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호 표지이미지
여행스케치 5월호
[세계유산 등재 확정]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①’ 경북 영주 부석사
[세계유산 등재 확정]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①’ 경북 영주 부석사
  • 조용식 기자
  • 승인 2018.06.30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바라본 태백산맥의 풍경은 장관
경북 영주시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바라본 태백산맥의 장엄한 풍경. 사진 / 조용식 기자

[여행스케치=영주]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만나는 일주문에 적힌 글씨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바라본 태백산맥의 장관을 기억한다면, 일주문에 적힌 ‘태백산 부석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주문 주변으로는 은행나무와 사과나무가 푸른 녹음을 자아내며 신록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며 두 개의 돌기둥이 우뚝 솟은 보물 제255호인 당간지주를 만날 수 있다. 

부석사의 일주문. 주변에는 은행나무와 사과나무가 신록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부석사의 당간지주. 사진 / 조용식 기자
돌계단 위로 천왕문이 보인다. 사진 / 조용식 기자

당간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부석사 당간지주의 높이는 428m이며,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천왕문이 나타난다. 불자들은 두 손을 합장하며,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가다듬는다. 다시 돌계단을 밟는다. 목어와 법고가 있는 범종각까지 길게 늘어선 돌계단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거웠던 속세의 상념은 사라져간다. 

범종각으로 올라가기 전에 만나는 부석사 삼층석탑. 양쪽으로 세워진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 만들어진 쌍탑으로 동탑은 360m, 서탑은 377m이며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은 거의 같다. 

부석사와 봉황산의 유래가 전해지는 선묘설화 
김금순 문화해설사는 “부석사 창건에 얽힌 선묘설화 이야기에는 용과 봉황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며 “1967년 무량수전 앞뜰에서 발굴된 5m가량의 석룡 하반부가 이 설화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범종각 앞에 세워진 쌍둥이 삼층석탑. 사진 / 조용식 기자
부석사 돌담길. 사진 / 조용식 기자
범종각의 목어와 법고가 부석사의 오랜 세월을 대변하고 있다. 사진 / 조용식 기자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로 공부를 할 때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 집주인의 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의상이 이를 의연하게 대했으며, 선묘는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한다.

공부를 마친 의상이 신라로 귀국길에 오르는데, 소식을 늦게 접한 선묘가 해안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의상이 탄 배는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선묘는 자신이 가지고 온 법복과 여러 가지 용품이 담긴 함을 바다에 던지며 배에 닿기를 기원하며,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웠다.


태백산 줄기에 절터를 발견한 의상이 그 터에서 도적 생활을 하던 산적을 만나 선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절을 짓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산적들은 의상을 죽이려 했고, 이때 선묘룡이 나타나 번갯불을 일으키고,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 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고 한다. 결국 산적들은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으며,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부석(浮石)이라 짓고, ‘봉황이 나타났다’고 해서 봉황산이라 불렀다.

무량수전, 고려 공민왕의 친필... 태백산맥의 풍경이 장관
영주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의 현판은 모양과 장식이 특별하다. 무량수전의 네 글자를 세로 두 줄로 썼으며, 현판의 모양과 장식도 고색창연하다. 현판에 적힌 무량수전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공민왕의 친필 글씨인 '무량수전' 현판이 인상적이다. 사진 / 조용식 기자
무량수전 앞마당에 있는 석등과 안양루. 사진 / 조용식 기자
부석사의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공민왕이 무량수전의 현판 글씨를 쓴 배경은 1361년 홍건적이 개경으로 진군한다는 보고가 있자 공민왕은 남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영주(당시 순흥)였다. 공민왕이 영주에 머물며 남긴 몇 점의 글씨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량수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의 하나인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과 단층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아래와 위는 좁지만 중간 부분이 항아리 모습처럼 큰 것이 특징이다. 이를 배흘림기둥이라 하는데,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부석사의 내부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부석사의 내부 모습. 사진 / 조용식 기자

무량수전의 앞마당에는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등으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 측면에는 안상을 2개씩 배치하였으며, 그 위의 아래 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태백산맥의 풍경으로 가히 장관을 이룬다. 푸른 하늘과 꿈틀거리는 용을 닮은 태백산맥들로 보는 이의 가슴이 탁 트이는 짜릿함을 전해준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676년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 앞 석등과 소조여래좌상 등 국보 5점과 3층 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 등 보물 6점, 그리고 원용국사비, 불사리탑 등 유형문화재 2점 등을 보유하고 있다. 

부석사 관계자는 “봉황산 한 자락에 위치한 부석사는 사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인 무량수전 등 볼거리가 많고 인근의 안동 하회마을과 연계할 수 있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한국의 전통미를 알리는 관광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Info 영주 부석사
관람료 성인 1200원, 군경/중‧고생 1000원, 초등학생 800원
주소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