람흔적미술관
“개인… 및…니다” 드문드문 떨어진 빨간 글씨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지만 ‘바람흔적’은 그야말로 바람 속에서도 잘 버티어 있었다. 개인이 설립 운영하는 이 미술관은 무료입장이 가능해 누구나 쉽게 멋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카페 겸용 공간이다. 

그림은 철마다 바뀌어 자주 가도 지루하지 않다. 하필 바래길에 나선 날은 휴관, 쉬는 날이어도 미술관 마당까진 출입이 가능하다. 건물 2층엔 간판처럼 빨간색 벤치가 있어 쉬어갈 수도 있다. 들어갈까? 하다가 관둔다. 아직 가야 할 길이 10km쯤 남았다.

나비생태공원을 우측에 두고 저수지를 따라 좁은 길이 이어진다. 독일마을부터 내내 따라온 도로는 남해편백자연휴양림에서 끝난다. 바래길은 휴양림 직전에서 왼쪽으로 꺾인다. 휴양림을 관통하던 길이 휴양림을 돌아가는 걸로 바뀌면서 걷는 거리가 늘었다. 

독일마을, 파독전시관, 원예예술촌, 바람흔적미술관, 나비생태공원 등 이번 구간은 특히 관광명소가 많지만 모두 들러보려면 하루가 꼬박 필요하다. 자칫 여유를 부렸다간 산중 임도에서 어둠을 맞을 수도 있다. 해가 길어진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임도 직전에 계곡이 있다. 내내 뜨거운 도로와 제방을 걸은 터라 작은 계곡이 너무 반갑다. 배낭을 내리고 징검다리에 앉는다. 발목을 죄었던 등산화를 벗고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근다. 대기봉(502.7m)의 맑은 물줄기가 땀에 젖은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며 지난다. 간식을 먹고 다시 길을 잇는다. 

이제부턴 구간 종점인 천하마을에 닿기까지 내내 임도다. 내리막은 그렇다 쳐도 오르막은 결코 만만치 않다. 헉헉, 숨소리만이 텅 빈 산속에 메아리쳤다. 전망대에서도 1시간 10분은 더 내려가야 길이 끝난다. 의외로 쉽지 않은 길이다. 다음 구간이 시작되는 천하마을에 도착했을 땐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INFO 남해편백자연휴양림
구간 종점부인 대기봉 아래 있으며 산림청에서 운영한다. 나무로 지어진 숲속의 집은 비수기 평일 4인 기준 4만원이고, 비수기 주말과 성수기는 모두 7만3000원으로 동일하다. 벽돌 건물인 휴양관은 5인 기준 주말 9만1000원이다.
주소 경남 남해군 삼동면 금암로 658
문의 055-867-7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