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4월호
<박상대의 추억 여행> 해남 대흥사 숲길아~ 내 젊은 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기억창고여!
<박상대의 추억 여행> 해남 대흥사 숲길아~ 내 젊은 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기억창고여!
  • 박상대 기자
  • 승인 2018.05.17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0년마다 한 번 이상 찾은 대흥사... 5월 연두색 숲길 속 기억여행
연두빛 숲길이 펼쳐지는 해남 대흥사의 풍경. 사진 / 박상대 기자

[여행스케치=해남] 세월을 더듬어 보니 10년마다 한 번 이상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 까까머리 중학생 때부터  60세 중년(?)이 되어서까지 내 발길은 해남을 향해 끊임없이 내디디고 있었다. 5월 연두색 숲길을 거닐며 하나하나 떠 오르는 기억들을 적어본다.

천년고찰 대흥사는 그 역사가 깊다
나는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2km 숲길을 걸어서 다닌다. 근래에는 매표소에서 주차장까지 산책로가 있어서 그 길을 걷기도 한다. 찻길에는 자동차가 다녀서 편안한 걸음걸이를 할 수 없었는데 숲속에 산책로가 생겨서 편안한 산책을 할 수가 있다. 바람소리, 새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꽃잎 떨어지는 소리….
대흥사 초입의 이 숲길은 봄에는 싱그러운 모습으로, 여름은 풍성함으로, 가을엔 황홀함으로, 겨울에 순백의 신비감으로 내 기억창고를 채우고 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다시 찾을 때마다 그 이야기들이 기억창고를 뚫고 나온다. 

중학교 때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왔다
그 유명한 유선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장난꾸러기 친구의 주동으로 까까머리 소년 4명이 여관 담장을 넘었다. 아주 깜깜한 밤에 숲길을 헤치고 나가서 낯선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난생처음 마셔본 막걸리 맛은 달콤했다. 장차 술을 마실 수 있는 싹수가 보인다는 자평을 하면서 두세 잔씩을 나눠 마시고 여관으로 몰래 복귀했다. 넷 가운데 한 명이 여관방 툇마루에 막걸리를 토하면서 짜릿했던 탈선은 발각되었다. 담임 선생님도 어이없어하며 웃고 넘겼다. 

까까머리 소년 시절 처음 만났던 대흥사의 술속길은 변함이 없다. 사진은 땅끝천년숲옛길을 알리는 입간판. 사진 / 박상대 기자
첫사랑의 기억이 가슴에 남아 있음을 기억한다. 사진 / 박상대 기자
산중에 앉아 천 리를 내다보던, 그 스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사진 / 박상대 기자

그해 봄날 나는 홀로 이 길을 걸었다
80년 5월 18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광주에서 난리가 터진 그 날, 나는 스님 친구를 만나러 그 숲길을 걸었다. 숲은 온통 연두색이었다. 싱그럽게 새잎이 돋아 오른 것이다. 겨우내 사나운 바람을 만들어내던 나뭇가지들이 새로운 이파리로 연두색 터널을 만들어대고, 내 몸에선 잠들어 있던 감성이 꼬물꼬물 일어났다. 점심 공양을 마친 뒤, 스님은 광주에 아주 나쁜 기운이 감돌고 있다면서 몸을 잘 보존하라고 말했다. 산중에 앉아 천 리를 내다보던, 어느 날 훌쩍 대흥사를 떠나버린 그 젊은 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첫사랑 그녀와 숲길을 걸었다
20대 중반, 우연히 만난 첫사랑 그녀와 이 길을 걸었다. 숲 사이로 나 있던 자갈길에는 아스콘 포장길이 깔려 있었다. 짙은 숲은 상큼하고 푸른 바람을 불어 주었다. 계곡에서는 맑은 물소리가 새들과 노래를 부르고! 나무들은 온갖 향기를 내뿜어 그녀의 향기와 뒤섞였다. 흰색과 핑크색 원피스를 즐겨 입던 그녀는 웃음소리가 경쾌했다. 그러나 그 날, 그녀와 나는 우리의 사랑을 완성할 수 없게 된 현실을 원망하며 말수를 줄였다. 서로의 안녕을 빌며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 많이 미웠다.

어느 해 가을, 나는 다시 숲길을 걸었다
말을 아주 예쁘게 잘하는 문화관광해설사와 숲길을 걸었다. 이 숲길에는 황금터널이 건설되어 있었다. 노랑 빨강 갈색 나뭇잎들이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1년 중 단 일주일만 볼 수 있다는 황금터널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부자가 되었다. 빈한한 상상력에 황금빛 소재를 가득 채웠으니 얼마나 풍요로운가!

해남 대흥사의 겨울. 사진 / 박상대 기자
해남 대흥사 일주문. 사진 / 박상대 기자

그해 겨울, 나는 아내와 이 길을 걸었다
사위에는 온통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숲은 온통 순백의 화면만 비춰주고 있었다. 아주 가끔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눈송이들이 제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으로 떨어졌다. 감기에 걸린 아내는 은하철도 999에서 보았던 하얀 터널을 걸으면서 황홀해 했다. 세상에 이런 길이 있다는 사실에 아내는 놀라고 또 흥분했다. 아내는 눈 덮인 설야다원에서 쌍화차를 마시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른 아침에 다시 이 숲길을 걷는다
나이 60에 다시 찾은 대흥사 숲길이여, 고맙다! 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하얀 이팝나무꽃과 층층나무꽃이 숲을 더 환하게 비춰준다. 독한 가스와 역한 먼지에 오염된 나의 폐 속으로 상큼한 향기가 들어온다.   

해남 대흥사의 숲길. 사진 / 박상대 기자

나의 많은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숲길이여, 아름다운 숲 터널이여!
언젠가 다시 찾은 날, 나는 오늘 이른 아침에 혼자 이 길을 걸었던 추억을 꺼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중학교 친구들과, 친구 스님과, 첫사랑 그녀와,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을 것이다. 
지옥 같은 도시를 벗어나 천국 같은 숲길을 걸으니 가슴이 뛴다.

*이 글을 쓴 박상대는 월간<여행스케치> 기자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가는 여행>의 저자이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