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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5월호
[신정일의 역사기행] 녹두장군 전봉준이 종로에 선 이유는?
[신정일의 역사기행] 녹두장군 전봉준이 종로에 선 이유는?
  • 신정일 객원기자
  • 승인 2018.05.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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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떠난 여행... 정읍, 부안, 순창에 이어 종로까지
순국 123년 만인 지난 4월 24일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종로 영풍문고 앞에 세워졌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전봉준의 옛집.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여행스케치=정읍] 2018년 4월 24일, 서울 종로 영풍문고 앞에 한 사람의 동상이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 조선 후기 민란의 주인공이었던 전봉준의 동상이 그가 순국된 지 123년이 지난 뒤에 자랑스럽게 우뚝 선 것이다.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안도현 시인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 노래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출생지는 고창의 당촌리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생가는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다. 철종 6년인 1855년에 태어난 그의 이름은 영준, 자는 명숙, 봉준은 어릴 때의 이름이고, 녹두는 키가 작아 불린 별명이었다고 한다.

전봉준 생가가 남아있는 정읍의 한 마을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전봉준은 예닐곱 살까지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전주 구미리, 정읍 감곡 등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고 전한다. 특히 열여덟 살 되던 해에는 정읍 산의 동곡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사생을 결의한 동지 김개남을 만나게 된다.

그 후에도 고부 양교리, 조소리 등으로 집을 자주 옮기게 되는데, 이는 조선 말엽의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안식처를 찾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호남 제일의 정자로 꼽히는 피향정.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피향정 조규순 비.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그 무렵 조소리에서 지냈던 전봉준의 생활 모습을 전해 주는 한편의 글이 남아 있다.

“전봉준은 몸이 작지만 얼굴이 희고 눈빛은 형형하여 사람을 쏘는 듯하다. 평소 집에 머물 때는 동네의 소년들을 모아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어주거나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동네의 어른들이 찾아오면 고현(古賢)들의 사적을 들어 얘기할 뿐 세간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중략)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가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마음속 깊이 그를 존경했다. - <근대조선사近代朝鮮史>,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에 전봉준의 옛집이 남아있다. 전봉준의 집을 찾아갈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어색함이다. 논 서마지기를 지으면서 서당훈장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근근이 살았던 전봉준의 살림살이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옆집을 헐어서 정원을 만들었고, 방에는 놋화로가 놓여 있고 부엌에는 큰 부잣집에서나 사용되었을 뒤주가 놓여 있다.

하지만 벽에 걸린 형형한 눈빛의 조선 사내, 전봉준이 이 집에서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걱정했던 전봉준은 원평과 무장,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말목장터에서 김기범(金箕範, 김개남), 손화중(孫化中), 최경선(崔敬善)등 인생을 같이 할 동지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호령했던 고부관아는 고부초등학교로 변모했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조병갑이 연회를 베풀었다고 전해지는 군자정.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녹두장군 ‘전설’의 시작, 고부군
고부군은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큰 고을이었다. 이곳에 조대비의 조카이자 이조판서 심상훈의 사돈이었던 조병갑이 군수로 온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고부 사람들의 혈세를 짜내어 아버지 조규순이 현감을 지낸 태인에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그리고 원래 정읍천 변에 물을 갈무리하는 구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인천과 정읍천의 합수머리에 새로운 보인 만석보를 만들었다.

“큰 보를 만들어서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물세는 받지 않겠다.”

철썩 같이 약속했던 조병갑은 그 해 가을부터 ‘좋은 논은 쌀 두말, 나쁜 논은 한말’을 받기 시작했다. 그 당시 전라도는 3년간 내리 가뭄이 들어 농민들이 살길이 막막했던 터였다.

농민들의 참상을 보다 못한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비롯해 김도삼, 정익서 등이 물세를 감면해달라고 고부관아에 갔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괘씸죄로 곤장을 쳤고,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등창이 나서 죽었다.

그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자 조병갑은 1893년 11월 30일 익산군수로 전임되었고 다른 사람이 후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조병갑의 위세에 눌려 부임을 기피했고, 결국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 과정을 지켜본 농민군들의 감정이 활화산같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사발통문을 돌렸고 수천 명의 농민들이 말복장터 아래 모였다.

말목장터에 서 있는 감나무.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말목장터에는 그 당시를 지켜본 감나무가 있었다. 오래 전에 죽어서 기념관으로 옮겨 갔지만, 후에 심은 감나무가 제법 모양새를 갖춘 채 지금도 서있다. 그 자리에서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녀자와 노약자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떠나지 말라.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후회하게 된다. 탐관오리를 물리치고 마음 놓고 살기 위해 고부관아로 쳐들어가자.”

농민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새벽을 틈타 고부관아를 들이쳤고, 일부는 원성의 표적이 된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으며, 백산으로 달려가 성을 쌓았다. 그들이 고부관아에 도착했을 때, 농민군들의 위세에 겁을 먹은 조병갑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떵떵거리며 호령을 했던 고부관아는 일제 때 고부초등학교로 변모했다. 현재는 그 당시를 지켜본 고부향교와 조병갑이 연회를 베풀었던 군자정만 남아서 그날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동학혁명 백산 창의비.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작은 만석보 사적비가 거대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동학농민혁명은 농민들의 염원이었다

조병갑이 도망친 이후, 고부에는 박원명이 군수로 부임했고, 그의 회유책에 농민군은 해산한다. 그러나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는 농민들을 폭도로 몰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에 전봉준은 태인접주 김개남, 무장접주 손화중, 원평접주 김덕명과 함께 다시 무장봉기를 준비했고, 3월 20일 본격적으로 투쟁을 준비했다.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새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을 이룰 것을 원하노라.”

수많은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한 뒤 부안군 백산면에 있는 백산으로 모여들었고 그 산에서 운명을 건 한판싸움을 준비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 속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백산은 해발 47.5m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사방 4~50리 안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흰옷 입은 수천의 농민군들이 일어서면 백산(白山)’이 되었고 죽창을 든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산(竹山)이 되었다는 이 산은 예로부터 만인을 살릴 수 있다는 전설이 있는 산이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자리한 황토현 전적비.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당시 민중들이 불렀던 '파랑새요'가 새겨진 비.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혁명의 불길은 나라 전역으로 번져갔다. 깜짝 놀란 정부에서는 영관 이경호를 비롯한 감영군과 보부상부대 2천여 명을 급파했다. 동학농민혁명사에 분수령을 이루는 황토현 전투의 시발이었다.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위치한 황토현은 자그마한 고개다. 하지만 이곳 지리에 밝은 전봉준과 동학의 지도자들은 4월 7일 화호나루에 있는 감영군을 백산 쪽에서부터 유인했다. 부안 쪽으로, 평교리로, 고부로, 잡힐 듯 잡힐 듯 도망가는 농민군들을 쫓기에 지친 감영군들은 그날 밤, 술에 취한 채 잠들었다.

그 사이 봉홧불이 올랐다.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총이 불을 뿜었다. 영관 이경호가 죽고 감영군 482명, 보부상 162명과 농민군 6명이 죽었다.

농민군이 크게 이긴 황토현 고갯마루에는 1960년대에 세운 동학농민기념탑이 남아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는 그 당시 민중들이 불렀던 ‘파랑새요’가 새겨져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보리’라는 글 속에 그 당시 농민들의 절절한 바람이 서려 있는 것이다.

끝까지 기개를 지켰던 전봉준의 최후
그 뒤 농민군은 고창, 영광, 나주, 장성을 돌아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고,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은 뒤 오늘날의 지방자치제의 효시가 되는 집강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정부군이 농민군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재봉기를 결의한다. 

한 달여의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내일은 공주, 모레는 수원, 글피는 서울”하면서 기세 좋게 올라갔다. 그러나 기관총을 가진 일본군과 관군에게 쇠스랑이나 죽창을 가진 농민군은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공주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의 수뇌부는 논산과 원평 싸움에서도 지고, 태인 성황산 전투에서 패한 뒤 동학군을 해산했다. 입암산을 거쳐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피신했던 전봉준은 부하접주인 김경천의 고발로 다리가 부러진 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봉준이 체포되었던 피노리.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압송 중인 전봉준. 그는 끝까지 조선인의 굳센 기개를 잃지 않았다. 사진 / 신정일 객원기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을미년 삼월 스무아흐레 교수형을 당하기 전, "너희는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이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고 말했다. 지난 4월 24일 전봉준 동상이 종로 사거리에 세워진 이유이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일본군에게 재판을 받은 전봉준은 1895년 을미년 삼월 스무아흐레 봄비가 주절주절 내리는 가운데, 그의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법관이 전봉준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다른 할 말은 없다. 너희는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이거늘 어찌하여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최후의 순간까지 조선인의 굳센 기개를 잃지 않았던 전봉준.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 의롭게 살았던 영웅 전봉준은 가슴에 사무치는 유시 한편만 남기고 그렇게 갔다. 그의 나이 마흔 한 살이었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여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냐,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점이 된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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