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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소설 속 삶의 한자락, 남원에 있었네
소설 속 삶의 한자락, 남원에 있었네
  • 김샛별 기자
  • 승인 2018.02.05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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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아, <만복사저포기>부터 <혼불>까지 읽어다오
우리나라 4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히는 광한루. 사진 / 김샛별 기자

[여행스케치=남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판소리계 고전 소설인 <춘향전>은 양반인 이몽룡과 기생의 딸, 춘향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야기. 그 사랑의 시작은 일년 중 가장 좋은 날이라 불리는 오월 단오였다.

여느 여인들처럼 난초같이 고운 머리 가지런히 땋아 금빛 봉황이 새겨진 비녀를 꽂고, 비단 치마 단정히 두르고 나간 춘향을 방자를 앞세워 광한루에 간 이몽룡이 발견한다.

몽룡이 한양으로 떠나는 길목이었다 하여 17번 국도는 '이몽룡고개'로도 불린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춘향과 몽룡의 드라마가 펼쳐지다

누각에 올라앉은 이몽룡이 단오날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을 보고 한 눈에 반한 것처럼, 광한루원의 아름다움에 사랑에 빠지지 않는 이 누가 있을까.

은하수가 흐르는 것처럼 요천의 물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그 위로는 신선이 산다는 영주, 봉래, 방장 세 개의 산이 섬처럼 떠있다. 이몽룡의 눈엔 춘향이만이 전부가 되었지만, 이곳을 찾은 이들의 눈에는 춘향이의 아름다움만큼이나 광한루원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백년가약을 약속하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이들의 사랑은 몽룡의 아버지가 남원부사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며 이별을 맞는다.

몽룡이 한양으로 올라가던 그 길은 지금 전주와 남원을 잇는 17번 국도. 이 길로 그 옛날, 이몽룡이 한양으로 떠나 ‘이몽룡고개’로 불리고, 그 맞은편으로는 춘향이 이몽룡을 쫓아가다 벗겨진 버선이 밭이 되었다는 ‘버선밭’도 있다.

오리정 앞에는 작은 연못 두 개가 있어 춘향이 눈물방죽이라고도 불린다. 사진 / 김샛별 기자

근방에는 2층 목조건물인 오리정이 있다. 최영완 남원시 관광안내사는 “오리정은 관아가 있던 곳에서 서울 쪽으로 오리 정도 떨어진 곳에 지어진 정자를 말한다”며 “우리나라에 오리정이 남아 있는 곳은 남원뿐”이라 설명을 덧붙인다.

오리정 앞에는 창포 우거진 연못 두 개가 있는데, 춘향이 눈물을 흘려 방죽이 되었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슬픔이 있으면 행복도 다시 찾아오는 법. 익히 알다시피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다시 남원으로 오는데, 이때 넘은 고개엔 ‘춘향고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지금은 고개 근처에 국도가 지나가고, 춘향터널이 뚫려 교통로보다는 소설의 배경을 음미하며 봄이면 배롱나무 피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사랑받는다. 

만복사지 터에서 발견된 거대한 석인상이 눈길을 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죽은 자와 3일 간의 단꿈 같은 사랑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 <춘향전>이었다면,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 <만복사저포기>다. <만복사저포기>가 실려 있는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지은 것으로 한문으로 쓰인 우리나라 최초의 단편소설집이다.

<만복사저포기>는 매년 3월 24일, 청춘 남녀들이 소원을 비는 만복사의 풍습에서 시작한다. 남원에서 홀로 살아가던 양생은 부처님께 “만약에 제가 지면 법연(法筵)을 차려서 부처님께 갚아드릴 것이고, 만일 부처님께서 지시면 반드시 제 소원인 어여쁜 아가씨를 얻게 해주시옵소서”라며 내기를 하고 이긴다.

불좌 뒤에 숨어 인연을 기다리던 양생 앞에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며 축원문을 읽는 여인이 나타나고, 둘은 행랑이 끝난 곳에 좁다란 판자방에서 운우(雲雨)의 즐거움을 나눈다. 여인의 집에서 3일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여인은 양생에게 이별의 시간이 되었다며, 은그릇을 주고 절로 가는 자신을 기다리라고 한다.

양생은 여인의 부모를 만나게 되고, 그 부모를 통해 여인이 왜구들의 난리 때 죽은 처녀의 환신임을 알게 된다. 양생은 여인과 약속한 시간에 만복사에서 만나 함께 잿밥을 먹고 서로 영영 이별하게 되는 이야기다.

지금은 터만 남아 만복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사진 / 김샛별 기자

<만복사저포기> 속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승려들이 한쪽 구석진 골방으로 옮겨가 있었고, 법당 앞에는 행랑만이 쓸쓸히 남아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고려 시대 융성했던 만복사가 조선 시대 김시습에게 이렇게 묘사된 것은 조선이 억불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만복사가 모두 소실되고 터만 남은 것은 정유재란(1597년) 탓이다. 당간 지주 역할을 했던 석인상과 석탑의 잔해, 수많은 주춧돌 등이 고려 시대 얼마나 융성 했었는지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는 ‘백뜰’, ‘만복사귀승’과 같은 말로도 전해져 내려온다. 삼천여명의 스님들의 회색빛 옷을 광지천 뚝방에 걸어두면 햇빛이 비춰 반짝반짝 했던 것을 ‘백뜰’이라 불렀고,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는 승려들의 긴 행렬을 ‘만복사귀승’이라고 해 남원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최영완 안내사는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던 시절 ‘남성의 정절’을 이야기 한 <만복사저포기>는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이 단종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며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지조를 팔지 않고,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한 의지의 표현이 양생과 여인의 생사를 초월한 사랑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옥으로 지어진 혼불문학관 전경. 사진 / 김샛별 기자

스러지는 노봉마을의 종가와 그 시절 풍속사

<혼불>은 1930년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수백 년 대를 이어오고 있는 남원 매안 이씨 집안의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는 며느리 3대의 삶과 그 종갓집에 붙어 땅을 부치며 생을 부지하는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다.

전시관과 꽃심관, 두 채의 한옥이 너른 평지에 나란하게 놓여 있는 혼불문학관과 그 주변 종가, 노봉서원, 청호저수지, 달맞이동산을 비롯해 서도역, 근심바위, 당골네 집, 홍송 숲 등이 모두 소설 <혼불>의 무대다. 실제로 노봉마을은 최명희 작가의 선조인 삭녕 최씨 집안이 500년 동안 살아온 곳이기도 하다.

소설 <혼불>의 첫 장면인 강모와 효원의 혼례식을 디오라마로 꾸며두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혼불문학관은 장장 17년 동안 이어진 10권 분량의 <혼불>을 읽지 않아도 문학관을 둘러보면 <혼불>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강수 명혼식, 춘복이 달맞이, 쇠여울네 종가 마루찍기, 청암부인 장례식 등을 디오라마로 호남지방의 세시풍속을 소설 속 장면에서 발췌해 소개한다.

스쳐 넘어갈 수 있지만 귀한 것이 문학관 내에 하나 있다. 소설 속 청암부인의 실제 모델인 효원의 사주단자가 그것이다. 소설 <혼불>의 첫 장면은 강모와 효원의 혼례 당일, 사주단자를 열어보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청암부인의 실제 모델인 효원의 사주단자. 사진 / 김샛별 기자

‘길광편우’라 하여 최명희는 취재수첩을 만들고, 남원 사투리 하나하나까지 연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런 그 역시 효원의 사주단자는 실제로 보지 못하고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다고 한다.

김선주 남원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사주단자는 죽을 때까지 고이 간직했다 장례식 때 꽃신을 만들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며 “그래야 저승에서도 남편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게다가 140자 이상의 명문으로 된 사주단자라 더욱 보기 힘든 것”이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혼불문학관에 기증한 것이라 한다.

청호저수지와 달맞이 언덕. 사진 / 김샛별 기자

혼불문학관을 나서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청호저수지다. 지금은 겨울에도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지만, 소설 말미에서 청호저수지는 마치 기우는 매원이씨 집안을 상징하듯 가문다.

목욕도 해서도 안 되고, 물고기를 잡는 것도 금기시 되었지만 창씨개명 이후 신분제와 가문의 몰락을 드러내듯 소설 속에서 마을 천민들이 물놀이를 하고, 낚시를 하기도 했다.

청호저수지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은 달맞이 동산이다. 소설 속 떠꺼머리 노총각 춘복이 강실이가 자신의 아이를 낳아 신분상승을 하고 싶다 정월대보름날 달맞이를 했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삭녕최씨 노봉문중 종가이자 <혼불>의 무대인 종가는 2007년 화재로 안채가 소실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굳게 닫힌 대문이 아쉬움을 더하지만, 마을길을 걸으며 종가의 크기로 미루어 그 위세를 가늠하기엔 충분하다.

옛 서도역 주변으로 조성된 소설 <혼불> 테마의 작품들. 사진 / 김샛별 기자

서도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철도를 따라 15분쯤 걸으면 나온다는 춘복이, 옹구네 등이 살던 거멍굴은 지금은 농경지로 변해 그 흔적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옛 서도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혼불>과 관련한 벽화가 있어 쉬엄쉬엄 마을을 둘러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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