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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실천하는 선비’의 가르침은 아직 흐르고 있다
‘실천하는 선비’의 가르침은 아직 흐르고 있다
  • 노규엽 기자
  • 승인 2018.01.03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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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과 산천재, 그리고 지리산
남명 조식이 지리산 자락에 들면서 12년간 살았던 산천재. 사진 노규엽 기자

[여행스케치=산청] 병풍처럼 곧추선 지리산 천왕봉의 좌우 능선이 한 눈에 보이고, 천왕봉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마을을 끼고 흐르는 산청군 시천면. 이곳에 변함없는 자연만큼이나 유유히 이어지고 있는 한 선비의 정신이 있다.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중기 영남학파의 거두로 일컬어지는 남명 조식. 그가 이룬 성리학 학통은 그의 호를 따서 남명학파라 불리었고, 조선 후기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리산에서 완성된 조식의 학덕
시천면에 남아있는 조식 관련 유적지는 ‘산청 조식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305호로 지정되어 있다. 먼저 들러볼 곳은 가장 대표적인 장소인 산천재. 조식이 지리산 자락에 거처를 정했던 1561년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12년간 지냈던 곳이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과거 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처가인 김해와 친가인 합천을 오가며 살았던 조식이 무슨 연고로 나이 60이 넘어서야 산청에 오게 된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안승필 산청군 문화관광해설사는 그 이유가 지리산에 있다고 말한다.

“현대인들도 지리산의 자연을 찾아오듯이, 옛 시절 선비들에게도 지리산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단순히 여행을 오는 것이 아닌 수양의 연속이었다는 거죠.”

산천재 맞은편에 있는 남명기념관에 들르면 조식에 관해 상세히 알아볼 수 있다. 사진 노규엽 기자

기록에 따르면 조식은 지리산을 12번이나 드나들었다고 한다. 산수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지리산 한 모퉁이를 빌어 일생을 마무리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 고운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청학동(지금의 불일폭포 일대)과 하동 의신마을 인근 칠불사 등 여러 곳을 방문하였으나 끝내 자리 잡은 곳은 산청이었다.

천왕봉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아 봉우리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산천재를 짓고 살기로 했던 것. 안승필 해설사는 “조식은 이곳에서 학문 체계를 완성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영남의 두 스승 중 한 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도 산천재 앞에는 조식이 직접 심은 남명매라는 매화나무가 남아있고, 매년 봄이면 꽃을 피운다니 조식의 정신을 잇고 있는 듯하다. 한편, 남명매는 정당매, 원정매와 함께 산청 3매로 불린다.

Info 산천재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384

조식이 말한 선비의 덕목은 실천
산천재 맞은편에는 조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놓은 남명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그와 관련된 서적이나 생전 사용했던 도구 등을 통해 그가 남긴 선비정신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경(敬)과 의(義) 두 글자로 집약됩니다. 평소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경의검과 성성자로 비추어 그 뜻을 되새겨볼 수 있죠.”

조식은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ㆍ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를 새긴 경의검과 방울 두 개를 묶어놓은 성성자를 지니고 다니며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을 수행하는 도구로 삼았다. ‘내명자경, 외단자의’란 먼저 자신을 수양하여 근본을 세운 다음, 밖으로는 정의를 과단성 있게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명자경, 외단자의'를 새겨 늘 소지하고 다녔던 경의검. 사진 노규엽 기자
조식은 성성자를 띠에 차고 다니며 마음을 수행하는 도구로 삼았다고 한다. 사진 노규엽 기자

조식은 본인이 정립한 사상을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직접 실천했음은 당연하다. 남명기념관 앞마당에 자리 잡고 있는 조식 동상 옆 비석들에서 이를 알아볼 수 있다. 각각 선조와 명종에게 올렸던 상소 전문을 한글로 적어놓은 비석이다.

“조식은 과거에 급제한 적은 있으나 현실 정치를 하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안테나는 항상 조정과 백성들의 삶을 향해 있었습니다.”

비석에 적힌 글을 보면 조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임금의 잘못을 꾸짖고, 명종을 향해서는 ‘고아’라는 격한 표현도 하는 등 두려움 없이 쓴 소리를 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안승필 해설사는 “누구에게라도 옳음을 이야기했던 곧은 성품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념관 뜰에 있는 상소문 비석을 통해 조식의 곧은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사진 노규엽 기자

Info 남명기념관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468-1
055-973-9781

남명학의 산실, 덕천서원
남명기념관에서 중산리 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덕천서원이 남아있다. 조식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에 제자들이 힘을 합쳐 그를 기리는 사당인 숭덕사와 서원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서원이 건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한 차례 불타고 만다. 안승필 해설사는 이 일도 조식이 후대에 남긴 영향력 때문이라 말한다.

“선생의 제자이면서 외손녀 사위가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나라에 맞선 홍의장군 곽재우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영남 지방에서 의병들이 무수히 일어났는데, 바로 선생이 남긴 선비정신과 실천주의 사상이 영향을 주었던 거죠.”

사료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수는 무려 2만2000여 명에 이르는데, 그 중 1만 이상이 영남에서 집계됐다고. 안 해설사는 “그의 제자들이 의병 봉기라는 사회적 실현으로 스승의 학문에 결실을 맺어준 것”이라며 “그래서 남명 조식은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는다”고 덧붙인다.

왜병들이 곽재우의 본거지가 이곳이었음을 알고 지리산 골짜기까지 찾아와 불태웠다는 것. 죽은 조식이 살아있는 왜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셈이다. 그렇게 서원은 소실되었지만, 1602년에 다시 중건되었고 이후 한층 이름값을 높인다.

덕천서원 입구의 홍살문과 400살이 넘었다는 은행나무. 사진 노규엽 기자
덕천서원은 조식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에 제자들이 힘을 모아 건립했다고 한다. 사진 노규엽 기자

“원래 서원 이름은 덕산서원이었습니다. 그런데 1609년에 사액서원이 되면서 덕천서원이라 적힌 현판이 내려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거죠.”

임금이 직접 글씨를 적어 하사한 현판에 왜 원래 이름과 다른 덕천서원이 적혔을까?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이름이 바뀐 것과 관계없이 오랜 세월 남명학의 산실로 유지되며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이제는 서원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조식을 기리는 제사만 유지되고 있다는 덕천서원. 그러나 실천을 중요시했던 조식의 정신은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필요함이 느껴진다.

Info 덕천서원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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