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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4월호
인천 개항장 시간여행의 재미를 더하는 '대불호텔 전시관' 개관
인천 개항장 시간여행의 재미를 더하는 '대불호텔 전시관' 개관
  • 김샛별 기자
  • 승인 2018.05.15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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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전시관·생활사 박물관으로 인천 여행하기
지난 4월 개관한 대불호텔 전시관 안 재현된 객실 내부. 사진 / 김샛별 기자

[여행스케치=인천] 대불호텔은 1888년(고종 25년), 개항기 제물포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선박을 상대로 물자 공급업을 했던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가 세운 이 호텔은 인천항을 출입하던 서양인을 상대로 근대적 숙박업을 경영했다.

그러나 경인선이 부설되고, 인천-서울 간 교통이 편리해지자 인천의 숙박업 자체가 쇠퇴하게 되고, 1919년 폐업했다. 그 뒤 건물주가 수차례 바뀌었고, 1978년 대불호텔 건물은 철거됐다.

옛 사진들을 토대로 재현된 대불호텔 외관. 사진 / 김샛별 기자
대불호텔 전시관 1층은 발견된 유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한동안 터로 남아 있었던 자리에서 2011년 공사 도중 지하에서 기단 등 유구가 발견되면서, 인천광역시 중구청이 지난달 6일, 국내 최초의 첫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재현되었다.

붉은 벽돌 건물에 하얀색으로 칠한 나무 창문, 아치형 현관, 2층 발코니 등 고전적인 건축양식 그대로 지어졌다.

1층은 유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바닥으로 되어 있어 흙을 다지고, 작은 함석들을 채운 뒤 모래를 채우고, 회다짐으로 마무리한 뒤 적벽으로 세운 국내 초기 서양식 건축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유구가 발견되기는 했지만 대불호텔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내부 사진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외관 사진 역시 몇 장이 전부다. 이러한 이유로 김남희 인천중구시설관리공단 문화사업팀 학예사는 “복원이라는 말 대신 재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적확하다”고 했다.

당시의 대불호텔을 상상할 수 있도록 프로젝션맵핑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편안할 정도로 큰 방, 침대와 의자, 서양음식과 양탕국…
1885년 조선에 입국한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는 대불호텔에 대해 “호텔방은 편안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몹시 더웠다. 저녁 식사를 위해 우리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테이블에 앉은 우리 앞으로 서양음식이 놓였다”고 <비망록>에 기록해두었다.

또한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겼다.

당시 인천에는 아사히야 여관, 아사오카 여관, 도고여관, 키쿠야 여관 등 각 동마다 일본식 여관이 9개 이상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다미방을 갖춘 일본식 목조 기와집이었다.

당시 크고 작은 객실 7개 내외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대불호텔. 사진 / 김샛별 기자
서양식 호텔식 서비스를 제공했던 대불호텔. 사진 / 김샛별 기자

이에 반해 대불호텔은 현재 외관에서도 알 수 있듯, 서양식 외관은 물론 침대와 의자가 모두 서구식이었으며, 음식 역시 서양식으로 제공됐다.

대불호텔 전시관 2층은 이러한 대불호텔 객실을 재현해두었다. 톤다운된 블루톤의 고급스러운 벽지, 고급스러운 침구, 레이스와 두터운 커튼이 이중으로 달린 커다란 창, 구조가 단순하면서도 장식이 많아 중후함을 띄는 르네상스식 가구들이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빛난다. 나팔 모양의 축음기와 티테이블, 20세기 명화 등이 걸린 벽 역시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대불호텔의 객실별 숙박료에 대한 기록을 통해 대불호텔이 상당히 고급호텔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식 여관이 50전에서 1원 정도였던 것과 달리 대불호텔은 1원 50전에서 2원 50전까지로, 당시 한국인 노동자 하루 임금이 23전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서양인을 대상으로 했던 대불호텔이 상당히 비싼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 사용되었던 커피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20세기 전시품들로 꾸며 그 시절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재현된 객실 바깥에는 20세기에 사용되었던 테이블웨어 세트와 티세트가 전시되어 있다. 대불호텔은 국내 첫 서구식 호텔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카페로도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김남희 학예사는 “호텔은 원래 밥을 먹을 수 있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연회장을 갖춘 시설을 뜻한다”며 “음식이 나왔고, 그 후식 중에 커피가 나왔었던 것으로 봐야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커피의 영어 발음을 따 가배, 가배차, 가비차 등으로 불렸지만 일반 민가에서는 색이 검고, 쓴맛이 나는 커피를 마치 한양탕처럼 여겨 ‘양나라에서 넘어온 탕국’이라 하여 ‘양탕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서양인들에게 최초로 커피를 제공했던 대불호텔에 맞추어 2층 전시관에서는 20세기에 사용되었던 원두커피로스터, 커피주전자, 커피메이커 세트 등을 전시해두었다. 손탁호텔에서도 보기 힘든 귀한 것들이다.

커피메이커 세트는 마치 터키의 이브릭과 비슷하기도 하고, 로스터는 꼭 달고나를 만드는 국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둥 하나 없이 넓은 공간을 자랑하는 3층 연회장. 사진 / 김샛별 기자

3층 연회장은 기둥 하나 없이 커다란 공간을 자랑한다. 이는 대불호텔의 건축적 특징을 드러낸다. 기둥 없이 벽체가 하중을 지탱하는 붉은 벽돌만으로 조성되어 건물 외벽의 두께가 내벽보다 두텁게 조성된 것.

3층에서는 조선에서 열린 연회를 그려놓은 옛 삽화와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스피커가 내장된 보다 최신형의 축음기에서 클래식한 음악이 흘러나와 즐거움을 더한다.

김남희 학예사는 “구락부는 영사관 등 특정인들이 모이는 사교 장소였다면 대불호텔 연회장은 숙박객이 모두 사용할 수 있어 보다 자유로웠다”며 “민간 연회장인만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여러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곳에서는 현재 <디아스포라 영화제>가 6월까지 진행되며, 연회장은 세미나, 강연회, 전시회 등 다양하게 열릴 예정이다.

청일 조계지 계단을 경계로 사진 왼쪽은 일본인 조계지, 오른쪽이 청국 조계지로 나뉘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청나라, 일본의 분위기가 물씬… 근대 개항장 거리

대불호텔은 공교롭게도 청국 조계지와 일본 조계지를 가르는 바로 그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나와 왼쪽 편으로는 중국식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거리가, 오른 편으로는 일본이 지은 옛 건물들을 볼 수 있다.

활기차고 화려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인천 차이나타운. 사진 / 김샛별 기자

여전히 성업 중인 중국요릿집이 1층에, 주거용 건물이 2층에 있는 거리는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데 반해 석조로 지어놓은 구)인천 일본제일은행지점, 구)일본58은행 인천지점, 구)일본18은행 인천지점 등은 단조롭지만 후기 르네상스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당시 거주했던 일본인들은 모두 광복되며 돌아갔기 때문에, 여전히 인천화교들의 생활터전인 청국 조계지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이제는 용도가 변화한 일본식 근대 건축물과 적산가옥의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근래 들어 적산가옥처럼 겉면을 목조로 단장해놓은 건물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새로 조성되어 깔끔한 적산가옥거리. 사진 / 김샛별 기자
2층, 3층은 다다미방을 남겨둔 카페 팟알. 벽엔 옛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이 중, 3층짜리 갈색 목조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현재 카페 팟알로 운영중인 이 건물은 1880년대 말~1890년대 초에 지어진 한 하역 회사의 건물로, 근대 일본 점포 겸용 공동 주택의 하나인 마치야 양식을 보여주어 등록문화재 제567호에 등재되었다.

카페 팟알의 2층, 3층은 옛 다다미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시간여행을 하러 온 여행자들에게 인기다.

대불호텔 전시관과 바로 맞붙어 있는 생활사 박물관. 사진 / 김샛별 기자

6~70년대의 중구 생활사까지 볼 수 있어
근대 개항장의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는 대불호텔 전시관과 차이나타운, 일본인 조계지를 둘러봤다면, 6~70년대 중구 생활사를 볼 수 있는 생활사 전시관도 들러볼 것을 권한다.

대불호텔 전시관과 바로 맞붙어 있는 ‘생활사 전시관’은 다양한 체험을 비롯해 과거 추억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양복점 '골덴라사'를 재현해놓았다. 실제 옷을 빌려볼 수도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생활사 박물관 내 추억의 이발소의 모습. 사진 / 김샛별 기자

양복점 ‘골덴라사’를 재현해놓아 한복, 교복을 비롯한 양장을 대여해 입어볼 수 있고, 옛 이발소를 옮겨놓은 듯한 공간에서는 실제 의자에 앉아 포토 스팟이 되어준다.

개항 후 인천의 중심이었던 중구 지역 주택은 서양인 주택, 신흥 부유층의 기와집, 일본집 등이 특징이었는데, 이러한 가정집 내부를 꾸며놓기도 했다.

김남희 학예사는 “현재 중구의 박물관 협회 분들이 많이 기증했다”며 “중구 주민들이 한 땀 한 땀 꾸며놓아 더 애착이 가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7~80년대 가정집을 재현해놓아 정감을 더한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안에선 옛 영화인 <카인의 후예>가 실제로 상영되어 약 10분 정도, 관람해볼 수 있다. 사진 / 김샛별 기자

인천의 대표 영화관이었던 인형극장을 작게나마 조성해 옛 영화인 <카인의 후예>를 감상해볼 수 있으며, 그 앞에는 유명한 목로주점이었던 ‘백항아리집’도 재현해두었다.

의자 없이 서서 마시는 싼 술집인 ‘백항아리집’의 추억은 물론, ‘은성다방’, ‘인천 도나스’, ‘신흥전파사’ 등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중구의 오랜 점포를 만들어두어 실제로 이곳에서 구매하고 체험해보며 문화생활의 일부를 느낄 수 있도록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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